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119화 (119/144)

-외전 5-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일이 아니야. 그냥, 내 부모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라.”

클레이가 변명할수록 밀리안의 표정이 더 가라앉았다. 그는 클레이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정말 별거 아니야. 그런 표정 짓지 마.”

“당신은 제 과거를 뒷조사까지 해 가며 알아봤지 않습니까?”

“…….”

“저도 뒷조사를 해야 하나요?”

밀리안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클레이가 백기를 들어 올렸다. 그의 요구가 너무도 타당해서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거창하게 뒷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밀리안의 요구라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벤틀로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말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게 낫다.

하지만 정말 별 게 아니었고, 말해 봐야 기분 좋은 과거도 아니었다. 클레이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던 부모님 일까지 꺼내야 했다.

“내 부모님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강제로 붙잡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 날 가진 것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고.”

“…….”

“아버지에게 내 존재는 그저 어머니를 묶어 둘 인질 같은 거였는데, 정작 어머니가 날 혐오해서 날 쓸모없다고 여겼어.”

“클레이.”

“그래서 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걸 사진 같은 것으로 기록을 남겨 놓을 필요도 없었어.”

“…….”

“디어 가의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돌려받은 적이 없어. 웃기지도 않는 전통이지.”

결국 어머니는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했고, 아버지는 그 뒤를 따라 죽었다. 혼자 남겨진 날, 모든 미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디어 가에서 제대로 된 관계로 이어진 적이 없다고 했고, 그걸 들은 날 자신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건 변명이 되지 않겠지만, 난 애초에 당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걸 포기했던 걸지도 몰라. 어차피 그럴 거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해도 끝은 똑같을 테니 당신을 어떻게든 잡고 있는 것만 중요했어.”

그러면서도 그의 사랑을 바랐다. 오만하고 비겁한 마음이었다.

“당신이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끝은 똑같았을 거야.”

클레이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황망한 얼굴을 한 밀리안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제 와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지만, 간혹 상상하곤 한다. 제대로 그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다면 밀리안이 자신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억지로 제 옆에 있지 않았을 거라고. 부질없는 생각이었고, 너무 늦은 후회였다.

“미안해. 당신을 괴롭게 해서. 내가 멍청해서.”

“이제 사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난 계속 당신에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날 선택해 줘서.”

내게 마음을 줘서. 클레이는 결국 밀리안을 끌어안았다. 그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그를 결코 놓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각인이라니. 디어 가의 역사상 반려자의 각인을 얻어 낸 알파는 자신뿐이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제게 벌어졌다. 클레이는 언제나 밀리안에게 미안했고, 고마웠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 마음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랑해.”

“저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잊어요.”

“난 당신 말은 모두 들어줄 수 있지만, 이건 불가능해.”

“…….”

“그러니까 이번 일도 용서해 줘.”

“용서할 일도 없어요. 화나지 않았으니까. 그냥, 어릴 때 일이 떠올라서 기분이 심란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내게 집착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라고, 밀리안이 클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클레이는 감격한 얼굴을 하다가 이어지는 밀리안의 말에 움찔 굳었다.

“하지만 그 AV는 반드시 지워야 합니다.”

“……응.”

“혹시라도 다른 곳에 복사해 놓은 건,”

“없어. 정말 저기에 있는 게 다야.”

“그래요.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밀리안의 눈빛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정이라, 클레이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런 클레이의 반응에 픽 웃던 밀리안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가장 중요한 걸 깜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 어릴 때 사진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화낼 만한 과정을 통해 얻어 낸 것이라는 걸까. 밀리안은 클레이의 말에 섣부른 약속을 할 수가 없어 잠시 주저했다.

“일단 들어 보고요.”

“안 돼. 먼저 약속해.”

