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33화 (133/144)

-외전 19-

“임신이 맞습니다. 몸 상태도 좋고, 아이도 건강히 잘 자라고 있어요.”

대니얼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밀리안이 긴장한 얼굴을 하자 대니얼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정말로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임신한 남성 오메가는 유난히 호르몬 변화가 급격한 편이에요. 호르몬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건 면역체계가 무너졌다는 것과 같아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지만, 그래서 조심해야 해요. 더 쉽게 말하자면 밀리안은 지금 면역력이 굉장히 낮아졌기 때문에 병에 걸리기 쉬워졌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거예요.”

“…….”

여성이 아닌 남성이 임신했기 때문에 이 호르몬이 일반 치보다 더 상승했다며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어려운 말 없이 풀어서 말해 주었기에 밀리안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막연히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밀리안보다 벤틀로의 반응이 더 격렬했다. 병에 걸리기 쉽다니. 임신 중에 아프면 약을 처방하기도 어렵다. 아이와 밀리안 둘 중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밀리안이었지만, 아이가 잘못되면 밀리안 역시 위험해지는 건 마찬가지여서 벤틀로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임신 중에 회사에 복귀하는 건 절대 안 돼요. 컨디션이 급변할 만한 과격한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하고, 18주에서 20주까지는 섹스, 운동 등은 모두 금지예요. 그 이후가 되면 안정기에 들어서니까 그때까지는 최대한 주의해 줘요.”

그렇다고 그 이후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대니얼이 눈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 밀리안은 자신이 정말 임신했다고 믿었던 때를 떠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임신이길 망정이지, 정말 임신이 맞았다면 정말 위험한 짓을 했던 거였다. 은연중에 남아 있던 아쉬움이 이 순간 싹 사라졌다.

그때 대니얼이 작은 종이 가방에서 정사각형의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이거. 하루에 한 번, 저녁마다 챙겨 먹고요.”

“이건…….”

“예전에 우리 만나기 전에 에릭을 통해 보냈었는데, 기억할 거예요.”

기억한다. 이걸 먹고 무슨 꿈을 꿨는지도. 대니얼이 벤틀로에게 건네주는 네모난 상자를 바라보는 밀리안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클레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성교를 했던 꿈. 놀랍게도 이걸 먹지 않으면 꿈을 꾸지 않았고, 먹으면 꿨다. 그땐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해서 꿈에 의지하며 현실을 잊었지만, 지금은 꺼려지기만 했다. 혹시라도,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클레이가 아닌 다른 여자의 꿈을 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먹어 봐서 알죠? 냄새도 맛도 좀 이상하지만, 몸에는 확실하게 좋으니까 잊지 말고 먹어요. 아, 혹시 모르니 벤틀로가 챙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검사는 모두 끝이에요. 임신 축하해요, 밀리안. 아, 벤틀로도요.”

밀리안은 쑥스러운 얼굴로 작게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슬쩍 벤틀로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보다도 더 기뻐하고 있었다. 항상 격식을 차려 단정한 표정을 유지했던 얼굴이 모두 풀어져 만면에 웃음이 만개했다.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밀리안은 고개를 숙여 아직 납작한 배를 바라봤다.

임신했다. 클레이와 그의 아이를.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아이였다.

* * *

[오늘 일찍 귀가하셨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일찍 가고 있잖아.”

[그보다 일찍 말입니다.]

벤틀로의 말에 클레이는 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흐음. 아무 일도 없이 일찍 들어오라고 채근할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밀리안이 일을 쉬게 된 이후, 눈치를 주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강하게 채근하진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일찍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도 여기서 더 일찍이라고?’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서프라이즈가 있길래 그래?”

[오시면 알게 될 겁니다.]

“흐음.”

[그러니 지금, 당장, 오십시오.]

클레이는 전화를 끊기도 전에 이미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벤틀로가 이 정도까지 흥분할 일이 뭐가 있을까? 밀리안의 몸이 안 좋은 거였다면 진작 말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아니고, 뭐 그럼 밀리안이 임신이라도 했…….

‘임신?’

그녀는 사장실 문손잡이를 반쯤 돌린 상태로 굳었다. 임신. 밀리안이 임신?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그것밖에 없다는 확신만 더 커졌다. 클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문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갔다. 그러고도 진정이 안 돼 손으로 입을 막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첫날밤, 러트가 왔다. 그 상태로 밀리안의 발정기를 끌어내 며칠을 뒹굴었다. 당연히 밀리안이 임신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인지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만에 하나, 임신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기대를 하는 것은 밀리안을 위해 좋지 않았다. 클레이는 눈을 여러번 깜박이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내쉬기도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풀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를 어떻게 안 해?’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노력은 일 분도 되지 않아 물거품으로 변했다. 클레이는 바로 문을 열어젖힌 후 그대로 뛰어나갔다.

