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
문을 열고 나가자 맥시의 고개가 위로 번뜩 올라왔다. 밀리안은 맥시를 향해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민감한 주제였기에 두 사람은 휴게실로 가는 내내 대화를 아꼈다.
“미안해요, 밀리안.”
휴게실에 들어오자마자 맥시가 대뜸 사과부터 했다. 밀리안은 옅게 웃으며 휴게실 문을 닫았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생각 없이 말한 게 너무 많아서요.”
클레이 디어가 반지를 끼고 나타난 날, 밀리안을 앞에 두고 레이와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때 밀리안의 굳은 얼굴이 자연스레 뒤를 이었다. 아무리 모르고 한 말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당사자 앞에서 악담한 셈이었다.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맥시가 어두운 얼굴로 다시 사과하자 밀리안이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일단 앉아요. 뭐 마실래요? 커피?”
“아뇨, 제가,”
“앉아 있어요. 커피 맞죠?”
앉자마자 벌떡 일어서려는 맥시를 말리며 밀리안이 다시 물었다.
“……네. 얼음 많이요.”
“그래요. 잠깐 기다려요.”
에스프레소 머신에 컵을 대고 버튼을 누르자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짙은 색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휴게실 전체에 커피 향이 퍼졌다. 밀리안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오자 맥시가 조심스레 자신의 몫을 받아 들었다. 밀리안은 맥시 앞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한입 마셨다. 맥시는 속이 많이 탔었는지 그새 잔을 싹 비웠다.
“한잔 더 뽑아 줄까요?”
“아니에요. 이거면 돼요.”
역시 카페인이 필요했다며 맥시가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트렸다. 밀리안은 웃으며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진정이 됐나 보네요.”
“네. 고마워요.”
“맥시가 아니었더라도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였어요. 저도 당연히 끝이 보이는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이젠 절대 그렇지 않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클레이의 손을 놓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밀리안이 편한 얼굴로 말하자 맥시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사장님까지 꽉 잡을 줄은 몰랐어요.”
과분한 평가에 밀리안이 머쓱한 얼굴로 잔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시선을 내리깐 남자의 얼굴은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맥시는 클레이 디어가 혼자 반지를 끼워 가며 공공연히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다녔던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밀리안이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결혼 축하해요. 초대해 줄 거죠?”
“당연하죠. 꼭 맥시의 축하를 받을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와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더 오래 있었다간 클레이의 질투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녀의 질투는 달콤했지만, 이브 테일러의 일까지 겹쳐져서 자칫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다. 밀리안이 먼저 일어나자 맥시도 따라 일어섰다. 사용한 컵을 씻고 선반에 올려 두는데 맥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에요?”
“아, 그건…….”
“혹시 민감한 질문이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아뇨. 클레이가 걱정이 너무 많아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사장님이, 걱정…….”
“안 어울리죠?”
“네. 솔직히 정말 많이요.”
슬쩍 주변을 돌아보며 맥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래. 어울리지 않는다. 클레이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계속 의문이 들긴 했다. 결혼식까지 아무것도 방해되는 게 없었으면 한다는 말이. 정말 클레이가 고작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할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한번 의문이 들자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밀리안은 한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욕심이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클레이를 사랑하게 된 이후 욕심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비례하여 인내심도 빠른 속도로 줄고 있었다.
* * *
밀리안은 클레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곧게 세운 유려한 등과 자신감이 가득한 우아한 걸음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천장에 있는 조명이 모두 그녀를 위한 것 같았다.
로비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 전부 클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시선을 주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어느새 밀리안의 걸음이 멈춰 있었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클레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부지런히 쫓아가지 않으면 그들의 관계도 이렇게 멀어지게 될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밀리안은 다시 도진 불안증에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각인까지 해 놓고도 불안해하다니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녀를 쫓아가려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앞만 보고 걷던 클레이가 우뚝 서더니 몸을 뒤로 돌렸다. 자신의 바로 뒤에 있을 줄 알았던 그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여자의 표정이 선명히 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그를 발견한 클레이의 얼굴이, 눈빛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밀리안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녀에게 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조금 더 빠르게. 더, 더. 더 빨리 그녀에게 닿고 싶은 마음에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조심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내가 쫓아가지 않더라도, 저 여자는 분명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계속 불안해하며 자신을 붙잡아 둘 것이다. 강제로라도.
