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
“농담입니다. 정말 체셔로 지을 리가 없잖아요.”
“밀리…….”
“밀리안 님…….”
“두 사람이 너무 진지해서 장난친 겁니다.”
벤틀로와 클레이는 웃음과 당혹 사이의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밀리안을 바라봤다. 밀리안을 따라 웃고는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진지했고, 심각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고, 간혹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게 된다던 대니얼의 조언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밀리안이 상상임신을 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났기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농담이라니…….
허탈한 두 사람의 표정에 밀리안은 그제야 두 사람이 정말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정말 진심인 줄 알았어요?”
“…….”
“제가 클레이와 제 아이의 태명을 고양이 이름으로 지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말이지.”
하지만 당신이 즐거웠다면 됐어. 클레이가 밀리안의 뺨에 키스했다. 평소의 밀리안이었다면 이런 장난을 칠 리가 없다. 그러니 임신으로 인한 일상의 변화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뜻이리라.
기대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자신은 어떻든 상관없으니 그저 밀리안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이길 바랄 뿐이었다.
* * *
클레이 디어는 밀리안과의 연애를 공개한 이후 매일 밝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오늘은 행복의 절정에 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밀리안이 아이를 가졌다니 그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문득 과거의 클레이 디어를 생각하면 영 어색하기만 했다. 아니, 밀리안이 임신했다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정말 오메가가 맞았구나.”
맥시의 중얼거림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임신한다니 좀, 신기해요.”
“난 사장님이 너어어무 부러워.”
“……네?”
맥시가 불쑥 고개를 내밀자 레이의 몸이 움찔 튀었다. 맥시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레이의 몸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베타인 레이의 몸에서 특별한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맥시는 흥이 사라진 얼굴로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넌 왜 오메가가 아니니? 네가 오메가였으면 내가 바로 낚아챘을 텐데.”
“그, 매, 맥시도 알파가 아니잖아요!”
같은 베타끼리 이러지 말자고 레이가 항변했다. 그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레이는 슬쩍 맥시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밀리안을 좋아했던 건 아니죠?”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사실도 아니지만, 레이의 말을 사장이 듣기라도 했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맥시가 입조심 좀 하라고 눈을 사납게 뜨자 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맥시는 베타니까 남자 오메가를 만나도 아이는 못 가져요.”
“어쭈?”
“그,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요.”
“……참나.”
“그, 그리고 내가 베타여도 낚아채 달라고요!”
불타 없어질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른 레이가 도망치듯 나갔다. 혼자 휴게실에 남은 맥시는 레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곰곰이 되새기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쟤가 날 좋아했다고?”
“너도 참 눈치 없다.”
셋이 함께 휴게실에 왔음에도 줄곧 투명인간 취급당했던 줄리아가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맥시가 화들짝 놀라 줄리아를 바라봤다.
“넌 알고 있었어?”
“너어어무 티가 나서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거든?”
줄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빈 종이컵을 던지고 일어섰다.
“나도 레이 징징대는 거 상담해 주는 것도 질렸는데 잘됐네. 차든지 사귀든지 빨리 결정해 줘.”
“어? 빨리? 왜?”
“왜긴. 그래야 레이가 회사를 그만두든 더 다니든 빨리 결정하지.”
“…….”
“그래도 애는 울리지 마라.”
줄리아도 나가 버리자 휴게실에 남은 사람은 맥시뿐이었다.
* * *
맥시의 실수가 반복되자 아무리 밀리안의 임신으로 기분이 좋아진 클레이라도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클레이는 오류가 생긴 서류를 다시 맥시에게 넘겼다.
“오늘만 다섯 번째인데?”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넋을 빼고 다녀?”
“그, 사장님…….”
“뭔데? 설마 레이가 고백이라도 했어?”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맥시의 눈이 커지자 클레이가 피식 웃으며 의자를 돌렸다.
“그게 고민거리가 돼?”
“그, 안 받아 주면 그 소심한 성격에 퇴사할 것 같아서요.”
“그걸 고민하면 안 되지.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하게요?”
“네가 레이와 이성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해. 레이의 퇴사는 나중 문제지.”
“……사장님은 어떠셨어요?”
맥시는 이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사장이 밀리안과 결혼하기 전만 해도 말 한번 붙이기 어려웠다. 사무적인 질문에 답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조차도 엄청 긴장했다. 그런데 연애상담이라니. 비현실적이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클레이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기분 좋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별로 특별한 건 없었어. 난 밀리안이 정말 섹시해 보였거든. 빨리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지.”
“…….”
섹시. 침대. 클레이 디어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맥시에겐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녀에게 레이는 그런 감정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닌 것 같으면 빨리 정리해. 사내연애는 상관없지만, 사무실이 어수선한 건 싫으니까.”
