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자신이 가고 난 뒤에 클레이의 일이 엉망으로 꼬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밀리안은 누가 제 일을 맡더라도 혼란이 가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일을 정리해두기 시작했다.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마음이 덜 무거울 것 같아 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은 많아졌다. 클레이를 보좌하고, 남는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업무를 정리하는 일에 투자했다. 비서실에 인원을 충원하기로 클레이와 합의를 본 상황이어서 그는 정리가 되는 순으로 줄리아와 맥시, 레이에게까지 일을 하나하나 넘겼다.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끌고 싶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몸을 언제까지 변명으로 일관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알아챌 것이다. 클레이는 상당히 눈이 예민한 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제 몸의 변화를 더 잘 파악했다. 몸이 더 변하기 전에 떠나야 한다.
하지만 클레이의 눈을 피해 떠날 준비를 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외부 일정으로 인해 떨어져 있을 때만 시간이 조금 났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는데, 클레이가 일주일가량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여상한 목소리로 스쳐 지나가듯 하는 말에 밀리안의 고개가 번뜩 올라갔다. 클레이가 그의 책상에 살짝 기대앉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개인적인 볼일. 아마 일주일은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그렇군요.”
미적거리고 있는 그의 등을 떠미는 것처럼 주어진 기회였다. 밀리안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같이 갈래?”
“아뇨, 저는 남아있겠습니다. 지금 자리를 비우기는 조금…….”
“하긴. 그건 그렇지.”
그의 대답에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허탈해 보이는 느낌에 밀리안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이제 곧 신규 인력이 충원되기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알아. 그냥 해본 말이니까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대답할지도 알고 있었다며 고요한 눈으로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묘한 시선이었다. 꼭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내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고개 숙이지 마. 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굴고 그래.”
“…….”
“지금도 일이 바빠서 허덕대는 당신을 더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날 걱정하는 당신의 배려를 내가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겠지. 밀리안은 순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클레이 역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는 게 점점 힘들어질 때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볼을 손으로 쓸었다.
“나 대신 회사를 부탁해.”
“……네.”
차마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밀리안은 고개를 아래로 떨군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당신을 떠나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이 결정이 정말 최선인지, 의심이 갔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이러다 클레이에게도 들릴까 두려울 정도로 큰소리를 내며 뛴다.
“밀리안.”
“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 없어?”
“……무슨.”
“그냥.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 말을 한 뒤 그녀는 그의 볼을 만지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밀리안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클레이는 여전히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다. 단 하나. 지금까지 가슴에 꾹꾹 누르고 눌러 담았던 한마디.
“클레이.”
“응?”
“사랑해요.”
“……뭐?”
“사랑하고 있어요.”
“…….”
밀리안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그대로 정지한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순간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클레이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밀리안의 입술을 만졌다. 워낙 체온이 높던 여자의 손은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졌다.
“한 번 더 말해 봐.”
“사랑합니다.”
“더 해줘.”
“사랑해요, 클레이.”
고작 단 한마디일 뿐인데, 온몸이 쥐어짜이는 기분이 든다. 밀리안은 눈을 꾹 감았다, 천천히 떴다. 그때까지도 클레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 고요히 흘렀다. 한참 뒤에야 클레이의 입술이 열렸다.
“이 말을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들으니 기분 좋다며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이상해. 꿈을 꾸는 것 같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키스해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술이 겹쳐졌다. 다시. 클레이의 속삭임에 밀리안이 살짝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평소처럼 달콤하고, 다시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픈 입맞춤이었다.
* * *
쓸데없는 말을 했다. 사랑한다고 말한 이후, 클레이가 더없이 다정해서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떠날 마음을 먹고 있는 자신을 탓하듯 달리 클레이는 묻고 또 물었다.
“날 사랑해?”
“……네.”
“대답이 늦어서 의심스러운데?”
“정말, 사랑해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묻는 말조차도 가슴이 뜨끔해 허겁지겁 대답했다. 밀리안이 당황하자 클레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른하고 부드러운 웃음소리인데 찔리는 게 많아서인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때 그의 가슴에 여자의 손이 맞닿았다.
“심장이 크게 뛰고 있어.”
“―!”
“그렇게 부끄러워?”
클레이가 신기하다는 듯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심장 소리를 듣는 시간이 길어지자 밀리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가볍게 댄 손이 마치 심장을 꽉 잡아챈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가슴을 보던 클레이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얼굴이 붉어.”
“그, 손을…….”
“고작 이 정도로 얼굴을 붉히면 어떡해?”
이미 자신과 더한 것도 했으면서 왜 여전히 순진하게 구냐며 짓궂은 얼굴로 타박한다. 그런 게 아니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겁에 질려서였지만, 밀리안은 여자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밀리안, 당신은 조금 더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있어.”
“네?”
“얼굴에서 다 티가 나.”
“……무슨.”
설마. 밀리안이 제 손으로 얼굴을 더듬을 때였다. 클레이가 그의 귓가에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밀리.”
“읏.”
“거봐. 더 빨개졌잖아.”
“아…….”
