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27화 (127/144)

-외전 13-

화장실에 다녀온 닥터 디모시는 멍하게 위를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행동에 혀를 내차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대체 뭘 그렇게 보…….”

물을 필요도 없었다. 모니터를 확인한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밀리안 디모시와 클레이 디어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차에 타자 화면이 전환됐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조금 전에 본 장면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클레이 디어가 정말 한 남자에게 정착하긴 하는군요. 반지를 끼긴 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믿지 않았잖아요?]

[그렇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그, 클레이 디어인데요.]

[화면을 좀 보세요. 완전 사랑이 뚝뚝 떨어져요. 로맨틱하죠.]

MC와 패널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화면이 분할되면서 오른쪽에 다시 조금 전의 영상이 재생됐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둘만의 세상에 들어가 있었다.

[밀리안 디모시는 클레이 디어의 가장 측근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일했던 비서인데요. 조금 놀라워요. 클레이 디어의 화려했던 연애사를 다 알면서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사랑이 아닐 수도 있죠.]

냉소적인 남자의 말에 MC가 그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요. 클레이 디어 측에서 조금 전에 낸 기사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각인까지 했다고 밝혔어요. 각인이 뭔지는 아시죠?]

[……그것도 거짓말일 수 있지 않나요?]

[클레이 디어가요? 그런 거짓말을 해서 그녀가 얻는 이득이 뭔가요? 솔직히 이 결혼 자체가 그녀에게 이득이 없어요. 밀리안 디모시라는 남자는 그녀에게 물질적인 무언가를 줄 만큼 부유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웬만한 부자가 아닌 이상 클레이 디어를 만족시킬 지참금을 가져올 수도 없을 거예요.]

[그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아무튼 대단하긴 해요. 자신의 남자에 대한 정체를 철저하게 숨겼잖아요. 바로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말이에요. 그렇게 그녀의 상대를 잡으려고 기를 쓰던 파파라치들을 마지막까지 엿 먹였죠. 브라보!]

MC가 통쾌하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었다.

[밀리안 디모시라는 남자는 베타로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오메가가 되었을까요?]

[그건 클레이 디어 측에서 의료 증빙을 해 주었는데요. 뒤늦게 발현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아주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극히 드문 일이어서 학회에서 난리가 났는데 디어 가의 압박에 주저앉았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클레이 디어를 건드릴 수 있겠어요.]

[오, 그들은 이미 진작에 미쳤는걸요.]

패널들이 한바탕 웃고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닥터 디모시는 자신과 밀리안이 연결돼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선 디어 가에 끈을 댈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졌다. 그럼 아프리카까지 갔다 오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비리가 터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지금보다 더 잘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밀리안이 오메가여서 혐오스러웠던 감정은 디어 가의 권력과 부에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조금만 더 잘해 줄걸 그랬다. 아니, 아예 연을 끊지만 않았더라도 어떻게 접근해 봤을 텐데.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의미가 없었지만, 밀리안의 상대가 클레이 디어라는데 어떻게 후회를 안 할 수 있을까.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닥터 디모시는 허탈한 심정에 넋을 빼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내의 팔을 황급히 잡았다.

“놔요!”

“어디 가려고? 조금 뒤에 탑승인 거 몰라?”

“저게 지금, 저러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속 편한 소릴 해요?!”

“그럼 가서 어쩌려고?”

“……그건,”

“뭘 할 수 있는데? 만날 수나 있을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의료인들이었다. 지금이야 자신의 상황이 안 좋게 돼서 밀리안과 연을 끊은 것을 잠시 후회했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알파와 붙어먹은 밀리안의 행동에 치가 떨렸을 것이다.

어차피 이 년이다. 이 년만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오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디어 가에서 제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한 건 다행인 일이었다. 닥터 디모시의 냉정한 말에 엔젤라 디모시의 얼굴이 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저게 없어져야 내가 살 것 같다고요!”

“미쳤어? 조용히 안 해?”

수상한 기색을 본 보안 경찰이 그들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탑승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괜히 보안 경찰이 붙잡기라도 하면 출국이 미뤄질 수도 있었다. 닥터 디모시는 어떻게든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보안 경찰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엔 총이 들려져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닙니다, 잠깐 다퉈서,”

“다시 나갈 거예요. 어디로 나가야 하죠?”

“부인? 그럼 출국을 안 하신다는 뜻입니까?”

보안 경찰이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조건 나갈 거라고 우기던 안젤라 디모시의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저 경찰은 그때 부동산업자의 탈을 쓰고 그녀의 집에 찾아왔던 청부업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경찰인 척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보안 경찰이 씨익 웃으며 상의에 있는 포켓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가는 동안 들으면 꽤 시간이 잘 갈 겁니다.”

