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92화 (9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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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클레이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였다. 밀리안은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자신이 한 생각을 들킨 것만 같은 불안감에 여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계단의 손잡이를 강하게 잡고 제 마음을 다스리는데, 클레이가 나온 방에서 에릭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에릭이 아니었어.’

남자는 체격이 매우 컸고, 외관이 무척 뛰어났다. 첫인상만으로도 자신과 달리 당당함이 보였다. 남자는 클레이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였다. 잠시 후 클레이가 웃었다.

웃었다.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고 아름답게.

“…….”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까지 상상만 했었다. 그녀의 곁에, 그녀와 어울리는 아름답고 당당한 남자가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마치 그 상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밀리안은 조금 전과 달리 발소리를 크게 내어 계단을 내려갔다.

드디어 클레이가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마치. 마치……, 들켜선 안 될 모습을 그에게 들킨 것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서. 아니다. 속단하지 마. 클레이는 나를 사랑해. 다른 남자와 밀애를 할 리가 없다. 그의 시선이 클레이의 손에 끼어 있는 반지를 찾아 헤맸다. 안도의 숨이 토해졌다. 클레이가 반지를 끼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그냥, 당신이, 없어서…….”

어렵게 뱉어낸 말에 클레이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때 밀리안은 사람을 죽이고 싶은 감정이 이렇게 폭력적인 기분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가져오죠.”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하하. 남자는 클레이의 차가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웃었다. 웃고 있는 남자의 눈은 자신에게 맞춰져 있었다.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듯한 모멸감에 밀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남자는 그런 의도가 없을지도 모른다. 클레이에게 격이 맞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이 멋대로 이 감정을 만들어낸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밀리안은 저 남자를 클레이의 곁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하지만 그럴 권리가 그에게 없었다.

남자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밀리안은 마주 인사할 수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비참하고 비굴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클레이가 다가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에 있지, 왜 나와 있었어?”

“……클레이.”

“설마 오해하는 건 아니지?”

잠시 일을 한 것뿐이라며 여자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한다면 그런 거겠죠. 다만, 내게 말을 할 수 없는 ‘일’을 대체 언제까지 할 건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자신이 잠든 사이에 홀로 나가 다른 남자를 만나야 하는지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대신 밀리안은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클레이가 안도한 얼굴로 웃어서,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질투해줘. 난 당신이 질투하는 게 좋아.”

“…….”

내가 질투하는 모든 걸 당신에게 다 말하면 당신은 내게 질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밀리안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여자는 만족한 얼굴로 그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이상했다. 예전이었다면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을 애정표현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밀리안은 클레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다시 배가 아팠다. 그리고 머리도 아팠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데 난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당신의 곁에 있는 게 행복하고 무서워서 너무 괴로워. 그래서일까. 이 감정을 모를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다.

* * *

몸에 군살이 잡혔다. 아직 외관상으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미묘하게 살이 잡혔다. 그리고 클레이가 커졌다는 유두는 이제 그도 알 정도로 부피가 커졌다. 클레이는 좋아했지만, 밀리안은 제 몸을 그녀에게 보이는 게 점점 부끄러워졌다.

‘살이 찌고 있는 건가.’

근래 일이 바빠져서 운동할 시간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 식사량은 늘었는데, 그걸 소비할 운동량은 현저히 줄었으니 살이 쪄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규칙적인 식사도 아니었다. 어느 때엔 속이 메슥거려 그대로 굶기도 했고, 어느 때엔 폭식하기도 했다. 밀리안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옆구리를 잡았다. 역시. 이전보다 살집이 두텁게 잡혔다.

“하아.”

일단 운동을 할 여유는 되지 않으니 식사량을 줄여야 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계속 허기가 져서 식사량이 점점 더 늘었다. 정신을 차리면 이미 제 몫의 음식은 전부 먹은 뒤였다. 특히 클레이와 함께 있으면 폭식의 수준이 더 심각했다. 밀리안은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쳤다. 정신 차리자. 이러다 닥터 크래포드처럼 살이 찔지도 모른다.

밀리안은 잠시 제 몸이 대니얼 수준으로 부푸는 걸 상상했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건강상의 문제 수준이 아니었다. 그 정도가 되면 감히 클레이 앞에서 몸을 드러내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도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

클레이가 공공연히 반지를 끼고 다니게 된 날 이후, 파파라치가 늘었다.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클레이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연인으로 추정되는 상대가 보이지 않아 그냥 장신구 용도로 끼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아무나 갖다 붙여서 이 남자가 연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 일반인들조차도 항상 곁에 있는 자신은 그 대상에 끼워 넣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도 자신이 클레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왠지 기운이 쭉 빠졌다. 아무도 그를 그녀에게 대보지조차 않는다는 점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를 보는 사람마다 대체 사장님의 애인이 누구냐며 묻는 사람이 줄었다는 것이었다. 다만, 하필 저런 여자와 엮였냐며 동정했다. 그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곤란해졌다. 그들의 동정 속에는 조만간 버림받을 남자를 향한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읏”

다시 배에 통증이 왔다. 이번에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통증이 심해서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 밀리안은 세면대의 테두리를 붙잡아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눈앞이 하얗게 번지는 통증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읏, 으으…….”