그 말이었구나. 여자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눈치를 살피게 된다.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럼 계속 여자를 기만하고, 속이는 기분이 덜할 텐데…….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수록 가슴에 단단한 무언가가 계속 쌓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아름답게 웃는 여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밀리안은 절박하다 싶을 정도로 클레이에게 달라붙었다. 그녀는 움찔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손을 꽉 쥐고 밀리안의 입맞춤을 받았다. 제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온 축축하고 미끄러운 혀를 느긋하게 빨고 있는데, 치마 안으로 들어와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에 클레이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작은 속옷을 조심스럽게 스치는 손에 클레이는 다리를 더 넓게 벌려주었다.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는 것처럼. 환영하면 환영했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었다. 비록 밀리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더라도.
가장 예민한 성기가 만져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인데, 밀리안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혀를 살짝 깨물고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신음을 쏟아냈다.
“아, 조금 더 안쪽으로……. 응, 거기. 좋아.”
“흐읏, 하…….”
속옷 위로 볼록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던 손이 젖은 천을 젖히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클레이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클레이는 신음을 참을 생각조차 없다는 듯 밀리안이 그녀를 만지는 대로 뱉어냈다. 그녀의 반응에 용기를 얻은 것처럼 남자의 손가락이 질 안쪽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살짝 주저하는 듯싶더니 클레이가 질을 꽉 조이자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살짝 발기한 관에 닿았다. 클레이의 몸이 크게 튀었다.
“아, 아아, 좋아, 거기 더. 더 만져줘, 밀리.”
“클레이……. 너무 야해요.”
남자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그녀의 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클레이는 힐을 신은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려 밀리안의 중심부를 꾹 눌렀다. 이번에는 밀리안의 몸이 튀었다. 그 탓에 안으로 들어왔던 그의 손가락이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으읏, 아, 아흣, 그, 그만, 헉!”
“당신이 더 야해.”
클레이는 예쁘게 우는 밀리안을 핥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리를 모아 그가 보는 앞에서 스트립을 하듯 야릇하게 속옷을 내렸다. 밀리안은 마치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그녀가 하는 행동을 멍하게 쳐다봤다. 그녀의 속옷이 허벅지를 타고 무릎으로 내려왔다. 클레이는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 속옷을 벗었다. 당연히 들어 올린 다리 아래로 축축하게 젖은 음부가 밀리안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무릎으로 선 밀리안의 하체는 마치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단단하게 발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허리까지 올라간 짧은 치마와 가터벨트, 그리고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온 검은색 스타킹과 붉은색 하이힐과 다리 사이로 적나라하게 보이는 여자의 붉은 음부뿐이었다. 밀리안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클레이는 나붓한 손끝으로 밀리안의 턱을 살며시 쓸었다.
“빨아줄래?”
“―!”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나오는 물을 다 핥아줘.”
클레이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흐읏.”
밀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극이 너무 심했다. 그대로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며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정말, 누가 야하다는 건지.”
클레이는 밀리안이 끝까지 갈 때까지 그의 절정을 감상했다. 밀리안은 너무 느끼면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눈물의 양이 많았다. 꼭 울고 싶었던 것처럼. 슬픈 일을 앞둔 사람처럼 그런 눈물이었다.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오르는데도 남자의 우는 모습은 너무나 안쓰러워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젖어버린 밀리안의 볼을 손으로 쓸었다. 그녀의 손이 눈가를 스치자 밀리안은 눈을 꾹 감았다. 눈동자에 맺혔던 물방울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내려왔다.
“위하고 아래하고 다 젖었네.”
“당신이, 흑, 너무 예뻐서…….”
“네가 더 예쁘다니까.”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리자 밀리안이 눈을 찌푸렸다. 야한 얼굴로 눈물을 잔뜩 흘리고 있는 모습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정하게 토닥이고 싶고, 또 더 울리고 싶은 모습. 저 모습을 계속 보다가는 정말 그를 망가트릴 것 같아서 클레이는 욕망을 택했다. 그녀는 밀리안의 눈앞에서 다리를 벌렸다.
“나도 가게 해줘.”
“…….”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의 머리를 자신의 하체로 이끌었다. 밀리안은 순종적으로 그 손길을 따라 클레이의 가장 은밀한 장소로 머리를 숙였다. 여성의 성기는 붉고, 축축했다. 지난번에도 이곳을 빨았었지만, 이렇게 밝은 빛이 없어서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밀리안은 다시 성기가 발기하는 것을 느끼고 애끓는 신음을 흘렸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자 살짝 비릿하면서 야한, 묘한 맛이 느껴졌다. 클레이의 페로몬이 응축된 것 같은 맛이었다. 밀리안은 그 순간 참지 못하고 클레이의 음부에 깊게 빨았다.
“흣!”
클레이의 신음은, 그녀의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은 너무 달콤했고,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은 쾌락을 동반했다. 밀리안은 성기를 배꼽까지 세운 채 여자의 아래를 빨았다. 여자를 애무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인데, 정작 절정에 오를 것 같은 사람은 그였다. 성기에서 짙은 액체가 줄줄 흘러나와 배와 시트를 적시고 있었고, 몽롱하게 흐려진 눈에선 쾌감에 젖은 눈물이 흘렀다.
그다음은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는 절정에 울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독처럼 강렬하고 달콤한 클레이의 페로몬에 흠뻑 젖어 허우적대는 그와 달리, 몰아치듯 그를 헤집는 클레이의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