“……이게, 이게 뭐…….”

받기 싫었다. 경찰이 내미는 작은 무언가는 얼마 전 그녀에게 우편으로 배달되었던 소형 녹음기와 닮아 있어서.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닥터 디모시가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당신이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요! 아니에요. 모, 몰라요.”

“그럼 이걸 남편분께 드려도 되겠군요.”

“안 돼!”

엔젤라 디모시가 녹음기를 가로채기 전에 경찰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녹음된 소리는 음량이 작았음에도 매우 선명했다.

[밀리안 디모시? 당신의 성과 같은데, 혹시…….]

[그,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중요하지 않죠. 친어머니가 아들을 청부살해를 하든 말든 우리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그 짐승 새끼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네네, 알겠으니 흥분하지 마십시오. 방식은 어떻게?]

[그, 그것까지 제가 정해야 하나요?]

[간혹 특별한 방법을 원하시는 분들도 계셔서요. 뭐, 부인은 아닌 것 같으니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닥터 디모시의 고개가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이 목소리는 자신의 아내가 맞았다. 청부살해를 의뢰했다고? 밀리안을?

“……여보? 이게 대체…….”

“아,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고!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여자가 흡사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대체 왜 저러냐고, 미친 거 같다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닥터 디모시가 이러지 말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소란은 더욱 커져만 갔고, 엔젤라 디모시는 누가 보아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녹음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경찰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동료를 불렀다. 덩치가 크고 차가운 인상의 경찰이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뭐, 뭐야! 당신들 대체 뭐야?! 뭐냐고!”

“이런 상태로는 기내에 탑승이 불가능합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잠시 신분 조사가 있을 예정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닥터 디모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출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신분 조사라니. 하지만 말이 협조였지, 강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아내는 여전히 소란을 피우고 있어서 부당하다는 말조차도 꺼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을 한 경찰을 바라봤다. 녹음기를 통해 들은 아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게 세간에 알려진다면 다신 재기를 꿈도 꾸지 못할 거다. 그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고 있는 아내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 * *

[보통은 이 두 커플을 보면 밀리안 디모시가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같은 회사 동료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MC의 말에 다들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나도 그 인터뷰 봤어요. 만약 증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돕겠다며 밀리안 디모시를 안타깝게 여기더라고요.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해서 웃겼죠.]

[그 클레이 디어가 그런 수모를 겪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아, 밀리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저는 이미 사랑에 빠진 기분이에요. 클레이는 당해도 싸요.]

[저런. 그래 봤자 그 남자는 클레이 디어가 채갔는데 안타깝군요. 당하니 뭐니 해도 결국 승자는 클레이잖아요.]

[제길. 나도 아니까 닥쳐요.]

밀리안은 멍한 얼굴로 리모컨 종료 버튼을 눌렀다. 커다란 화면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다.

어느 채널을 봐도 자신의 과거를 집착적으로 파헤치는 일은 없었다. 밀리안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세상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아버지가 약물 밀수 비리와 관련되어 미디어에 크게 탔었기 때문에 자신이 클레이 곁에 서면 그 사실도 함께 파헤쳐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제 과거가 낱낱이 드러나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오메가가 정부에 등록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근잘근 씹히다 단물 빠진 껌처럼 바닥에 팽개쳐질 거라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클레이는. 자신은 어느새 처음부터 오메가가 아닌, 뒤늦게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한 희귀 케이스가 돼 버렸다. 잠시 친부인 닥터 디모시의 비리 건이 한 번 나오긴 했지만, 왕래가 끊긴 지 오래라는 말과 함께 스치듯 사라졌다.

이상한 기분에 멍하게 검은 화면만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가 쥐고 있는 리모컨을 가져갔다. 꺼졌던 TV는 다시 켜졌고, 밀리안과 클레이가 서로를 보며 무언가 속삭이는 장면이 나왔다. 한번 그들을 클로즈업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굳어 버린 사원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의 어깨에 턱을 괸 클레이가 작게 웃자 밀리안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이벤트 같은 거 싫다더니.”

“……클레이.”

“괜찮아. 난 저런 이벤트라면 몇 번이든 환영이니까.”

클레이가 밀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밀리안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붉어졌지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벤틀로가 결혼식 날짜를 앞당겼어. 이렇게 된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잘됐지.”

“안 그래도 힘들 텐데 폐를 끼쳐서…….”

“폐라니. 벤틀로는 아주 신나 보이던데?”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자중해도 될 텐데 말이야. 누가 보면 본인이 결혼하는 줄 알겠다는 클레이의 웃음 섞인 말에 밀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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