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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안이 떠났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받지 않는 주인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은 밀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화목했던 저택은 이전보다도 황량해져 혼자 그 넓은 공간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되도록 찾아가지 않던 주인의 회사로 쳐들어간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벤틀로는 드디어 마주한 주인의 피로한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클레이는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밀리안 님께서 떠나셨다는 말입니까?”
“그래.”
“대체 왜…….”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물어보려던 순간, 주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탓이었다. 괜히 말을 덧붙였다가 상처만 헤집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 벤틀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보냈을 리는 없다. 말도 안 되지. 그분이 떠난다고 순순히 놓아준다는 건 주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예상이 맞다면 밀리안 님을 마지막으로 배웅했던 그 날이 떠난 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 왠지 아슬아슬해 보여 저도 모르게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왔었다. 그렇게 티가 났는데,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황망해졌다. 평화로운 일상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너무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일을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일이 잘못됐다면 바로 잡는 게 중요했다. 벤틀로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벌써 열흘이 지났다는 건데, 아직도 잡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벤틀로는 주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너무 괴롭히지 마시고 본가로 모셔오십시오.”
못된 짓을 하는 아이를 책망하는 듯한 말에 클레이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속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떠나기 전에 잡아 왔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눈치가 너무 빨라.”
“이것도 오래 속아드린 겁니다.”
밀리안은 굉장히 섬세한 성격을 지닌 남자였다. 그래서 그만큼 눈이 가고 신경이 쓰였다. 그에게 정을 주게 된 이후, 가장 후회하는 일은 주인의 강제적인 행사를 막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오히려 동조했지. 그저 주인에게 짝이 생겼다는 것에만 기뻐했다. 불안정한 시작은 어떻게든 봉합이 되었지만, 잘못 꿰어진 단추를 그대로 두고 계속 여며봤자, 마지막에 달했을 때는 결국 인정하게 된다. 억지로 꿰었던 단추를 모두 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벤틀로는 따끔거리는 심장의 통증에 침음성을 삼켰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최우선은 단연코 클레이였지만, 이제는 그 순위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밀리안도 제 아이였다. 상처가 많은 아이를 더 아프게 할 수 없었다. 설사 그렇게 만든 사람이 클레이라고 할지라도.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사랑한다면 더 아껴주십시오. 그것도 부족하다고 한다면 더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만해.”
“이럴 게 아니라 제가 밀리안 님께서 계신 곳에 가야겠습니다.”
“그만하라고 했어.”
“주인님.”
“참견하지 마. 너라도 안 돼.”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마. 클레이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그를 경계했다. 마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듯이. 벤틀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주인은, 클레이는 이제 다 큰 성인이 되었음에도 제 눈에는 항상 상처받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런 성격이 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는 자신일 것이다. 제대로 가르쳤어야 했다. 품에 가둔 채 원하는 대로 하라고 오냐오냐하며 키운 게 독이 된 셈이었다.
지금 강하게 나가는 건 좋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물러선 채 상황을 살피는 게 나을 것이다. 벤틀로는 한숨을 삭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반드시 함께 돌아오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
“주인님.”
“그래.”
억지로 대답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약속한 클레이도, 벤틀로도 알고 있었다.
* * *
벤틀로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에릭 드와이스를 호출했다. 한동안 휴가를 받고 쉬다가 오늘 복귀했던 에릭은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벤틀로 앞에 나타났다. 벤틀로가 따로 호출할 때는 별로 좋은 일이 없었다. 휴가를 겸해서 요즘 사장의 경호에서도 한걸음 물러서 있던 터라, 엘레나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즐기지도 못한 시간이 금세 동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론 불안감은 예상을 빗겨 가는 일이 없었다.
“에릭은 알고 있죠?”
“뭐가 말입니까?”
“밀리안 님의 행방 말입니다.”
“역시.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모르고 있었습니까?”
“벤틀로도 모르지 않습니까? 사장님이 숨긴다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잔뜩 의심이 섞인 시선에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사장을 경호하고 있긴 해도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벤틀로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하는 게 낫겠군요.”
“……저도, 말입니까?”
자연스럽게 자신까지 엮는 말에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일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남녀의 사랑싸움에, 그것도 사장의 사랑에 끼어들어봤자 좋은 꼴을 보기 어려울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에릭이 발을 빼려고 하자 벤틀로가 그를 비난했다.
“밀리안 님께서 실종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실종이 아니라 사장님이.”
“실종입니다. 행방을 알 수 없고, 연락도 되지 않는데 실종상태지요.”
