-외전 21-
입덧이라니. 임신한 밀리안도 안 하는 걸 제가 하고 있다는 게 황당했다.
“어쩌시려고 이러는 겁니까? 밀리안님을 보살펴도 부족할 판에 주인님이 입덧이라니요.”
“…….”
“너무 그러지 마세요. 클레이가 일부러 이러는 것도 아닌데요.”
밀리안이 클레이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그녀를 대신해 열심히 변호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보는 벤틀로와 대니얼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엽기도 하고요.”
“허…….”
“밀리안…….”
밀리안의 옹호로 한껏 기세가 등등해진 클레이가 애교를 부리듯 밀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보던 대니얼이 벤틀로를 위로했다.
“애 둘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이 치시는 사고도 수습해야 하고요.”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사고를 쳤다고 그러세요…….”
“정말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그럼 알츠하이머로 선생님께서 먼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하하, 하……. 진료도 끝났으니 저는 먼저 가볼게요.”
한껏 예민해진 벤틀로를 상대한다는 건 대니얼에게 힘든 일이었다. 진료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자 벤틀로가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대니얼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클레이를 배웅하면서도 밀리안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이 정도는.”
“하지만.”
“정말 괜찮아. 무리다 싶으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클레이가 밀리안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옅은 색의 립스틱이 그의 볼에 남자 클레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곧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윽.”
“클레이!”
잠시 숨을 참으며 클레이가 밀리안을 향해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지체하다가는 밀리안의 걱정만 더 살 것 같았다. 게다가 뒤에서 날카롭게 바라보는 벤틀로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클레이는 여전히 메슥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밀리안을 향해 웃어보였다.
“빨리 돌아올게.”
“……네.”
오늘은 절대 뺄 수 없는 일정이라는 걸 밀리안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클레이가 걱정되서 잡게 된다.
밀리안이 클레이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벤틀로가 혀를 내찼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걱정을 하는 건데요.”
“그럼 입가의 웃음을 지우고 말씀하셔야죠.”
짓궂은 말에 밀리안이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클레이가 힘들어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는데 결국 티를 내고 말았다.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벤틀로의 혀 차는 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클레이가 고생하는 건 안타까웠지만, 입덧까지 대신해줄 정도로 자신을 생각한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오래가지 않았으면 했다.
* * *
클레이의 입덧은 유난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오전까진 어떻게든 버텼지만, 더는 불가능했다.
“윽.”
“뭐해?”
클레이가 음식을 앞에 두고 구역질을 하려고 하자 게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클레이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제 상태를 밝혔다.
“입덧이야.”
“……네가 그걸 왜 해?”
임신을 한 건 밀리안인데 네가 왜 입덧을……. 거기까지 생각하던 게빈이 짜증을 냈다. 그녀는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걸 자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꼴도 황당했다.
“진짜 가지가지 하고 있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숨을 깊게 들이쉬자 메슥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밀리안이 그렇게 좋아?”
“당연한 것 좀 묻지 마.”
밀리안이 무탈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입덧 따위는 평생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속이 가라앉자 다시 식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고기를 한조각 입에 넣자마자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깔끔하게 식사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아서 먹고 가.”
“참나. 기가 막혀서…….”
게빈 스튜어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식당을 나가버리는 클레이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다 픽 웃었다. 얼마나 좋으면 임신한 오메가를 대신해 입덧까지 하지? 절대로 사랑따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변하니 적응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가만히 보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한 일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클레이가 식당을 나가면서 다시 한번 헛구역질하는 모습이 파파라치 카메라에 찍혔다. 짧은 영상과 사진은 순식간에 퍼졌고, 오메가 대신 입덧을 하는 알파라는 타이틀까지 붙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장면도 그렇고, 결혼식도 미친 게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화려했는데, 어떻게 입덧까지 하느냐고 유난이란 유난을 다 떤다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클레이 디어가 제 사람을 만난 이후로 변한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바람둥이가 정신을 차리면 세기의 사랑을 한다고 비웃음 반, 농담 반을 던지는 사람들의 말에 클레이와 벤틀로는 당연한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밀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 * *
다행히 클레이의 입덧은 짧은 헤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일은 두고두고 벤틀로의 눈총을 샀다. 클레이의 입덧이 도화선이 된 것인지, 바로 그날 저녁부터 밀리안이 입덧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니얼 크래포드가 미리 경고했던 것보다, 각오하던 것보다도 상태가 심각했다. 밀리안이 잘 먹고, 좋아하던 음식들이 메뉴에서 사라졌다. 냄새만 맡아도 속을 게워 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운동도 못 하자 탄탄했던 몸에 근육이 사라져 비쩍 말라 갔다. 그가 음식을 먹지 못하자 덩달아 클레이와 벤틀로도 말라 가고 있었다.
