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29화 (129/144)

-외전 15-

예식장으로 꾸며진 파티 홀은 웅장하다는 표현 외엔 다른 수식어를 달 수 없었다. 천장은 굉장히 높았고 창문은 모두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성당에나 있을 법한 파이프 오르간이 홀의 정중앙에 있었고, 그 앞으로 굉장한 수의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 뒤에 있는 길게 뻗은 금속 파이프가 반짝였다. 따로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자 그 앞에 선 합창단이 잔잔한 목소리로 성가를 불렀다.

저절로 등이 바짝 세워질 만큼 화려하고 경건했다. 그 요란스러운 취재진조차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정된 자리로 앉은 사람들은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버진로드의 끝을 바라봤다. 양쪽에 천사가 서로를 마주 보는 양각이 새겨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객들은 어서 저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 * *

오늘만큼은 클레이도 밀리안의 옷을 단장해 줄 수 없었다. 결혼 준비는 여자 쪽이 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드레스를 입은 채 화장을 받고 있었다. 클레이의 화장을 담당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오히려 그녀의 외모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길게 뻗은 속눈썹을 마지막으로 정돈한 뒤 전신을 모두 덮고도 바닥에 한참을 끌릴만한 길이의 면사포가 씌워졌다. 레이스 장인 열 명이 붙어 몇 개월간 만든 드레스는 매우 호화로웠다. 드레스 자락 끝이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길게 펼쳐졌다.

클레이가 천천히 눈을 뜨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벤틀로는 양손을 꽉 잡고 감격한 얼굴로 울먹이고 있었다. 클레이는 픽 웃었다.

“밀리는?”

“이미 단장을 끝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뻐?”

“당연하죠.”

“…….”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벤틀로를 클레이가 가만히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

“벤틀로. 내 아버지.”

예상치 못한 말에 벤틀로가 주름진 눈을 깜박였다. 목이 무언가로 콱 막힌 기분이었다. 그는 허허, 웃다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데 큰일이었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문 벤틀로가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고마워. 항상, 언제나 고마웠어.”

“아니요. 저는 당연히, 할, 일을, 한 겁니다.”

그러니 이 좋은 날 사람을 울리지 말라며 벤틀로가 고개를 저었다.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을 떼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클레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저 문밖에 밀리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떨렸다. 이런 게 뭐라고 긴장이 됐다. 클레이는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바라봤다. 항상 그와 나눠 끼웠던 반지가 오늘은 없었다. 결혼반지는 자신이 준비하겠다던 밀리안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뒤 클레이는 그 반지를 낄 날만 기다렸다.

조금만 있으면……, 밀리안은 모든 의미로 제 것이 된다.

‘큰일인데.’

이러다 울 것 같았다. 긴 속눈썹이 벌써 촉촉하게 젖은 느낌이 든다. 클레이는 시선을 위로 올린 채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 * *

길게 이어진 버진로드 끝은 고요했다. 그곳에서 밀리안은 클레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장면을 찍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격리된 곳에서 부모님이 보고 있겠지.

‘보고 있습니까? 짐승도, 행복해질 수 있어요. 당신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겁니다.’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쁘게. 그때 왼쪽 문이 열렸다. 밀리안은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레이?”

순간 인간이 아닌 줄 알았다. 어떤 수식어를 써야 지금의 클레이를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아치형 천장에서 갖가지 색의 빛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살짝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밀리안을 향해 클레이가 천천히 걸어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길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긴 드레스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성큼 걸어와 그의 옆에 섰다. 밀리안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을 정도야?”

“네. 너무 예뻐서…….”

“그래? 그럼 오늘 이거 입고 할까?”

“……아, 클레이. 제발…….”

밀리안이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클레이가 낮게 웃었다.

“지금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합니까?”

“난 진심인데?”

반드시 이 상태로 허니문을 보내겠다며 클레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릿한 감각에 밀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너무 긴장하다 못해 몸이 떨릴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됐다. 살짝 풀어진 그의 얼굴에 클레이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긴장은 좀 풀렸어?”

“아니요. 아직도 떨려요.”

“사실 나도 그래.”

클레이는 습관적으로 입을 맞추려다 우뚝 멈췄다. 밀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예뻐. 사랑해, 밀리.”

“당신도요. 너무, 예뻐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내가 할 말인데?”

“설마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두 사람은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천사 두 명이 마주 보는 양각이 새겨진 문이 천천히 열렸다. 붉은색 융단이 길게 이어진 곳만 하얀 조명으로 밝혀져 있었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린다. 클레이가 한걸음 먼저 안으로 내딛자 밀리안도 그녀와 걸음을 맞춰 앞으로 향했다.

