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
“그, 부모님은 어떻게…….”
“걱정하지 마. 이미 준비시켜 놓았으니까.”
“벌써, 말입니까?”
“괜히 여유를 뒀다가는 당일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 미리미리 손을 써 두는 게 낫지.”
손을 썼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합법적인 과정을 통한 건 아니겠다는 건 그도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클레이가 어떤 식으로 손을 썼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혼. 클레이와 합법적인, 공식적인 부부가 되는 날이 오고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클레이의 뒤에 서서 숨어 있을 때는 그게 그렇게 실감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실감이 나다 못해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클레이의 손이 왼쪽 가슴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빨리 뛰고 있어.”
“떨려요. 뭔가 이상해서…….”
“나도.”
클레이는 밀리안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이미 각인을 한 이상 그들의 결합은 끊어질 일이 없을 테니까. 진정한 결혼은 이미 한 것과 다름없는데, 고작 형식적인 결혼식이 주는 의미가 새삼스레 설레고 긴장됐다.
“우린 잘 살 거야. 행복하게.”
“네.”
분명 그럴 거다. 평생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할 것이다. 평생 오지 않으리라 포기했던 것이니까. 매일 매 순간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하며 살겠다고, 밀리안은 굳게 다짐했다.
클레이는 눈을 꾹 감고 떨리는 숨을 내쉬는 밀리안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이제 뭘 하고 싶어?”
“…….”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할 테니까.”
대신 이제 갑자기 터트리지 말고 말해 달라며 클레이가 짓궂은 얼굴로 속삭였다. 밀리안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클레이의 눈을 피했다.
“만약 여기에 계속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까요?”
“글쎄. 그렇진 않을걸.”
잠시간의 도피일 뿐이다. 그걸 클레이도, 밀리안도 알고 있었다. 밀리안이 주저하는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자 클레이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내일 데이트할까?”
첫 데이트.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던. 클레이의 속삭임에 밀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기왕 공개한 거 아주 대놓고 소스를 제공해 주자고.”
파파라치의 사진이 비싼 값으로 팔릴 수도 없을 정도로. 해사하게 웃는 클레이를 잠시 바라보던 밀리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이는 SNS에 도배되고 있는 클레이 디어와 밀리안의 사진을 보며 감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폭탄 같던 일이 있던 뒤로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사진을 하도 보다 보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공개하고 나니 완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네요.”
아예 사진을 찍으라는 듯 당당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자주 매스컴에 노출이 됐다.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아 휴가를 낸 사장과 밀리안은 매일 데이트를 했다. 두 사람은 항상 손을 잡고 있거나, 아니면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은 키스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SNS를 뜨겁게 달궜다. 그동안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클레이 디어의 눈빛이 남달랐다. 밀리안이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클레이 디어는 꼭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할 정도로 뜨거워서 사진을 보고 있는 레이가 더 민망해할 정도였다.
그는 비서실 직원들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았잖아요. 그때 커플룩이었다니까 안 믿어 주더니.”
“일이나 하십시오.”
“맥시이!”
“그래, 네 말이 다 맞았으니까 일하세요.”
맥시는 갓 프린팅한 서류를 레이 책상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레이의 손에서 휴대폰을 채갔다.
“이거 다 끝내기 전까지 휴대폰 압수야.”
“아, 안 돼요!”
“아까도 경고했어.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자꾸 이럴래?”
“우으……. 이제 진짜 안 볼게요.”
“어차피 안 볼 거면 내가 잠깐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는 거 아니야?”
“아, 제발요. 이건 개인 정보의 문제라고요.”
“웃기고 있네. 내가 네 휴대폰 잠금 버튼을 어떻게 안다고 개인 정보를 운운해. 한 번 더 보면 그땐 정말 뺏을 테니까 조심해.”
어차피 진짜 뺏으려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맥시는 레이의 휴대폰을 다시 돌려줬다. 사실 일이 안 되기는 맥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맥시뿐 아니라 D&J 그룹의 사원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밀리안과 클레이 디어가 결혼을 한다니. 그때 밀리안이 클레이 디어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봐서 두 사람 사이를 알아차리긴 했지만, 로비에서 그런 식으로 커밍아웃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밀리안이 먼저 키스했다고 한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부정해도 소용없었다. 그 장면을 찍은 영상이 연일 방송에 나오고, 각종 포털에 기사가 떴다.
심지어 밀리안과 사장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드러내 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녀서 매일 새로운 사진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맥시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결혼이나 할까?”
“맥시 얼마 전에 남자친구하고 헤어졌잖아요?”
“……그걸 굳이 꼬집어야겠니?”
“아니, 뭐, 그렇다고요.”
맥시의 사나운 눈초리에 레이가 주춤주춤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서류를 펼쳐 열심히 일하는 척했다. 맥시의 눈을 피한 곳에서 그의 입술이 슬금 기분 좋게 휘었다.
* * *
디모시 부부는 눈이 가려진 채 이동됐다. 비교적 상황 판단을 할 정신이 있는 닥터 디모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엔젤라 디모시는 그렇지 못했기에 입까지 막힌 상태였다.
눈을 가린 안대가 풀어진 것은 어떤 곳에 도착해 의자에 앉은 뒤였다.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니 맞은편에 조금 전에 모니터로 보았던 여자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본 건 처음인가?”
“클레이, 디어…….”
“그래.”
여자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웃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려던 닥터 디모시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여자는 여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지만, 함부로 대거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으으으읍! 으읍!”
