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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 클레이도, 밀리안도 놀라 멍하니 서로만 바라봤다. 잘게 떨리는 갈색 눈동자를 핥듯이 바라보며 클레이는 이 어설픈 청혼을 끝까지 이어나갔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평생 나와 죽을 때까지 산다고 약속해. 모든 사람에게 당신과 내가 부부라고, 알리게 해줘.”
밀리안이 웃었다. 아주 작은 미소였지만, 자신의 말에 온 마음으로 동의하는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클레이는 결국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자신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청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멋없이 할 생각이 아니었다. 좀 더 제대로 멋진 이벤트를 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너무 앞서버렸다. 이번은 없었던 것으로 치고 다시 제대로 할 생각을 하는데, 밀리안이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벤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세요.”
“……한 번쯤 해도 되지 않아?”
“싫습니다.”
“너무 단호하잖아.”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하지 마세요.”
클레이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하자 밀리안은 자신이 너무 정색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런 게 없어도 당신만으로도 충분해요.”
“미치겠네.”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다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남자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급격하게 달아올랐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현실이 떠올랐다. 대니얼이 밀리안이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세상에 떠벌리고 싶은 마음은 넘쳐났지만, 밀리안이 그걸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혼을 발표하기 무섭게 파파라치들이 달려들 테니까. 아무리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려도 결국은 알려지게 되어 있다. 자신은 그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밀리안은 아닐 것이다.
“청혼해 놓고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혼식은 미루면 어떨까?”
“왜…….”
“조심해야 하니까. 상상 임신도 진짜 임신과 똑같아서, 다시 몸이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어.”
지금이야 괜찮아 보여도 내일이면 다를 수 있다. 상상 임신은 심인성으로 인한 증상이어서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어떤 후유증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한 경우, 실제로 유산한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와중에 몸은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할 테고. 이런 상황에 결혼식까지 준비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밀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심스러운 클레이의 마음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더 미루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결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였다.
“클레이, 저는 이제 도망만 다니기도 싫고, 당신의 뒤에 숨어 지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이 생긴다면 클레이와 나누면 된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클레이도 있고, 벤틀로도 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인데, 하나하나 걱정하며 뒤로 미루기만 하면 그녀의 곁에 당당하게 설 날도 미뤄지는 거였다.
“당신을 내 것이라고 알리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큽니다.”
“밀리.”
“당신을 욕심내는 남자들을 다 죽이고 싶었어요.”
“…….”
그답지 않은 격정적인 표현에 클레이의 눈이 홉떠졌다. 밀리안은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서도 두렵지 않다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클레이의 심장이 기쁘게 뛰고 있어서, 그래서 괜찮았다. 밀리안은 차분히 미소지었다.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스스로 강제하고 억눌렀던 모든 것을 벗어던지니 비로소 행복해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다. 하지만 클레이가 아니었더라면 이 쉬운 것을 영원히 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더 미루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제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보다, 클레이가 제 것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만한 가치가 차고 넘치는 여자였다. 클레이 디어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자신이 바보 같을 지경이었는데, 어떻게 더 미룰 수가 있을까.
밀리안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클레이의 왼손에 반지가 반짝였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섰다. 예상치 못한 밀리안의 행동에 클레이의 눈이 커졌다.
“밀…….”
밀리안이 그녀의 반지 위에 고개를 숙였다. 더없이 경건한 얼굴로 그와 나눈 반지에 입을 맞췄다. 클레이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이 수없이 그의 반지에 입을 맞췄었지만, 밀리안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등 뒤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찔하도록 눈이 부셨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클레이.”
“……당연하지.”
어이가 없도록 하찮았던 자신의 청혼보다도 훨씬 멋지고 아름다운 청혼이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이 남자의 청혼을 거절할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여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어야 하지만. 한참 뒤에 그녀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꼭 동화 속 왕자님 같았어.”
“동화 속 왕자님은 임신하지 않겠지만요.”
특히 상상 임신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라며 얼굴을 붉혔다. 클레이는 그런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붓이 속삭였다.
“아니야. 그 공주는 알파였을 거야.”
