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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안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챙겨주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엔 클레이가 밀리안을 발끝으로 부렸다. 게다가 클레이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속구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밀리안은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개처럼 길 생각이었다. 그녀가 이상한 명령만 하지 않았더라면.
밀리안은 가슴을 거의 드러낸 상태로 클레이가 말한 서랍장에 갔다.
“여기, 말입니까?”
“그래. 거기. 서랍을 열면 검은색 벨벳 상자가 있을 거야.”
“이거요?”
“맞아. 이리로 가지고 와.”
“…….”
벨벳 상자는 거뜬히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별로 무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밀리안은 다소 불안한 얼굴로 클레이가 말한 물건을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클레이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느낌이 연결된 감각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밀리안은 그 감정에 기꺼이 동참할 수가 없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몰라도 분명 제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야. 열어 봐.”
“저는, 괜찮…….”
“밀리, 나는 당신이 도망치려고 한 사실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
“―!”
“아무리 각인을 하고 다 좋아졌다지만, 당신의 행동에 내가 상처받은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안 그래?”
“……그렇, 죠…….”
“그러니 예쁘게 말 들으면서 내 기분을 풀어줘야지.”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는 다소 즐거운 듯 들떠 있었지만, 이어진 감각으로 그녀의 고통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녀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약한 자신보다 더 잘 견디고 빨리 극복하리라고 섣불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클레이는 이렇게 온몸이 아릴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살짝 느꼈던 조금 전보다도 더 깊고 아득한 절망. 밀리안은 죄인이 된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클레이가 시키는 대로 상자를 열었다.
“―!”
“그걸 넣고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당신이 좋아하는 곳을 찔러줄 거야.”
“…….”
“계속 보고만 있어도 그게 사라지진 않아, 밀리.”
“클레이……, 잘못 했어요.”
이건 아니었다. 밀리안은 이상한 것이 들어있는 상자에서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차라리 화가 풀릴 때까지 맞으면 맞았지, 이런 걸 넣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때리세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때려? 장난해?”
“……제겐 이런 것보다 맞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 싫어해야 벌이지.”
결국엔 좋아하겠지만. 직접 넣어주지 못해서 아쉽지만, 스스로 저것을 넣고 허리를 흔들 남자의 모습도 기대된다. 클레이는 싫다고 거부하는 남자를 압박했다.
“투명한 통에 있는 게 소독약이야. 그걸 뿌리고 살짝 기다리면 마를 거야. 그리고 옆에 있는 젤을 발라서 요도에 집어넣기만 하면 돼. 쉽지?”
클레이는 가볍게 말했지만, 밀리안에게는 아니었다. 밀리안은 살짝 휘어진 기다란 것을 보다가 간절한 눈으로 클레이를 바라봤다. 여유롭게 웃는 클레이의 눈은 너무도 단호해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밀리안은 잠시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클레이는 긴장한 얼굴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밀리안의 행동에 웃음을 꾹 참았다. 무슨 짓을 하려나 기대가 됐던 탓이다. 살짝 눈을 감고 기다리는데 입술에 말캉한 살이 닿았다.
‘아아, 정말이지.’
귀여워서 미치겠네. 몇 번을 입 맞춰도 클레이가 눈을 감은 채 반응하지 않자, 밀리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얼굴 전체에 입술을 비벼댔다. 그러다 혀로 핥기도 하며 애교를 부렸다. 화를 풀라고, 저건 싫다고 애원하는 그의 속내가 이어진 감각을 통해 들려왔다. 그래도 아쉬운데. 혼자 구멍에 야한 장난감을 넣고 자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귀엽게 구니 또 마음이 약해졌다.
간혹 애교 비슷한 걸 부리긴 했어도 이렇게 대놓고 하진 않았다. 아마도 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교가 아닐까 싶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억지로 참다 보니 얼굴 전체가 경련했다. 그걸 눈치챈 밀리안이 더 열정적으로 얼굴을 핥았다.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개도 아니고.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이 남자가 이렇게 행동할 정도로 싫다는데 어쩔 도리가 있을까. 게다가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를 살살 구워삶아 저걸 사용하게 할 자신도 있었다. 클레이는 관대하게 밀리안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 * *
밀리안의 놀이에 동참해주는 건 좋긴 했지만, 시간이 길어지니 불편함이 더 커졌다. 클레이는 살짝 팔다리를 움직여 편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언제 풀어줄 생각이야?”
“오늘까지만 이러고 있으면…….”
“화장실은 어떻게 가라고?”
“…….”
밀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하지만 풀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남자의 새로운 모습을 몇 번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본성이란 말이지?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내 생리 현상까지 모두 해결해 줄 생각이었어?”
