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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밀리안이 지친 얼굴로 잠들었다. 클레이는 그런 밀리안의 몸 위로 시트를 끌어당겨 덮어준 뒤 침실을 나왔다. 조금 전까지 밀리안과 몸을 섞었음에도 그를 가졌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렇게 심장이 차가워지는 섹스는 처음이었다. 서재로 들어간 클레이는 바로 대니얼 크래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또 무슨 일인데.]
“수술 준비해.”
[무슨 수술?]
“정관 수술. 다시 이을 거야.”
[뭐? 이렇게 빨리? 아이를 갖기로 밀리안과 합의한 거야?]
아니, 그보다 결혼이 먼저 아니냐고 대니얼이 호들갑을 떨었다. 클레이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합의? 합의가 왜 필요하지? 결국 소리 내 웃자 그 웃음을 제멋대로 오해한 대니얼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축하를 한다.
[아주 난리를 떨더니 결국 잘됐네. 축하해. 수술날짜는 언제로 잡을까?]
“내일, 가장 빠른 시간으로.”
[……인간적으로 수술 같은 일정을 잡을 때는 제발 일주일 전에라도 먼저 알려주는 게 예의 아니냐?]
“내가 네게 예의를 차릴 이유가 있나?”
[내가 뭘 바라냐. 여덟 시까지 병원으로 와.]
전화를 끊은 뒤 클레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또 다른 핸드폰을 바라봤다. 밀리안의 것을 해킹한 복사 폰이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것조차 불안해하며 찾으러 오던 예전과 달리, 밀리안은 그녀가 사라지면 아주 바빠졌다. 그나마 오늘은 아예 정신을 놓게 만들어 놓았더니 중간에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랑한다고?
클레이는 그렇게 오래 기다려왔던 밀리안의 고백이 이렇게 아플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달콤하리라고만 생각했다. 너무 행복해서 그대로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의미로 심장이 멎을뻔했다. 어이없고 황당해서. 그만큼 최악의 고백이었다.
“그러게 왜 도망치려고 해.”
나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는데. 기다리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밀리안이었다. 그러니, 이후의 결과도 그의 책임이었다.
* * *
비서실은 밀리안이 넘겨주는 일을 숙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입사한 지 이제 겨우 일 년이 된 레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나마 오래된 맥시와 줄리아도 힘겨워했다. 밀리안이 일을 많이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얼마 떼어주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와, 괴물.”
사장만 괴물이 아니었다며 맥시가 투덜거렸다. 예전에 기세 좋게 밀리안에게 일을 나누자고 말했던 것이 민망해졌다. 늘 담담하게, 수월하게 일하길래 어느 정도는 그의 일을 커버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밀리안이 자신의 책임을 나눠주자 그때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을 정도였다.
“익숙해지면 그리 힘들지 않을 겁니다.”
사무실을 지나던 밀리안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의 자리에 서류 더미를 올려놓았다. 맥시는 질린 눈으로 서류를 보다가 밀리안을 살짝 째려봤다.
“언제 나와 있었어요?!”
“조금 전에요.”
“우리 인력 충원된다면서요? 그보다 두 배 이상은 더 늘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라고요.”
“저는 혼자 했던 일인데요. 지금만 좀 고생할 뿐이지, 숙달되면 저보다 잘할 겁니다.”
“……괴물은 자기가 괴물인지 모른다니까.”
“동감해요.”
말이 안 통한다며 고개를 내젓는 맥시의 말에 레이가 적극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를 표했고, 무뚝뚝한 줄리아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만 옅게 지을 뿐이었다.
한동안 투덜거리던 맥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뒤적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을 나누는 거예요?”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하긴. 이 정도 일을 혼자 하면서 사장님을 수행하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하네요.”
어쩐지 이상하긴 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느니 자신이 혼자 처리하는 걸 더 선호하던 밀리안이 뜬금없이 일을 나누는지 의아했는데, 사장의 지시라면 그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오늘은 샌드위치 말고 다른 메뉴로 가죠.”
“테이크아웃이 되는 메뉴가 별로 없어요.”
“그래도 다른 메뉴! 이제 샌드위치는 질렸다고요.”
식당에 가서 먹는 건 지금 그들에게 사치였다. 그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 하는 게 빠른 퇴근의 지름길이었다. 메뉴를 고민하면서도 눈은 일에 가 있었다. 말은 약한 척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밀리안은 조심스럽게 비서실을 지나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클레이의 빈 책상이었다. 밀리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자리로 걸어갔다. 책상의 검은색 표면은 마치 새것처럼 매끈했다. 그는 마치 클레이를 만지듯 애틋한 마음으로 그 표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클레이는 떠난 이후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볼 시간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아니, 차라리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더 낫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지금도 흔들리고 있는 결심이 완전히 흐지부지될 테니까.