운전사도 밀쳐놓고 직접 운전해 가는 내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보조석에 앉은 운전사가 속도를 낮추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사고를 냈을지도 모른다. 차가 저택 정문 앞까지 도달하기 무섭게 클레이가 차 문을 열고 뛰었다. 정문과 저택 사이의 정원을 가로지르며 달리던 클레이는 힐이 걸리적거려 그대로 벗어 던졌다. 그 상태로 전속력으로 뛰자 고용인들이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이미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던 벤틀로가 “밀리안 님은 이 층 침실에 계십시다.”라고 말하자 클레이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몇 킬로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려도 숨이 벅차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고작 이 정도 거리를 뛴 것만으로도 숨이 헐떡였다.

아니, 사실은 운전하는 내내 이랬다. 아무리 아닐지도 모른다고, 섣부른 기대를 해서 도리어 밀리안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고 이성이 경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벤틀로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부를 일은 그것뿐이어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밀리안이 있을 침실에 가까이 갈수록 클레이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그녀는 살짝 열려 있는 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그 소리에 창가 쪽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밀리.”

“클레이? 왜 신발을 안 신고…….”

신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클레이는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밀리안에게 다가갔다.

“밀리, 아니라면 내 뺨을 쳐도 좋아.”

“제가 왜 당신 뺨을,”

“임신, 했어?”

조심스레 묻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급한 마음이 제어되지 않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밀리안의 얼굴에 미안하다고 말을 할 참이었다.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실수했다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밀리안이 더 빨랐다.

“네.”

“뭐?”

본인이 물어 놓고 그의 대답에 당황해하는 클레이를 보고 밀리안이 웃었다.

“맞아요. 임신, 했습니다. 제가 말한다고 했는데 벤틀로가 이미 말했나 보군요.”

“아니, 벤틀로는, 그게…….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언제나 찬란한 빛을 내던 녹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초점 없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을 봤다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배를 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안 기쁩니까?”

왜 안아 주지 않냐며 밀리안이 섭섭한 얼굴을 하자 클레이가 그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팔에 힘도 주지 못한 채 안는 건지 그저 몸을 맞대고 있는 건지 모를 애매한 포옹에 밀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당황한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지금, 머리가 너무 멍해. 이상해.”

밀리안은 클레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 눈을 감았다. 맞닿은 몸을 통해 클레이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가장 강렬한 감정은 기쁨과 행복이었다. 그래서 제 속에 남아 있던 작은 불안감이 모두 빠져나갔다.

“행복해.”

“…….”

“정말, 너무. 너무 행복해서 거짓말 같아.”

“저도요.”

“응.”

클레이는 닿을 듯 말 듯 어정쩡하게 대고 있던 팔을 조금 더 안으로 조였다. 그제야 안정감이 찾아왔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클레이가 물었다.

“이렇게 서 있어도 돼?”

“당연하죠.”

“……내가 못 서 있겠으니까 앉으면 안 될까?”

앉기 싫으면 누워도 된다는 애타는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임신해 봤어?”

“…….”

당연히 지금이 처음이었다. 밀리안이 아무 말도 못 하자 클레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 침대로 옮겨 버렸다. 그 모든 과정이 재빨랐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깨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러웠다. 밀리안을 눕힌 뒤 클레이는 그의 배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다고?”

“클레이.”

“신기해.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데 임신이라니. 어때? 당신은 느껴져?”

“아뇨, 저도 딱히…….”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상상임신이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그땐 육체적인 변화가 뚜렷했다. 그래서 더 확신했던 것도 있는데, 지금은 닥터 크래포트가 검진 결과를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임신한 줄도 몰랐을 것이다.

“입덧은?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정말 아직 아무렇지도 않아요. 벤틀로도 그렇고 과보호가 너무 심합니다.”

이러다 움직이지도 못하게 할 것 같아 무섭다. 밀리안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클레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당신이 서 있는 게 무서워. 그냥 계속 누워 있어 주면 안 될까?”

“계속, 누워만 있으라고요?”

“……무리겠지?”

“불가능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클레이의 무리한 주문에 밀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계속 누워만 있으면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눈을 반짝였다.

“태명은 뭘로 짓지?”

“글쎄요. 쳬셔?”

“……우리 아이는 고양이가 아니야, 밀리.”

“하지만 귀엽잖아요.”

“…….”

임산부를 상대로 강하게 제 생각을 밀어붙이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클레이는 침착하게 벤틀로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만면에 웃음을 매달고 올라온 벤틀로도 태명을 체셔로 짓고 싶다는 밀리안의 말에 표정이 흔들렸다.

“체셔는 고양이지 않습니까, 밀리안 님.”

“하지만 체셔는 클레이를 닮았고, 귀엽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이 아니니까…….”

“체셔는 우리 가족이죠.”

“무, 물론 그렇습니다.”

벤틀로의 눈이 클레이를 향했다. 왜 이런 문제에 자신을 참여시켰냐는 비난에 클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빨리 그를 설득시키라고 채근했다. 눈빛으로 오고 가는 치열한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던 밀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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