“네…….”
어떻게 정리하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맥시의 뇌는 진작에 파업을 한 상태였다.
* * *
클레이가 옷을 벗으면서 하는 말에 밀리안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맥시와 레이요? 레이가 맥시를 좋아했단 말입니까?”
“정말 몰랐어?”
레이가 매일 맥시 꽁무니만 쫓아다니지 않냐고, 심지어 아주 잠시 스쳐 보는 자신조차도 눈치챌 정도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묻자 밀리안이 멋쩍은 얼굴로 목을 문질렀다.
“그냥 친한 동료 사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가끔 신기할 정도로 둔해.”
“제 관심은 모두 클레이에게 가 있어서요.”
“…….”
셔츠의 단추를 풀던 손이 우뚝 멈췄다. 클레이는 잠시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예고 좀 하고 치라니까.”
“뭘, 말입니까?”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오래 서 있어도 괜찮아?”
“오 분 서 있다고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닥터 크래포드도 적당히 움직여 줘야 한다고 했잖아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클레이는 옷 갈아입는 속도를 높였다. 깔끔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재빨리 밀리안을 끌어안았다. 임신을 해서 그런지 밀리안의 체향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좋았다. 클레이가 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안온한 숨을 내쉬자 밀리안도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오늘은 뭐 먹었어? 아직 입덧은 안 온 거지?”
“네. 아직 괜찮습니다.”
남자 오메가는 입덧을 좀 심하게 한다고 해서 클레이는 시시때때로 상태를 물었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면 삼십 분마다 전화했다. 지금도 회사에 그녀의 대리로 쓸 만한 경영자를 채택해 놓은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접 결재를 하더라도, 업무에 메어 있어야 하는 일은 최소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최고 경영자에게도 임신휴가가 필요하다고 전문 경영인을 뽑는 형식을 통해 대대적으로 밀리안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클레이 디어의 2세 소식에 가십은 물론 주식 시장마저 요동쳤다. 공격적이던 사업도 결혼한 이후 안정적인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우회해 규모를 줄이고 자선 사업을 늘렸다. 이번에도 밀리안의 임신을 이유로 아동재단에 삼백만 달러를 보냈다. 결혼한 뒤로 클레이가 굉장히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자 대중들의 시선에 호감이 섞여 들었다. 그룹을 지휘해야 하는 최고 경영자가 임신휴가를 내는 것도 가정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괜찮을까요?”
“뭐가?”
“그, 임신휴가 때문에 전문 경영인을 고용한다는 게 좀.”
밀리안은 너무 사사롭지 않냐며 걱정했지만, 클레이의 생각은 달랐다.
“전혀 사사롭지 않아.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해. 당신 아플 때 곁에 있을 거야.”
클레이가 조심스레 밀리안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임신한 티도 나지 않았다. 이 납작한 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눈에 담을 거다. 이걸 어떻게 사사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 * *
클레이가 미묘한 표정으로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살뜰하게 밀리안의 식사를 챙기고 있던 벤틀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안 맞으십니까?”
“좀, 뭔가 재료가 상한 거 같은데. 밀리, 당신은 괜찮아?”
“제 음식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평소처럼 맛있어요. 잠시만.”
밀리안이 팔을 뻗어 클레이가 조금 전에 먹다 말았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클레이와 벤틀로가 말릴 새도 없이 제 입으로 집어넣어 씹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음식은 괜찮은데요?”
“괜찮다고? 이렇게 비리고 역한데?”
“비리고 역하다고요? 아무래도 닥터 크래포드를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밀리안의 임신이 확정된 이후, 디어 가의 식재료는 벤틀로의 지휘하에 더욱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 요리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벤틀로가 주방에 들어가 식재료를 선정하는 것부터, 요리가 끝날 때까지 지켜봤다.
음식에 문제가 없다는 건 벤틀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렇다면 클레이의 건강이 문제라는 말이었다. 벤틀로가 바로 주치의를 부르겠다며 움직이려던 찰나, 클레이가 손을 입으로 막으며 몸을 일으켰다.
“우욱!”
“클레이?!”
“주인님!”
* * *
속을 모두 게워 낸 클레이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누워 대니얼의 진찰을 받았다. 워낙 건강체질인 탓에 감기조차 걸린 적 없었기에 그녀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밀리안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처럼 보였다.
“입덧……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지…….”
벤틀로와 밀리안이 아연한 얼굴로 대니얼을 바라봤다. 입덧이라고? 그걸 왜 클레이가……. 대니얼은 청진기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말했다.
“입덧이에요. 간혹, 배우자가 대신 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지가지…….”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던 벤틀로의 눈이 뾰족해졌다. 클레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벤틀로의 시선을 피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