일주일은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정리해야 하고, 그 이후엔…….
“…….”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 * *
일주일간의 유예는 이제 끝났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후임을 구해 완벽하게 인수인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맥시나 줄리아가 대신 맡는다면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정리는 해 놓은 상태였다.
밀리안은 목에 걸고 있던 가죽끈을 벗어 손으로 반지를 더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매끈한 테두리에 입술을 댔다. 절대 몸에서 떼지 말라던 클레이의 말이 귓가에 스쳤다.
‘나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더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갖는 게 맞았다. 물론 클레이라면 이런 것을 주느니 버리고 새로 맞춰주겠지만.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따끔거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제멋대로 그녀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면서 이게 무슨 이기적인 생각인지 모르겠다.
밀리안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내리누르고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반지를 올려두었다. 손에서 반지가 떨어지는 순간 다시 잡아채고 싶었다. 눈을 질끈 감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자 떨리는 몸이 조금 진정됐다. 밀리안은 브리프 케이스만 든 채로 침실을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갔다. 벤틀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밀리안에게 다가와 정장의 흐트러진 부분을 살짝 정리해주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몇 시에 귀가하십니까?”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늦을 수도 있으니 식사준비는 하지 마세요.”
“기다리는 건 제 일이죠. 언제 돌아와도 드실 수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
언제 돌아와도. 그렇게 말하는 벤틀로의 눈빛은 인자하기만 했다. 밀리안은 아랫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서 죄송해요.’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어 밀리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벤틀로가 그의 등을 손으로 밀어 곧게 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것은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죠.”
“―!”
“등을 숙이지 마세요. 고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당당하게 앞을 보십시오.”
당신은 그래야 하는 사람이라고, 벤틀로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리안은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벤틀로의 말대로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돌아봤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수없이 되새긴 사과는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흘러나오려 했다. 밀리안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늦었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든 밀리안 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네?”
열린 현관을 나서려는데, 벤틀로가 새삼스러운 말을 했다. 밀리안이 멈칫 서서 뒤돌아보자 벤틀로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두 분 다 일에 너무 몰두하셔서 걱정이 많습니다. 저를 너무 걱정시키지 마십시오.”
“이제 건강해진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원래 늙은이는 걱정이 많은 법이랍니다. 이런, 제가 너무 붙잡았군요.”
이상하게 오늘따라 말이 많아졌다며 벤틀로가 그를 배웅했다. 밀리안은 자신의 차에 타고 천천히 시동을 켰다. 클레이는 그가 조금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길 원했지만, 밀리안은 기어이 자신의 차를 고집했다. 그녀의 수행비서가 되어 거처를 이곳으로 옮긴 것만으로도 의심을 사기 쉬운데, 차까지 좋은 기종으로 바꾸면 그 의심은 더 심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거의 함께 출근했지만, 간혹 이렇게 따로 출근하기도 했기에 밀리안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클레이도 그의 말을 듣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득을 포기했다. 그래. 그녀는 수없이 많이 그에게 져줬다. 숨고 싶어 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강권하지 않았다. 비겁한 고집을 부리며 여자의 등 뒤에 숨어 속 편한 연애만 하는 주제에 모든 괴로움은 혼자 진 듯이 굴었다. 저택을 나와 얼마 이동하지도 못했는데 밀리안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야가 흐려져 더는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 * *
클레이는 복부에 붙어 있는 거즈를 벗겨냈다. 정확히 이전과 같은 부위를 절개했던 터라 거의 흔적만 남았던 자국은 다시 선명한 붉은색으로 짧은 선이 그어졌다. 이곳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던 밀리안의 빛나는 눈동자가 떠오른다.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던 자신의 목소리도.
짧은 행복이었다. 고작해야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끝나버린 애틋한 사랑은 이제 자신의 것만 남았다. 불안했던 예감은 빗겨나지 않았다.
그를 믿긴 했었나.
클레이는 제 생각에 조소했다. 밀리안을 탓할 게 없군. 난 단 한 번도 그를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 이날이 올지 전전긍긍하며 애를 태웠다. 그래서 그를 안고 또 안아도 갈급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다. 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결국엔 끝이 찾아왔다.
‘끝.’
누구 마음대로 끝을 내. 네가 끝낸다고 해도 나는 절대 널 놓아줄 생각이 없어, 밀리. 설사 네가 죽는다 해도 내가 끝을 내지 않는 이상 내게서 도망칠 수 없어.
“사장님, 움직였습니다.”
“그래.”
경호원의 말에 클레이는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 나는 네게 기회를 여러 번 줬어. 그 모든 기회를 발로 차버린 건 당신이야.
‘사랑해요, 클레이.’
다시금 떠오른 밀리안의 고백에 클레이는 차게 웃었다. 넌 그 말을 해선 안 됐어. 이제 너의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