“…….”
정말 실종된 사람을 찾겠다는 표정이 맞는 걸까. 에릭은 상기된 얼굴을 한 노년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밀리안의 부모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겨우 집에 제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엘레나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디어 가에 엮인 게 문제였다. 왜 여기에 들어왔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그만둘까. 엘레나와 함께 한적한 교외로 내려가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책임한 생각을 했다.
* * *
밀리안은 눈을 뜨니 이미 클레이가 출근한 뒤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어제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클레이가 제 몸에 손을 대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문제였다. 밀리안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모처럼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 클레이가 한결 풀어진 얼굴을 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 얼굴을 오래 만끽하고 싶었다. 아마도 클레이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애정을 갈구하고 표현하던 그때가 된 것 같아서.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아득한 옛날처럼 흐릿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나날들이었는지 다시 깨달았다.
있을 건 다 있는 방이었지만, 솔직히 혼자 있기는 따분한 곳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하염없이 문만 바라보고, 주인이 돌아와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는.
밀리안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무기력하다고 계속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 건강을 해친다. 어차피 방을 나갈 수 없는데 족쇄는 풀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을 묶어둔 클레이의 표정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클레이가 만족하는데 굳이 풀어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만족한다면 좋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미치게 좋았다. 그녀가 보이는 독점욕이 너무 좋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동안 부족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지만, 그것만 아니면 완벽했다. 이렇게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은 이 마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걸까.
‘나도 그만둘까? 여기서 우리 둘만 지내도 괜찮겠어.’
마음속으로는 백번이고 그러자고 하고 싶었다. 그럼 이곳이 천국 같아질 것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 진작 그렇게 말하는 건데. 솔직하게,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고. 자신 외엔 그 어떤 남자와도 단둘이 있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
당신을 이렇게 묶어두고 싶어. 나처럼, 당신을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숨겨두고 독점하고 싶어. 이성으로 어떻게든 억누르며 그러면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그러고 싶다. 고작 한쪽 다리만 묶어두는 게 아니라, 팔도, 다리도 모두 묶어두고 저 혼자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는 분명 여유로운 얼굴로 저를 손가락 하나로 부릴 것이다. 묶여 있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아 할 게 분명했다. 그럼 자신은 주인의 명령을 들은 개처럼 꼬리를 흔들겠지. 굴욕은커녕 더없이 행복하기만 할 거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당신이 너무 좋아. 그러니 당신도 나만 바라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요. 나는 당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당신이 돌아온다는 확신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다 해도 좋으니까.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당신이 너무, 너무나도 보고 싶어.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아. 당신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아이는 지울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마.
애달픈 마음이 흘러넘쳐 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혼자만의 마음을 쏟아냈다. 헐떡거리는 숨이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 * *
벤틀로에겐 참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말에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대로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 정말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밀리안이 떠난다는 가능성을 남겨둘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밀리안의 선택을 기다리던 때가 떠오르자 클레이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떠나지 않기를. 밀리안은 결코 저를 떠나지 못할 거라고,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기다렸지만, 그는 결국 떠나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밀리안을 다시 자유롭게 둘 수 있겠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감금된 밀리안이 너무나도 평온하게 군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밀리안은 그렇게 완벽하게 표정을 꾸밀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 잡히지도 않고 도망쳤을 거다.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이 오기만 기다려야 하는 곳에 갇혔으면서도 얼굴에 그늘 한점 없는 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나는 당신을 모르겠어.”
하지만 그가 자신을 떠나려고 한 탓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심장이 이미 모두 녹아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오로지 나만 기다리고 있는 당신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어.
회사를 정리할까. 이런 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이 마땅치 않았다. 클레이는 습관적으로 태블릿 창을 열었다. 잠시 검은 화면이 보이더니 이내 밀리안을 비쳤다. 그는 여느 때처럼 하염없이 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이런 데도 정말 괜찮다고? 클레이는 카메라 화면을 좀 더 앞으로 당겨 그의 얼굴을 크게 보이게 했다.
‘밀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무언가를 말하듯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는 황급히 이어폰을 연결해 소리를 키웠다.
[보고 싶어요.]
“―!”
[당신이 너무, 너무나도 보고 싶어.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아.]
습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온 마음을 쥐어짜듯 토해내는 고백에 화면을 만지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것까지 거짓이라고, 자신을 방심시키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고 의심할 수는 없었다.
“나도. 나도 그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를 봐야 한다. 당장 그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었다. 클레이는 이어폰을 거칠게 뽑아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