그게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밀리? 당신 지금…….”
“미안해요, 그런데 더는 안 되겠습니다.”
“뭘,”
손을 들어 클레이의 볼을 쓸었다. 그녀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본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입을 맞추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 * *
그다음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숨어 있던 파파라치들이 전부 튀어나왔고,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난장판이 된 상황에 에릭을 비롯한 경호원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막으며 차로 이동했다. 멍한 얼굴로 밀리안의 키스를 받던 클레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말갛게 웃고 있는 밀리안을 차에 태운 뒤, 차 문을 닫았다. 하지만 밖에선 연신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고, 앞을 가로막은 파파라치들이 많아 차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
클레이는 여전히 해사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짓을, 읏.”
“클레이. 클레이…….”
밀리안이 클레이의 무릎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쓰러트린 후 다시 입을 맞췄다.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듯이 굴고 있는데, 그조차도 귀여워서 클레이는 차 시트에 누운 상태로 얌전히 밀리안의 키스를 받았다. 이런 비유는 조금 그렇긴 했지만, 꼭 잔뜩 흥분한 강아지의 격한 애정표현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좋긴 했지만, 문제는 이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 건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나저나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비밀로 하자고 했던 건 망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혀를 깊게 얽으며 픽 웃었다.
“말해 봐. 대체 왜 이런 건지.”
“화, 났어요?”
“내가? 그래 보여?”
“……아뇨.”
“하지만 놀랐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그때 당신을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밀리안이 상기된 얼굴로 속삭였다. 이후의 사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었지만, 클레이는 밀리안을 따라 웃었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회사 로비에서 커밍아웃이라니. 영화나 드라마 시트콤에서조차 하지 않을 한물간 이벤트였지만, 그 주체가 이 남자여서 기쁘기만 했다.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하던 남자가, 이제는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어 안달한다. 그것도 이렇게 요란한 방법으로. 당분간 숨기자고 합의를 본 상태에서도 견딜 수 없었다는 게 기쁠 수밖에 없다.
“시끄러울 거야.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결혼한 이후든, 혹은 그전이든 그에겐 마찬가지였다. 밀리안의 말에 클레이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그의 과거를 세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결혼식까지로 유예를 둔 거였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고자 했지만, 밀리안이 그걸 원치 않는다면 모두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클레이는 자신의 염려가 지나친 나머지 밀리안의 각오를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를 최우선시해야 한다던 다짐이 모두 제 아집에 불과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볼을 손으로 쓸었다.
“미안해.”
“……뭐가, 말입니까?”
“그냥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내가 너무 고집을 부렸지.”
밖에선 아직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있었다. 창문은 짙게 선팅되어 있었지만, 플래시가 워낙 강하게 터지고 있어 빛이 안까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밀리안은 제 위에 올라타 있어 그 빛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 곳곳이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간혹 눈이 시린지 살짝 찌푸리는 것조차도 아름다웠다.
“모든 사람이 날 부러워할 거야.”
“…….”
“어떻게 이런 남자를 찾아내서 결국 완전히 가질 수 있었냐며 질투하고 탄식하겠지.”
“클레이.”
“당신은 완전히 내 것이 됐어. 이제 도망치지도 못해.”
이렇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자신이 직접 그들의 사이를 밝힌 게 아니라 밀리안이 돌발적으로 굴었기 때문이리라.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걸어와 자신의 손 위에 올라왔다. 어쩌면 자신은 계속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계속 조금 뒤에, 조금 뒤에 하며 관계를 밝히는 걸 미뤘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당신은 내 거예요.”
“맞아. 난 당신 거야.”
그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차를 에워쌌던 파파라치들을 치워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들의 사진과 영상이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