“……좋아요. 약속하겠습니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하던 클레이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밀리안은 사실 클레이가 무슨 짓을 했든지 그녀에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이 약속이 그렇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레이가 이 정도까지 강조하는 것 자체가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올 진실이 어쩌면 제게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클레이는 적당히 이야기를 각색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밀리안이 상처를 크게 입을 만한 일만은 삭제하는 게 중요했다. 가령, 그의 친모가 정신이 돌아서 그를 청부 살인하려고 했던 일이라던가, 하는 일들 위주로.

“나는 디모시 부부가 혹시라도 당신에게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어. 그래서 그들의 집은 물론 그들의 모든 행적을 다 감시했지. 내가 예전에 새벽에 잠시 나가 있던 이유도 그 보고를 받으려던 거였고. 낮엔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과 함께 보내기 때문에 새벽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았어.”

클레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밀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굳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리가 언론에 터진 이후로 닥터 디모시는 다니던 병원에서 쫓겨났고,”

“그것도 클레이 당신이 한 일이죠?”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밀리안이 그녀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클레이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그가 눈치챈 이상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 아무리 말을 잘 꾸며 낸다고 해도 각인을 한 뒤로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맞아.”

밀리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흉곽이 부풀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켠 후, 길게 내뱉었다. 클레이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비리를 터트린 것도 나야.”

“-!”

“실망했어?”

“……아니요.”

“정말?”

“네.”

정말이었다. 먼저 자신을 잘라 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제 와 그를 위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하물며 그 주체가 클레이라면 더더욱. 밀리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클레이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들을, 이 나라에서 내쫓을 거야. 이미 그렇게 진행하고 있고,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야.”

“클레이.”

그건 너무 과하지 않냐고 말리려는 밀리안을 클레이가 막았다. 침착하게 말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클레이의 억양이 다소 격양됐다.

“이것도 많이 봐준 거야. 만약 그들이 당신의 혈육이 아니었다면, 당신을 태어나게 해 준 부모가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끝내지 않았어.”

“…….”

“당신이 화내지 않길 바란 부분이 이거였어. 설혹, 당신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난 물러설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앨범은 그들을 감시하던 중에 버리려고 내놓은 걸 발견하고 가져왔다고 클레이가 말을 끝맺었다. 진실과 삭제된 진실, 그리고 조금의 거짓이 섞이자 밀리안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각인의 맹점을 찾아낸 건 각인한 당일이었다. 아무리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가장 표면에 드러난 감정일 뿐이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클레이는 자신이 퍽 비열한 성격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밀리안이 제게 비밀을 만드는 건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그가 낱낱이 알길 바라진 않았다. 순진하고 마음이 여린 밀리안과는 달리 제 속은 너무나도 새까매서, 그가 몰랐으면 했다.

밀리안은 사소한 질투와 소유욕, 집착으로 스스로를 얽매곤 했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게 밀리안다운 행동이기도 했고, 무척 귀엽기도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좀 더 날 집착하고, 더 날 구속하고, 더 간절하게 매달렸으면 좋겠다. 이러다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겠다며 절망한 얼굴로 소리치던 밀리안이 떠오르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완전히 정신을 놓고 허물어지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밀리안은 너무 이성적이지. 그러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제 속은 조금이나마 감추는 편이 나았다.

클레이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도 부족해 한껏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속살거렸다.

“내게 실망하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랑해 줘.”

“클레이…….”

“사랑받고 싶어.”

“…….”

밀리안은 절절하게 쏟아지는 클레이의 마음에 넋을 놓았다. 그만큼 순도 높은 진실이어서, 그래서 그 속에 클레이가 무엇을 감추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밀리안은 클레이를 바짝 끌어안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저주하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이니까. 밀리안은 옅게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더 크게 웃고 싶었다. 그 사람들 앞에서.

“어렵지 않다면, 결혼식은 더 화려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 이야?”

“네.”

그들의 결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이 꼭 봐야 한다. 밀리안은 우려 섞인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클레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말해.”

“제 부모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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