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93화 (93/144)

-93-

아니. 임신이 아닐 수도 있다. 키트의 설명서에도 정확한 진단은 병원에서 받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캐롤도 그렇게 말했다. 가장 정확한 것은 병원에서의 진단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닥터 크래포드에게도 받을 수 없었고, 다른 병원이라면 더더욱 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바로 관리 당국에 소환되어 오메가로 명명될 테니까.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이 배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있을 것이다. 밀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본능은 임신이 맞다고 외치고 있었다. 캐롤이 말했던 몸의 변화나 신경성이라고 생각했던 구토와 과식, 이상하리만큼 잦았던 복부의 통증까지 모두 임신으로 인한 증상과 같다.

임신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클레이는 분명 정관수술을 했다. 대니얼의 증언도, 그녀의 몸에 남은 수술 흔적도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간혹 정관수술 후에도 남아있는 정자로 인해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자신이 다른 알파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으니 가능성은 그것뿐이리라.

가급적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던 밀리안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책임을 떠넘기지도 못한다. 클레이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배려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했던 터라 클레이를 원망한다는 것 자체가 비열한 행위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하는 걸까?

너무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클레이는 아이의 존재를 선뜻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반지를 먼저 준비했던 만큼, 결혼을 하자고 할 수도 있다. 지금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의 감정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이 아이로 인해 그녀와의 관계가 더 공고해질지도 모른다. 아이까지 있으면 자신에 대한 감정이 식어도 쉽게 버리지 못할 테니까.

“미친.”

밀리안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어이없는 생각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를 빌미로 클레이의 발목을 잡을 생각을 하다니.

아이는 현실이었다. 운이 좋아 결혼까지 간다 하더라도, 이혼도 쉬웠다. 그렇게 되면 클레이와 헤어지는 것은 물론, 아이까지 빼앗길지 모른다. 클레이 디어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고, 그녀가 사람을 내칠 때 얼마나 잔인하게 구는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봤다. 아마 벤틀로 역시 마찬가지겠지. 벤틀로에게 최우선은 클레이의 의사니까.

정말 아무도 없구나. 밀리안은 새삼스럽게 제가 온전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했다. 그가 의지하던 따뜻한 관계가 모두 클레이 디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면, 그녀만 잃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 어설프게 섞여서 외톨이처럼 살아가던 자신을 간신히 버티고 설 수 있게 해주었던 모든 사람을 잃는 것이었다. 아니, 사람뿐만이 아니다. 모든 세상을 잃는 것이었다.

‘헤어진다면…….’

밀리안은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흘렸다. 가정은 옳지 않다. 그것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미래였다. 그는 양팔을 교차해 배를 감싸 안았다. 차라리 임신을 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모두를 잃어도 하나는 남는 거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맞지 않을까? 임신한 사실을 들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그 따뜻했던 곳에서 자신만 튕겨 나오는 상상을 하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 * *

간신히 표정을 정돈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서류를 결재하고 있던 클레이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혀를 찼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화장실에 잠깐…….”

“화장실? 아, 미안.”

밀리안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자 클레이가 작게 웃으며 사과했다. 생리현상까지 참견하는 정신 나간 여자가 될 뻔했다. 클레이는 과거에 자신이 밀리안에게 했던 짓들을 까맣게 잊고 뻔뻔스럽게 자기반성을 했다. 그녀는 다시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하며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은? 오늘도 그냥 넘긴 건 아니지?”

“먹었어요.”

“그래? 뭐 먹었는데?”

“샌드, 아.”

클레이가 굳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던 밀리안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또?”

“으음. 자리를 비울 시간이 없어서요.”

“그래도 잘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 내가 없을 때마다 계속 그렇게 먹으니까 안심이 안 돼.”

“사장님. 샌드위치는 영양소가 풍부한,”

“아, 그래? 그럼 나도 샌드위치로 해결하면 되겠군.”

“―!”

밀리안이 입을 뻐끔대며 말을 잃자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왜? 영양소가 풍부하다며? 그 좋은 음식 나도 먹어야지.”

“그건 좀…….”

자신이 먹는 건 상관없어도, 클레이가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때우는 건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런 밀리안을 향해 클레이가 혀를 내찼다.

“거봐. 당신도 싫잖아. 나도 당신이 샌드위치 따위로 식사를 넘기는 게 싫어.”

“잘, 챙겨 먹겠습니다.”

“그래야지.”

여자가 눈매를 접고 사르르 웃었다. 밀리안은 홀린 것처럼 그녀를 따라 웃었다. 예쁘다. 너무, 너무 예뻐서 가슴이 시렸다. 저 사람과 헤어질 수 있을까? 저렇게 사랑스럽게 웃는 여자와 떨어져 혼자 살 수 있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혼자가 당연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것임을 깨달아버려서.

밀리안은 다시 고개를 내려 서류를 보고 있는 클레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은 아무런 티가 나지 않는 배를 가만히 손으로 만졌다. 이 아이를 클레이와 함께 평생 키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왜 나는 이다지도 용기가 없을까. 비겁하고, 겁이 많고, 한없이 부정적이기만 한 성격을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혼자 제멋대로 상상하며 좌절할 바에는 차라리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밀리안은 서류를 모두 처리하고 이제는 모니터를 보고 있는 클레이를 설핏 바라봤다.

‘아이를, 원하세요?’

당신과 내 아이를. 그렇게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번 말해버리면, 되돌릴 수가 없어서 섣불리 물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봤다. 전원을 켜지 않은 모니터는 마치 그의 머릿속처럼 새까맣다.

‘그래도, 너무 앞서서 생각하지 말자.’