마치 빛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클레이와 밀리안은 예식이 끝나자마자 헬기를 타고 다른 섬으로 건너갔다. 처음으로 그들이 제대로 관계를 맺었던 곳을 허니문의 장소로 정했다. 그만큼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은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클레이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멀쩡히 진행되던 예식은 반지를 교환하던 중 클레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면사포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리자 밀리안이 깜짝 놀라 그녀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숨도 제대로 안 쉬어 질만큼 긴장한 상태였는데, 클레이의 눈물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밀리안이 울지 말라고 다독일수록 클레이의 눈물은 더 많이 쏟아졌다. 결혼식이니만큼 더 아름답게 꾸민 얼굴에서 눈물마저 흐르니 감탄사가 저절로 일 정도였다. 그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가 정신없이 줌을 하더니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

예식 뒤에 있을 피로연은 클레이의 그치지 않는 눈물로 주인공들이 빠진 채 진행하기로 했다. 클레이 디어 우는 모습을 정면에서 본 하객들은 불만의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구두를 벗어 던졌다. 모래사장에서 예쁘기만 한 힐은 걷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돈을 쏟아부은 값비싼 드레스가 모래에 끌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밀리안의 손을 꽉 잡고 그들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했다.

“클레이, 잠시만요.”

“왜?”

밀리안이 잡고 있던 손을 풀더니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침대까지 이렇게 가고 싶었어요.”

밀리안은 예쁜 드레스가 거친 모래에 끌려 망가지는 게 아깝다며 애써 변명했다. 클레이는 밀리안에게 안긴 채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밀리안의 변명이 무색하게 긴 드레스 자락은 여전히 땅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꼬집을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클레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자기가 원한다면 난 모두 좋아.”

“흣.”

뜨겁고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따라 원을 그렸다. 밀리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클레이는 그의 목에 손을 감은 채로 등을 쓸어내렸다. 밀리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제발. 지금은 좀…….”

“빨리. 나 지금 다 젖었단 말이야.”

당신을 안고 싶어서 미치겠어. 오늘이야말로 네가 임신할 때까지 쌀 거라며 클레이가 정염에 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도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으면서 대체 언제 흥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밀리안은 단숨에 발기한 성기에 이를 악물었다.

“이러면 안까지 못 가요.”

“그럼 여기서 할까?”

“제발…….”

“응. 그러니까 빨리.”

클레이가 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재촉했다. 그때 그들의 위로 헬기가 지나갔다. 프로펠러가 돌면서 내는 바람에 모래가 폭풍처럼 흩날렸다. 아직 머리에 쓰고 있던 면사포가 벗겨져 허공을 날고 있었고, 공들여 만진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한껏 밀도가 올라갔던 욕망도 이 황당한 상황으로 인해 소강되어 버렸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목을 안은 상태로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그거 알아?”

“뭘,”

클레이의 웃음은 산뜻하고 예뻤지만, 어딘가 수상쩍었다. 밀리안이 주춤하며 묻자 클레이는 혀를 내밀어 그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밀리안의 눈이 금세 젖었다. 금색의 모래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흡사 빛나는 광물을 가루 내어 뿌린 것처럼.

“이제 여긴 당신과 나밖에 없다는 걸.”

“…….”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어?”

클레이는 밀리안의 뺨을 손으로 훑었다. 은밀한 재촉에 밀리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을 맞대고 혀가 얽혔다. 수도 없이 나눈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의 느낌은 뭔가 달랐다. 그래. 각인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떨리고, 마치 우리가 완전해진 기분.

감히 누구도 그들의 관계에 토를 달 수 없다. 남들의 시선 따위 원래부터 상관없었지만, 그럼에도 정식으로 부부가 된 기분은 달랐다. 아니, 매일 달랐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된다. 더욱 가까워지고, 조금 더 완벽해지는 기분. 부족한 어딘가가 상대로 인해 하나하나 작은 조각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감정에 익숙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클레이는 밀리안과 입을 맞춘 채로 다리를 땅에 내렸다. 맨발에 닿는 모래마저 실크처럼 느껴졌다. 이미 해가 바다의 끝에 닿고 있었다. 조금 뒤면 완전한 밤이 될 것이다. 석양의 붉은 빛이 밀리안의 등을 감쌌다. 클레이는 입술을 떼고 그를 홀린 듯 바라봤다.

상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밀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붉게 물든 하늘에 클레이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가 그에게 내려온 듯한 착각이 인다. 넓은 모래사장 위로 넓게 펼쳐진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그녀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여자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가 직접 그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다.

그때 바닷물 안에서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어둡던 곳에 갑작스레 불이 밝혀지자 클레이와 밀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바다 아래에 숨겨진 조명이 섬을 둘러싸고 은은한 빛을 밝히고 있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가 빛을 산란시키자 마치 해파리 떼들이 바다를 돌아다닌 것만 같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이 바다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인다.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장면이었다.

클레이가 밀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벤틀로가 꽤 근사한 선물을 줬네.”

“……네.”

밀리안은 살짝 고개를 숙여 클레이의 왼손을 바라봤다. 섬세한 손가락에 그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 여자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증거. 그리고 제 것이라는 증거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