고통에 저도 모르게 나오는 신음 흘러나왔다. 밀리안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이 와중에도 클레이가 알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는 자신을 회사에 나오지도 못하게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어느 순간 그녀가 마음이 식을지 모르는데. 특히나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클레이가 다른 남자에게 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날이 갈수록 클레이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갔고, 그와 비례하여 두려움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도망치고 싶어.’

그래, 도망치고 싶었다. 이 미친 것 같은 감정에서. 이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여자에게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사랑에서.

통증은 다행히 짧게 지나갔다. 여느 때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그래도 또 언제 다시 아플지도 몰라, 밀리안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의무실에 들렸다. 보건의 캐롤은 효과가 빠른 진통제라며 그에게 캡슐 두 개와 물 한 컵을 건넸다.

“오랜만에 들리네요. 물론 여기에 오지 않을수록 좋은 거지만요.”

“그러게요.”

밀리안은 어설프게 웃으며 약을 먹으려다 멈칫했다. 왠지 약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캐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캐롤. 배가 갑자기 아팠다가 나아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음식이 비려서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가 또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과식을 하기도 하는 건……, 무슨 증상일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요?”

캐롤은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들은 것으로 추측하면 위염이나 장염 증상일 수도 있는데, 갑자기 과식을 한다는 게 좀 걸리네요.”

“어떤…….”

“비슷한 증상이 따로 있는데, 이건 밀리안에게는 해당이 될 리가 없어서 애매……. 아, 밀리안 애인 있다고 했죠?”

“어떻게, 아십니까?”

“이미 소문 한번 돌아서요. 몰랐겠지만, 밀리안은 꽤 유명하거든요.”

사장의 최측근에, 금욕적이면서 왠지 울리고 싶은, 그러면서도 보호 본능을 끌어내는 묘한 매력이 있는 남자. 미혼의 여성이라면 한 번쯤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물 건너간 먹잇감이었다. 애인이 있는 것도 부족해, 그 애인이 임신까지 했으니 다른 여자가 파고들 틈이 꽉 막혔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의아한 것은, 밀리안의 애인이 그렇게 확연한 증상이 나타났음에도 모를 정도로 순진한 여자라는 점이었다. 이 남자는 연하보다 연상의, 다소 적극적인 여자가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의 애인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거긴 했지만, 보이는 것으로 봐선 그렇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본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애인의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의뭉스럽긴. 캐롤은 답지 않은 밀리안의 행동에 속으로 살짝 웃었다.

“혹시 애인 분의 체형 변화 같은 건 없나요? 혹, 유두 색이 진해지고, 크기가 커졌다거나.”

“맞, 아요.”

애인이 아니라 그의 증상이었지만, 밀리안은 캐롤의 말에 가만히 긍정했다. 캐롤이 말하는 체형의 변화가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게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 연관이 있는 거였나. 모두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밀리안의 대답에 캐롤은 어깨를 들어 올리며 잠시 말을 아꼈다. 그러다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요. 애인이 임신한 것 같네요. 정확한 진단은 산부인과에서 받으세요.”

“……임신, 이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밀리안은 멍한 얼굴로 눈을 연신 깜박였다. 캐롤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아니면 너무 좋아서 그런가? 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니까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이면 안 돼요. 아, 키트 하나 줄게요. 사용법은 적혀 있으니까 그대로 하면 돼요.”

캐롤은 회색 캐비넷을 열어 작은 상자를 그에게 건넸다. 임신 진단 테스트기. 밀리안은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캐롤이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애인도 몰랐나 봐요. 이 정도로 증상이 뚜렷하면 대부분 눈치채는데.”

“피임을, 잊은 적이 없어서…….”

“완벽한 피임법은 없어요. 아예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아닌 이상에는요.”

“혹시, 임신이 아니라면 혹시 다른 병일 가능성도 있나요?”

“상상 임신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게 좋겠죠. 저는 말만 듣고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가 없거든요.”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캐롤이 손을 내저었다. 밀리안은 아쉬운 얼굴로 재킷 안쪽 주머니에 진단기를 집어넣었다.

임신. 임신, 이라고? 그게 말이 되나? 아닐 것이다. 그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생긴 증상일 텐데, 캐롤이 잘못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뭔가 불안했다.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밀리안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

두 줄.

작은 회색화면에 선명한 두 개의 선이 그어졌다. 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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