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95화 (9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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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고민했을 때는 그렇게 감정이 이리저리 요동치더니, 클레이에게 확인을 받자 오히려 담담해졌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물어줘서 다행이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정제되지 않은 감정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서.

밀리안은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안에 클레이와 자신의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간간이 입덧처럼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이전처럼 속을 모두 게워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락가락하던 기분이 잠잠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식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임신했다는 것을 알리듯 간혹 복통이 오기도 하고 이전보다 더 부푼 유두가 아릴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의 변화는 확연했다.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에 대한 클레이의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는 자신이 결정할 때였다.

낙태는 할 수 없다. 감히, 어떻게 자신이 클레이와 자신의 결실을 지울 수 있을까. 농담으로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신기했다. 임신한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피하고 싶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정작 임신을 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가 소중해졌다. 그러니…….

‘떠나야겠지.’

극단적인 결정이었지만,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억지로 받아들여 달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클레이의 곁에 남고 싶지 않았다. 밀리안은 잠들어 있는 클레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늘 그렇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 자신과 나눠 가진 반지를 끼고, 비굴한 자신과 달리 냉혹한 세상 앞에서 당당히 맞서고 있는 여자.

그녀가 그녀와 어울리는 남자와 오붓하게 서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매일 고통스럽게 상상하던 모습이었다. 이렇게 비겁하고, 비굴한 자신과 달리 자존감이 높은 남자가 클레이에게 어울렸다. 이제 자신은 퇴장할 시간이었다.

마치 이날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클레이의 저택에 있는 동안 돈은 넉넉하게 모였다. 연봉은 이전과 달리 엄청나게 올랐고, 약값이나 집세로 나갈 일도 없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한 덕에 아이를 낳고 혼자 기르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밀리안은 이런 계산이나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돈은 현실과 가장 직결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클레이와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떨쳐내기 전까지 어떻게든 달라붙어 있을 작정이었는데, 자신이 먼저 헤어짐을 생각하게 될 줄이야. 아니, 언제는 자신의 계획대로 뭔가가 진행된 적이나 있었던가. 클레이와 이런 관계가 된 것부터, 그녀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 그로 인해 헤어짐을 결심하게 된 것까지. 모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피하고 싶고, 두렵고, 무서웠던……, 오메가로서의 모든 행위를 다 한 셈이었다. 클레이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은 비참하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은 거짓이 없었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사실 아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에 그럴싸한 핑계를 덧붙인 것뿐이다. 비겁하게 클레이의 결정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배제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버려지기 전에 먼저 그녀를 버리려는 거였다. 끔찍한 자기 혐오가 그를 휩쓸었다. 어떻게 이렇게 비겁할 수 있을까. 가장 혐오스러운 점은 자신은 결정을 철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 * *

오해를 풀어서일까. 밀리안은 한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클레이는 불현듯 자신 혼자만 둘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밀리안이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고, 이렇게 마음을 열어준 것만 해도 어디냐며 욕심을 내리눌러왔었지만, 그녀도 다스릴 수 없는 욕심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아이를 가지는 게 싫은 걸까. 밀리안이 스스로 오메가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하듯 주입된 사상은 이 얼마간의 기간으로 완전히 씻어버릴 수는 없으리라.

클레이는 밀리안의 어릴 때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 이렇게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던 아이가 생전 웃어본 적이 없다는 듯 무표정한 남자로 성장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했다. 그의 부모는 기가 막힐 정도로 더러운 인성을 지녔기 때문에.

클레이는 앨범을 뒤로 넘겨 다른 사진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 동안 닳듯이 본 사진인데,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하지. 만약 어릴 때 만났더라면, 밀리안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배가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만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시작이 썩 좋지 않았지만, 그때보다는 나았으리라.

어릴 때의 자신은 밀리안과는 반대로 애정에 메말라 있었다. 애정을 줄 상대를 찾지 못해서 저택에 몰래 숨어든 고양이에게 집착했을 정도였으니, 그때 밀리안을 만났더라면 정상적인 연애는커녕 집념으로 점철된 일방적인 애정을 퍼부었겠지. 그럼 이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도 금방 시들어버렸을 것이다.