“대체 왜 안 먹겠다는 건데?”
“……그냥, 몸에 안 맞아서…….”
그걸 먹으면 다른 여자의 꿈을 꾼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임신을 인지하자마자 들이닥친 입덧으로 인해 근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야 할 임산부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대니얼이 준 약에라도 기대고 싶은데 밀리안이 그걸 거부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클레이와 벤틀로를 비롯한 디어 가의 고용인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내가 미치는 꼴이 보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먹어 보고 나서 정말 안 받는 것 같으면 더 권하지 않을 테니까 한 번이라도 먹어 봐.”
제발 부탁이라고 클레이가 그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리안은 근래 정말 많이 말랐다. 영양부족에 빈혈까지 와 계단을 내려가다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그런 그를 두고 도저히 회사에 나갈 수 없어 일을 모두 집으로 가져와 처리하는 중이었다.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죽을 거 같아.”
클레이의 애원에 밀리안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윽, 하아…….”
“괜찮아?”
그렇게 물었지만, 당연히 괜찮지 않다는 걸 클레이도 알고 있었다. 밀리안의 입덧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잠시 했던 것은 비교도 불가했다. 변기에 머리를 박고 위액을 토하는 밀리안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클레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임신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풀었던 정관수술을 다시 했으리라. 아예 다신 이을 수 없도록 완전히 절단해버릴 텐데. 그렇게 바라던 아이라도 밀리안이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없어도 상관없었다. 클레이는 옷 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뼈의 굴곡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살을 찌워 놨는데, 밀리안은 입덧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말라 갔다. 어떤 음식을 가져와도 먹지 못했고, 고작 이온 음료와 수액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덩달아 저택 내에선 음식 냄새는 찾을 수가 없어졌다.
클레이는 이제 더 이상 뱉어 낼 것도 없어 기력이 빠진 밀리안을 안고 욕조로 들어갔다. 아직 물이 채워지지 않은 욕조에 밀리안을 집어넣고 입고 있는 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살이 너무 많이 내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신중해졌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의 옷을 모두 벗긴 뒤, 클레이는 욕조에 물을 틀었다. 욕조 곳곳에 뚫린 미세한 구멍을 통해 따뜻한 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임신한 이후엔 너무 뜨거운 물은 아이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물의 온도도 신경써야 했다. 아주 사소한 것도 밀리안과 아이의 건강에 직결되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클레이도 옷을 벗고 밀리안의 앞에 앉았다. 얼굴도 많이 상했다. 움푹 패인 눈두덩이에 그림자가 깊게 졌고, 평소에는 적당한 정도라고 생각했던 광대뼈의 굴곡이 커졌다. 저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클레이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밀리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당신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밀리안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클레이는 익숙하게 그를 품에 안아 체중을 받쳤다.
“저 때문에 당신까지 식사를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못 먹는데 내가 어떻게 먹을 수 있겠어.”
아무것도 입에 맞지 않는다는 듯 괴로워하는 밀리안을 두고 입맛이 있을 턱이 없었다. 클레이도 밀리안이 잠들 때마다 최소한의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에너지바와 수액을 맞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오랫동안 쌓아온 체력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클레이는 페로몬을 풀어 밀리안의 몸을 감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미세한 냄새에도 구역질하는 밀리안이 유일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에 얼굴을 박고 헐떡이며 냄새를 흡입하던 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클레이의 입술을 찾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기운이 없어 오래가지 못했다.
짧은 입맞춤에도 숨을 헐떡이는 밀리안의 등을 쓰다듬던 클레이는 천천히 그를 씻겼다. 그의 몸을 닦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 내리눌러야 했다. 너무 말랐다. 이러다가 픽 쓰러져 잘못되는 건 아닐까 소름이 일 정도로.
클레이가 그의 다리를 닦다 말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밀리안이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좀, 보기 흉해서…….”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예뻐. 정말이야.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걸 비하하지 말아 줘.”
“…….”
도리어 자신이 더 미안하다며 클레이가 속삭였다.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밀리안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클레이가 너무 심각해서 기분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