“…….”
“역시 변태 맞잖아, 당신.”
“……클레이도 그랬었잖아요.”
“난 최소한 화장실까진 가게 했잖아. 비교할 걸 해야지.”
게다가 겸사겸사 사리사욕을 채웠다 하더라도 그땐 밀리안의 건강을 위한 의료 행위였다. 클레이가 혀를 차자 밀리안이 시선을 피한 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귀엽긴 한데, 정말 귀여운데……. 클레이는 앞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 욕구를 감추기만 하며 살아온 남자는 정도를 몰랐다. 하지만,
“밀리, 난 당신이 변태여도 사랑해.”
“변태가 아니라….”
“맞아.”
인정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하자 밀리안이 나름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제가 변태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건 모두 클레이에게 배운 겁니다.”
“뭐?”
“저도 클레이가 변태여도 사랑합니다.”
“…….”
아, 졌다. 맞는 말이어서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새하얀 백지를 흙발로 더럽힌 사람은 자신이 맞았다. 클레이는 자신이 그에게 했던 행동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을 느꼈다. 변태라는 건 인정했다. 사실이니까. 자신은 변태가 맞았고, 밀리안도 그렇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커플이란 뜻이리라. 클레이가 피식거리며 웃자 밀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웃냐는 듯이.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가 오메가여서 다행이야.”
“―!”
“너와 이렇게 각인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
“클레이…….”
“네가 베타였다면 그래도 널 사랑했겠지만, 이런 감각은 느낄 수 없었겠지.”
“…….”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신이 울면 나도 울고 싶어. 클레이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밀리안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살짝 잡아당겼다. 눈물에 젖어 살짝 염도가 느껴졌지만, 그조차도 사랑스러웠다. 잠시 그녀의 입맞춤을 느끼던 밀리안이 고개를 뒤로 밀었다. 정정. 이렇게 묶이는 게 썩 좋지만은 않다. 따라가서 입을 맞출 수 없잖아. 클레이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자 밀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오메가여서 좋다면.”
“응.”
“그럼 제가 아이를 가져도 됩니까?”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밀리안의 질문이 너무 어이없어서, 클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밀리안이 불안한 얼굴을 해서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당연히 좋아. 제발 가져줘.”
“……지난번에 아이를 싫어한다고…….”
“그건.”
그랬다. 싫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밀리안이 싫어할까 봐 했던 말이었다. 잠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는데 밀리안이 다시 물었다.
“싫은데 제 기분 맞춰주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야. 그건 정말 아니야. 느껴봐. 내가 정말 거짓말하는 것 같은지.”
“…….”
“싫어하는 거 같아?”
“아니요.”
“난 오히려 당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그동안 아이에 대해 언급만 하면 싫어해서……, 잠깐, 당신 설마…….”
설마. 클레이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넉넉한 품의 셔츠에 밀리안의 배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다시 밀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가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 떨리는 사람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긴장됐다. 클레이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제가 보고 있는 게, 느끼고 있는 게 진실인지 헷갈렸다. 너무 바라다 못해 간절해진 소망이 이뤄낸 꿈 같았다.
“임신, 했다고?”
“……네.”
“정말? 우리 아이를? 아니, 어떻게…….”
정관 수술을 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을 해? 아니, 그사이에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밀리안이 벌써 알 수 있나?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데, 두 주 전에 임신 테스터기에 두 줄이 떠서…….”
두 주? 그렇다면 여기 갇히기 전이다. 그리고 밀리안이 도망치기 전. 임신이라고? 어떻게? 몇 번의 검사를 통해 완전히 정자가 보이지 않은 뒤에야 첫 섹스를 했다. 그리고 틈틈이 받은 검사에서도 묶은 것은 여전했고, 정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정상적이라면 밀리안이 임신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밀리안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밀리안 디모시는.
클레이는 그제야 밀리안의 이상했던 점을 깨달았다. 함께 식사할 때마다 예전에 비해 엄청난 식욕을 보였던 모습도, 유두가 굉장히 커진, 하지만 절대 임신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깨닫지 못했던, 사소한 변화라고 스쳐 지났던 것들이 모두…….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클레이는 아무리 정관 수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만 한 모든 변화를 그대로 넘겨버린 자신의 눈치 없음을 비난했고, 동시에 제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떠나려고 했던 밀리안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내가 없는 곳에서, 우리 아이를 혼자 키울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게다가 임산부를 상대로 거칠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밀리안이 전혀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그녀의 행위에 따랐다는 것도. 미쳤어.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당장 이거 안 풀어?!”
한가하게 이런 놀이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병원부터 가야 했다. 클레이가 뭐가 잘못된 줄 모르고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고 있는 밀리안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