분명 동화 속 왕자님은 오메가일 거고. 클레이가 부득불 우기자 밀리안이 어깨를 흔들며 작게 웃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고,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때때로 흔들릴 때도 있고 의심을 하는 날이 올지라도 우린 결국 평생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다. 지금처럼.
* * *
그리고 두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클레이는 동화의 엔딩 문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상상 임신으로 인한 후유증은 생각보다 상당했다. 대니얼은 임신이라고 착각해 아이를 품을 준비를 하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밀리안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최대한 빠르게 결혼하자던 약속은 결국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 밀리안은 곧 괜찮아질 거라며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구는 클레이와 벤틀로를 먼저 다독였다. 길어지리라고 생각했던 후유증은 그의 의지가 강했던 탓인지 점차 회복되어 갔다.
밀리안은 현실을 굉장히 빨리 인지했고, 그걸 몸도 받아들였다. 하혈과 구토가 멎었고, 도톰하게 부풀었던 유두도, 성기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밀리안이 건강해지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클레이가 간과했던 어떤 일로 인해 현재 밀리안은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얼굴이라도 봐야 말이라도 해보고 빌기라도 할 텐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클레이는 파티 명단을 추리고 있는 벤틀로를 향해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밀리안이 얼굴을 안 보여줘.”
“당연하죠. 저였으면 주인님의 따귀를 때렸을지도 모릅니다.”
“밀리가 내 따귀를 때린다라…….”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제 뺨을 치는 밀리안이라니. 클레이는 불편한 얼굴로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꿔 꼬았다. 상상만으로도 그가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도 내밀 자신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밀리안의 새로운 모습이 신기했다.
“내게 화를 내다니.”
“그게 그렇게 좋으십니까?”
설핏 올라가는 입술을 매만지며 하는 말에 벤틀로가 눈을 치켜떴다. 요즘 벤틀로는 연약한 새끼를 지키는 어미 새처럼 굴고 있었다. 아마 밀리안의 행동을 부추기고 있는 사람이 벤틀로일 것이다. 그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렇게 철저하게 모습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있어서 죄인은 오로지 자신뿐이어서 클레이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물론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밀리안이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갈 생각을 하며 클레이는 해사하게 웃었다.
“귀엽잖아.”
“그 말을 하셔서 더 화를 내셨죠.”
“으음.”
그랬지.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화를 냈다. 다시 그때의 밀리안이 떠오르자 더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클레이는 상체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밀리가 부족해.”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됐잖습니까? 그리고 밀리안 님께서 화내신 원인을 처리하는 게 더 급합니다.”
벤틀로는 추리고 있는 파티 명단을 가리켰다. 알파들의 정례 모임. 하필 다음 호스트가 클레이 차례였다. 결혼하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클레이는 그 손해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밀리안이었다. 무슨 생각인 건지 이 파티를 자신이 한번 봐야겠다며 그대로 진행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봐봤자 기분만 상할 게 분명한데.
화가 나서 그냥 해본 말이라면 설득이라도 해볼 텐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였다. 차갑게 식은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밀리안은 진심 그 자체였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단단한 철벽에 클레이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이제야 건강해진 밀리안을 상대로 제 뜻을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제멋대로 살아왔던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왜 그랬지? 좀 더 얌전하게 살다가 밀리안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것들이 돌이켜보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 못했다. 가장 문제는,
“이걸 보고 밀리가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싹싹 비셔야죠.”
“그래도 안 통하면?”
“그럼 밀리안 님의 뜻대로 하셔야죠.”
“……벤틀로 요즘 나한테 너무 한 거 아니야?”
“자업자득입니다.”
벤틀로의 차가운 말에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벤틀로를 공략해서 밀리안을 보는 건 먹히지도 않을 것 같고…….
밀리안이 화내는 건 좋다. 그는 어떤 모습이든 섹시했으니까. 다만 화를 내더라도 얼굴은 보고 싶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데도 일주일이나 얼굴을 못 보니 환장할 것 같았다.
클레이가 인내심에 한계에 달했을 무렵, 밀리안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