“아, 미안하지만 부인은 좀 시끄럽게 굴 거 같아서 계속 입을 막고 있어야겠어. 이해해 주겠지?”
“우린 밀리안의, 읏!”
“그 입에 밀리의 이름을 올리지 마.”
멀쩡한 모습으로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말이야. 클레이는 닥터 디모시의 머리에 천천히 잔을 기울이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뜨거운 물이 두피와 얼굴을 죽죽 그으며 흘러내리고 있지만, 남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 디어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조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엔젤라 디모시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겁을 왈칵 집어먹고 얌전해졌다. 클레이는 다시 의자에 앉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야 좀 착하게 구네.”
“…….”
“……흐, 흐으, 으…….”
“당장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야. 밀리가 당신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다는 게 있어서 그때까지는 멀쩡하게 둬야 하거든.”
그게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클레이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살짝 드러났다. 곱고 가지런한 치아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닥터 디모시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껏 알파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저런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밀리안이? 대체 어떻게……?
이제 더 볼일 없다는 듯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는 건가, 안도하던 것도 잠시 여자의 눈이 아내에게 향했다. 뭐지? 불안한 기분에 황급히 아내를 보자 아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것치고 겁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흐, 흐으, 으…….”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으면 본인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어야지.”
“……여보, 당신, 정말…….”
아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온몸으로 부정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게 긍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아내의 이름으로 왔던 밀리안의 사진이 떠올랐다. 마지막이라 그래도 보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맙소사.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으읍! 으으으으읍! 흐으읍!”
“그렇게 부정해도 소용없어. 이미 증거는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라고, 클레이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잠시 겁에 질린 엔젤라 디모시의 얼굴을 감상하곤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밖에는 못 나가도 대충 편의는 봐줄 테니 당분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쓸데 없는 짓을 해서 내 화를 자극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두고. 아, 궁금하면 시도해도 좋아.”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할 테니까. 여상한 목소리가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디모시 부부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클레이 디어가 나갈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 * *
클레이 디어와 밀리안 디모시의 결혼에 참석하게 된 하객들은 전용기를 통해 클레이의 개인 섬에 도착했다. 호화로운 리조트가 세워진 섬은 그 소유주의 결혼식 준비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들어간 비용만 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말이 많이 나왔지만, 클레이 디어는 그 금액만큼의 기부를 하면서 입을 다물게 했다.
섬 전체가 야외 예식장처럼 꾸며졌다. 산호가 비치는 바다는 마치 보석을 넓게 깔아 놓은 것만 같았다. 섬 중앙에 있는 고성을 리조트로 개조해 섬의 분위기는 마치 중세 귀족의 휴양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장난 아닌데? 누가 보면 왕족이 결혼하는 줄 알겠어.”
“그러게요…….”
같은 객실을 쓰게 된 보건의 캐롤의 감탄사에 이브 테일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밀리안이 결혼할 사람이 사장일 줄이야. 결혼식에 반드시 참석하게 될 거라던 밀리안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자신이 클레이 디어 앞에서 그에게 추파를 던졌던 게 떠오르자 새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미쳤어, 진짜.”
밀리안이 사장과 연애 중인 걸 알았냐고. 이브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가 거울을 꺼내 화장을 확인했다. 아주 대대적으로 과시할 예정인지 방송국과 기자들까지 초대해 놔서 제 얼굴이 언제 어떻게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캐롤은 그런 이브의 행동에 쓸데없는 짓이라며 혀를 내찼다.
“어차피 주인공이 클레이 디어인데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아?”
평소에도 눈이 부실 정도인데, 결혼식이니만큼 오늘은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꾸몄을 게 분명했다. 그런 여자를 보고 나서 다른 사람의 얼굴이 찍힌다 한들 눈에나 들어올까. 캐롤의 말에 이브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서 더 문제라고요. 조금이라도 덜 괴물처럼 보여야죠. 그러는 캐롤이야말로 오늘 엄청 꾸몄잖아요.”
“내 나이에 언제 다시 이런 파티에 올 수 있겠어.”
게다가 이런 값비싼 파티에는 더더욱. 캐롤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오늘 하루를 위해 마련한 드레스를 과시했다. 검증된 부호들만 간신히 예약할 수 있다던 클레이 디어의 섬이었다. 이런 곳에는 발도 들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제게까지 초대장이 온 건지 놀랍기만 했다.
밀리안이 오메가라니. 캐롤은 밀리안에게 임신진단 테스터기를 건넸을 때를 떠올렸다. 만약 그때도 사장과 연애 중이었다면, 그 테스터기를 사용한 사람은 밀리안이겠지. 언제부터 사귀었을까? 아주 예전에 클레이 디어가 정신을 잃은 밀리안을 안고 의무실에 왔던 그때려나. 밀리안이라면 연상의, 적극적인 타입의 여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상대가 클레이 디어니 어떻게 보면 모두 맞는 말인데 정도가 굉장히 과했다. 설마 강제적으로 끌려다니는 건 아닐까, 잠시 걱정했지만, 밀리안이 클레이 디어에게 회사 로비에서 대놓고 키스를 했으니 그건 아닐 거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캐롤은 나이가 들더니 노파심만 늘었다며 혀를 찼다. 그 클레이 디어가 미친 듯이 돈을 뿌리며 이렇게 호화로운 결혼식을 할 정도면 단단히 빠졌다는 소리겠지.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준비 안 끝났어요? 이제 슬슬 가야 해요.”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