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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안을 대신해 사장의 임시 수행비서가 된 사람은 줄리아였다. 경력이나 일 처리는 맥시가 좋았지만, 그녀는 다소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었고 다소 말이 많아 과묵한 성격인 줄리아가 수행비서로 적격이었다.
“저, 사장님. 밀리안은 언제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훑어보던 클레이 디어는 줄리아의 질문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다소 냉담하다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밀리안 디모시는 퇴사했어.”
“네?”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 그의 일을 제대로 파악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알겠, 습니다.”
사장은 더 이상 말도 붙일 수 없게 대화를 끊어버렸다. 줄리아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사인한 뒤 넘겨주는 파일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밀리안이 퇴직했다고?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밀리안의 성격대로라면 미리 말을 한 뒤에 인수인계를 제대로 처리하고 나갔을 텐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퇴사는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자신의 일을 나누며 익히게 한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업무를 맡아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줄리아는 조용히 사장실을 나섰다. 밀리안의 업무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장실에 있는 밀리안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밀리안의 빈자리는 그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언제든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맙소사.’
줄리아는 사장의 베일에 싸인 연인이 밀리안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것도. 한 가지 더 깨달은 사실은 천천히 제 자리를 정리하던 밀리안과는 반대로 클레이 디어는 여전히 그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줄리아가 사장실 문 앞에서 서서 생각에 잠겨 있자, 맥시가 그녀를 불었다.
“줄리아, 밀리안이 왜 출근 안 하는지 물어봤어?”
“……잠시 휴가를 낸 것 같아. 그동안 피로가 꽤 쌓였나 봐.”
사장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왠지 모를 예감은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사장의 말을 적당히 각색해 말하자 맥시가 섭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를 쓸 정도면 말 좀 해 주지.”
“예전에도 쓰러지기 직전까지 말 안 했잖아.”
“그래서 더 서운하다고. 이제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화라도 해 줄 수 있잖아.”
“잡담은 그만하고 일이나 해. 놀 시간 없잖아.”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면. 줄리아의 냉담한 말에 맥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자리에 앉아 사장이 컨펌한 서류를 업로드하면서 한숨을 삼켰다. 밀리안이 정말 클레이 디어의 연인이 맞다면 그가 듣는 자리에서 못할 말을 많이 한 셈이었다. 곧 버림받을 거라느니, 상대가 불쌍하다느니. 자신들뿐 아니라 아마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 말을 했을 것이다.
“하아…….”
밀리안은 아무 생각 없이 떠드는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모두 성급한 판단이길 바랄 정도였다.
* * *
밀리안은 흔들의자에 앉아 다리를 들어 올렸다. 집은 여전히 고요했고,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클레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곳에 갇혔다는 게 크게 힘들지 않았다. 힘든 것은 클레이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처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클레이가 간혹 한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든 것 같아 불안해졌다.
자긴 하는 걸까. 클레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싶어도 혹독할 정도로 격한 섹스에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나면 그녀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클레이를 끌어안을 수가 없다. 습관적으로 팔이 올라갔다가도 서늘한 시선에 바로 주저앉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면 소리를 채 내기도 전에 입이 막혔다. 그녀는 그가 신음을 내기 위해 입을 여는 것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을 굉장히 빠르게 눈치챘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 바보 같지만, 사랑해서 그런 거니 용서해 달라고. 너무 좋아서, 사랑이 지나쳐 불안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읏.”
밀리안은 근래 통증이 잦은 배를 끌어안았다. 클레이에게 온 신경이 다 쏠려 있었던 탓에 아이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설마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임신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클레이가 막아서 할 수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니 통증이 잦아들었다. 밀리안은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오늘은 꼭 말해야지. 설사 클레이가 입을 막는다 하더라도 말해야 한다. 결국에는 들키게 될 일이었다. 클레이가 먼저 눈치채기 전에,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말해야 했다.
* * *
이전보다 빨리 클레이가 돌아왔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밀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표정했던 여자의 얼굴은 그를 본 순간 살짝 풀어졌다. 밀리안은 그 순간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클레이.”
발에 걸린 족쇄 때문에 여자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밀리안은 가만히 서서 팔을 벌렸다.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었으니 안아달라고. 클레이의 체온이 필요했다. 클레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밀리안은 벌렸던 팔을 오므려 여자의 등을 감쌌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어깨에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걸 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을 반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돌아갈 때마다 저를 거부할까 봐 긴장한 게 무색하게.
“강제로 가둬뒀는데 왜 이렇게 굴어.”