클레이는 쓰게 웃었다. 그의 부모를 비난하고 복수를 하니 어쩌니 했지만, 자신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앨범을 덮고 금고에 집어넣었다. 근래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밀리안이 잠든 후 이렇게 나와서 그의 사진을 보곤 했다. 그럼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진다. 혹시라도 애꿎은 남자에게 허튼 행동을 할까 두려워 답지 않은 도피를 하고 있었다.

밀리안과의 관계도 안정적이고, 나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걸까. 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심은 누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 것으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리라.

‘그럼 대체 이유가 뭐지?’

그는 자신의 품에 갇혀있는데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이 아슬아슬한 불안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아니다. 차라리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밀리안을 안고 자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클레이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내밀다 움찔 굳었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석연찮은 기분이 든다. 당연하겠지만, 이 시간에 연락이 오는 거라면 썩 좋은 일이 아니리라.

잠시 주저하다 이내 핸드폰 화면을 연 클레이의 안색이 굳어졌다.

“뭐야, 이게…….”

* * *

밀리안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크림 스튜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걸 억지로 내리눌렀다. 먹는 양을 조절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욕심껏 먹는다면 몸은 더 빨리 변할 거고, 그럼 매일 그의 몸을 살피는 클레이의 의심을 피하지 못할 테니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클레이의 곁에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 그의 발버둥이었다.

식사 시중을 들던 벤틀로가 사뭇 걱정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요즘 식사량이 다시 줄었군요.”

“네? 아…….”

“일부러 적게 드시려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죠. 이게 원래 제 양이었는걸요.”

“흠.”

허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밀리안은 물을 마시며 식욕을 억눌렀다. 며칠간 이렇게 조절하니 살짝 불어났던 살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컵을 식탁에 내려놓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벤틀로도, 조용히 식사하고 있던 클레이의 시선도 밀리안에게 향했다. 밀리안은 어색한 얼굴로 클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밀리. 허튼 소리하지 말고 더 먹어.”

“아뇨. 정말 배가 불러서,”

변명하기 무섭게 다시 배에서 소리가 났다. 입을 꾹 다무는 밀리안을 지그시 바라보던 클레이는 그를 설득하지 않은 채 벤틀로를 향해 음식을 더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 배가 찼습니다.”

“왜 자꾸 거짓말을 해. 더 먹고 싶잖아.”

“거짓말이,”

이번에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밀리안은 순간 내장이 꼬이는 듯한 복통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배를 손으로 부여잡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이는 어느새 옆자리로 옮겨 와 그의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는 평소보다 느린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난 네가 배가 나와도 좋고, 말라도 좋아. 혹시라도 체중 조절을 하려고 그러는 거라면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할 필요 없어.”

“저는…….”

“점심도 걸렀다며. 건강을 챙기라고 했더니 왜 몸을 더 혹사하고 있어?”

클레이는 잠시 그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녀는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다. 일정이 휘몰아치듯 바빠도 짓지 않던 지친 얼굴에 밀리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서실에 사람을 더 뽑는 게 좋겠어. 당신에게 너무 무리를 시키는 것 같아.”

“그건, ……아니,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일단 더 먹어.”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평소와 달리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밀리안은 그런 여자에게 고집을 부려 더 피곤하게 만드느니 말을 듣는 쪽을 택했다.

억지로 눌렀던 식욕은 입 안에 들어온 음식물을 격렬하게 환영했다. 이 비정상적인 식욕이 새삼스레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배가 부르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밀리안은 벤틀로가 새로 내온 음식까지 남김없이 해치웠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식탁 위의 음식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밀리안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클레이가 그의 입술에 묻은 스튜를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거봐.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서요.”

“더 쪄야지. 날 안아주기로 했잖아.”

안아주기로……. 그 말이 뜻하는 바가 섹스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은 밀리안은 크흠, 헛기침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도 안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나중에 안아줘.”

나중에. 그럴 수 있을까. 밀리안은 씁쓸해지는 기분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 밀리안을 클레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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