그게 밀리안이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클레이의 생각을 모두 배제한 채 도망치려고만 하는 본능을 조금이라도 멈춰 세워야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최대한 냉정하게…….

하지만 한번 버림받았었던 충격이 너무 크게 남아서 그를 감싸고 있는 보호 본능은 계속 그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어 했다. 정신없이 요동치는 감정은 한없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가, 돌연 끝도 없을 정도로 아득한 절망을 헤맸다. 한 가지의 감정이 일정한 시간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밀리안이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감각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서 멈출 수 있게 해준 단 한 사람. 그것은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클레이 디어의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저 여자에게서 도망쳐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줬다.

밀리안은 가슴 언저리에서 살짝 흔들리는 반지의 감촉을 가만히 느꼈다. 기쁘기만 하던 반지의 존재는 또 하나의 의문과 불안을 낳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이걸 주었던 클레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을 비난하고 또 비난했다. 자신이 클레이의 곁에 설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 * *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였지만, 게빈 스튜어트는 넘어가지 않았다. 클레이 디어가 반지를 꼈다. 제 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오만하게 굴던 재수 없는 여자가 스스로 목줄을 매달았다는 사실이 통쾌하고 웃겨서, 그걸 축하하기 위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클레이 디어의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게빈을 보는 클레이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밀리안, 넌 나가 있어.”

“어딜 나가? 내 선물의 주인공이 바로 디모시인데.”

게빈은 과할 정도로 풍성한 꽃다발을 밀리안에게 내밀었다. 향이 강한 꽃으로만 모아 만든 꽃다발은 겉보기로는 아름다웠지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독했다. 밀리안은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들고 클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게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재수 없는 여자와 연애하는 기분이 어때?”

“―!”

“뭐? 비서는 안 건드린다고? 웃기고 있네.”

이미 지난번에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두 사람 사이가 그냥 일반적인 사장과 비서의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부러 밀리안을 건들 때마다 클레이가 과할 정도로 크게 반응하던 것도 그렇고, 섹스를 한 남녀 사이에 흘리는 미묘한 흐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얼마나 이어지나 두고 봤는데, 대략 육 개월을 스캔들 하나 없이 지내더니 결국 반지까지 꼈다. 게빈은 밀리안의 손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기는 안 꼈네? 클레이 디어만 끼게 하다니 더 대단한데?”

게빈이 과장되게 감탄하며 손을 맞부딪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사장님과…….”

“됐어. 이미 다 들켰다는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빈 스튜어트는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혀를 찼다. 밀리안이 입술을 꾹 깨무는 것까지 지켜본 클레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밀리안은 그만 괴롭히고 앉기나 해.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당연하지.”

게빈이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클레이는 밀리안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강경한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은 까맣게 죽은 얼굴로 꽃다발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사무실을 나갔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가 게빈의 앞자리에 앉았다.

“뭘 원하는데?”

“하. 이렇게 순순히? 그렇게 밀리안 디모시에게 빠졌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끌지 마.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야, 난.”

한기가 흐르는 냉담한 목소리에 게빈이 큰소리로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클레이의 앞으로 밀었다.

“신규 리조트 사업권, 우리하고 반 나누지?”

“…….”

클레이는 대답을 보류한 채 게빈이 가져온 서류를 훑었다. 게빈은 클레이가 서류를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다 그녀가 펜을 가져와 사인을 하는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뭐가 이렇게 쉬워?”

“시간을 끄는 게 더 귀찮아.”

고작 심증만으로 이렇게 좋은 먹이를 소비할 여자가 아니었다. 게빈 스튜어트는. 클레이의 말에 게빈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클레이의 말에 웃음소리가 바로 잦아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상식적인 사업안을 가지고 왔거든. 안 그래도 조만간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나타나 줘서 고마워.”

“뭐?”

이번에는 클레이가 웃었다. 그 여유로운 얼굴에 게빈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어차피 호텔은 우리가 직접 지을 생각이 없었어. 우린 리조트의 카지노를 비롯한 상권을 잡고, 숙박은 아예 다른 호텔 쪽과 연계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협상안을 먼저 제시해주니 고마울 수밖에.”

“…….”

“뭐, 서로에게 이득인 셈인가?”

게빈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며 클레이가 화사하게 웃었다. 게다가 사업을 연계해서 하게 되면 게빈은 비밀을 지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다. 괜한 스캔들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그러니 클레이로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게빈이 나타나 제멋대로 지껄인 이후 밀리안이 지었던 표정이었다. 간신히 다스렸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그럼 조만간 사업팀 간에 미팅을 잡기로 하고, 이만 꺼져.”

“변했네? 예전의 너였다면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을 텐데.”

한 남자에게 종속되는 삶이 뭐가 그렇게 좋냐며 게빈이 혀를 찼다. 먼저 몸을 일으킨 클레이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봤다.

“넌 이런 감정을 평생 모르겠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래. 계속 그렇게 살도록 해.”

딱 너와 어울린다며 클레이가 조소했다. 이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 상대의 표정, 행동 하나하나에 들뜨기도 하고, 바닥에 처박히기도 한다. 스스로가 결코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감정. 하지만 아예 몰랐으면 몰라도, 이미 안 이상 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클레이를 바라보던 게빈이 흥이 식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시한 여자가 됐어.”

“충고하는데, 넌 사랑 따위 하지 마.”

맹세컨대, 넌 나보다 더 시시한 여자가 될 테니까. 클레이의 말에 게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애를 해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글쎄.”

“흥!”

묘하게 웃는 얼굴에 왠지 모르게 빈정이 상했다. 고작 남자 하나에 연연하는 주제에 충고는 무슨. 게빈은 코웃음을 치며 클레이의 말을 흘려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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