“글쎄요. 만약 당신도 계속 같이 있는 거라면 평생 갇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심이야?”
“네.”
그런데 왜 도망치려고 했어? 그 질문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걸 억지로 내리눌렀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고 그의 입술을 찾았다.
“아, 오늘은 정말 할 말이.”
“나중에. 나중에 해.”
지금은 당신을 안고 싶어. 당신이 너무 고분고분하게 구니까, 이렇게 강제를 해도 아무렇지 않아 해서, 오로지 내가 오기만을 기다려서 미치겠어. 이제 그의 마음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 믿고 싶어진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말을.
클레이는 밀리안을 벽에 기대게 만든 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체를 살짝 감싼 셔츠를 들추니 이미 반쯤 선 성기가 보였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고환을 입에 물고 빨아들이자 밀리안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클레이는 그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은 채 짙은 냄새가 풍기는 성기에 뺨을 문질렀다.
“아, 아……, 클레이, 자, 잠깐, 읏.”
“한 번만. 일단 한 번 싸줘.”
내 입에. 클레이가 그의 귀두 바로 앞에서 입술을 벌렸다. 그 순간 좁은 구멍이 벌어지며 하얀 액체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싸라고 말하자마자 강제로 절정에 끌려가 사정해 버린 밀리안은 헐떡거리다 말고 엉망이 되어 버린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닦으려고 했다. 원래 뿜어내는 양이 많았던 터라 손으로 어설프게 닦는다 하더라도 얼굴에 더 번지기만 했다. 클레이는 작게 웃으며 닦을 것을 찾는 밀리안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체액으로 흠뻑 젖은 손을 혀로 핥아 올리자 남자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리고 반쯤 식어가던 성기가 다시 솟구쳐 클레이의 턱을 쳤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성기에 단정한 얼굴이 당황으로 움칫거리는 게 귀여워서 클레이는 더 크게 웃어 버렸다.
“밀리, 당신 자지는 말이야. 내가 굉장히 좋나 봐.”
“그, 그게 아니라.”
“안 좋아?”
“좋아해요!”
“나도 당신 자지 좋아해.”
“…….”
일부러 천박한 단어로 말하면 밀리안은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좋아했다. 그래서 자꾸 건드리게 된다. 모처럼 마음 편하게 웃다가 문득 이렇게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왜 아무렇지 않아 하지? 이렇게 아무도 만나지 못하도록 강제라 가뒀는데, 왜 싫어하는 기색이 없어? 도망가려던 남자를 잡아 가둔 게 아니라, 은밀한 밀회를 하는 느낌이었다. 밀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클레이?”
“응.”
그래. 저 모습 때문이었다. 말갛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 바라봐서. 그래서 자꾸 착각하게 된다. 우리의 관계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아니. 혼잣말이야.”
클레이는 굳이 밀리안에게 이 말을 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밀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든지 자신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만둘까? 여기서 우리 둘만 지내도 괜찮겠어.”
“그건 안 됩니다. 회사는, ……가야죠.”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주제에 아쉬운 얼굴이라니. 클레이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약았어. 당신은 정말 약아빠졌어. 밀리안은 자신이 약해지는 포인트를 너무 잘 알았다. 계속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키스해 줘.”
“클레이, 우리 대화를.”
“……키스부터.”
계속 착각하게 해 줘. 당신이 이러는 게 사실은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고 의심하게 하지 말고. 클레이는 나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내 허리를 굽히고 입을 맞춰왔다. 좋아. 낮게 속삭이자 밀리안이 몸을 떨었다. 사소한 반응마저도 달콤했다. 클레이는 입을 맞춘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밀리안의 몸도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키가 비슷했기에 서서 키스하는 게 더 편했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얽혔다.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살짝 입술을 떼고 방향을 바꿔 다시 입을 맞추자 밀리안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다른 의도가 있건 말건, 그의 반응은 진짜였다. 하반신을 누르는 남성이 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걸 지어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살짝 입술을 떼어내고 그의 얼굴을 살피는데 웃음부터 나왔다. 제 얼굴에 묻었던 그의 사정액이 그에게 옮겨가 있었다. 고작 키스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됐는데, 분명 제 얼굴은 더 가관일 것이다. 클레이는 밀리안이 다시 정신 차리기 전에 다시 입을 맞추고 조금씩 뒤로 이동했다. 옷을 입은 상태로 욕조에 빠졌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금세 차오르는 따뜻한 물에 그도 그녀도 흠뻑 젖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밀리안이 계속 이렇게 군다면, 평생 이렇게, 단둘만의 세상에서 지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