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책이 너무 많아서 못 찾은 거 아니고? 그리고 찾을 필요 있어? 어차피 다 버리고 갈 건데, 앨범 하나 못 찾는다고 뭐가 어떻다고 그래.”
“……그렇긴 하지만.”
“쓸데없는 거 찾느라 고생하지 말고 빨리 씻고 나와. 몸에 먼지가 가득해.”
“…….”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뭔가 석연찮았지만, 어차피 다 버리고 갈 거라면 굳이 찾아서 태울 필요가 없었다. 여자는 욕실로 들어가다 남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혹시, 우리 출국하는 날짜 조금 앞당길 수 있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어차피 가야 하는 거 빨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어떻게든 출국날짜를 미루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하지만 그건 안 돼. 괜히 일찍 가면 고생만 더 하지.”
“그, 그렇죠.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어요.”
그래,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자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초조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였다.
‘어떡하지? 이러다가 시체 사진까지 보내면…….’
아 세상에,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차라리 의뢰하지 말 걸 그랬다.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게 아닐까? 어차피 연도 끊었고, 다시 볼 일이 없는데 뭐 하러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엔젤라 디모시는 양손을 교차해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너무 무섭고 초조해서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는 아이가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제게 나타나 원한 어린 눈으로 노려보기도 했고, 하루는 경찰이 자신을 찾아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고 괴로웠다. 아이만 죽으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아서 그랬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고 완벽해질 것 같아서.
‘그런데 왜 더 괴롭기만 한 거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취소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주, 죽이지 말라고 의뢰를 취소하면…….
그녀는 황급히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그 남자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너무 놀라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한 여자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요?!”
“아니, 대체 언제 나오려고 그래?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씻긴 한 거야?”
“씻든 말든 내 몸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남편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다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통화기록을 찾았지만, 뒤늦게 자신이 바로 번호를 삭제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의 홈페이지를 찾으면 번호는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예전에 검색해서 찾았던 대로 웹브라우저를 열었다.
“…….”
없다.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 청부업자의 홈페이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 아니야. 내가 이런 걸 잘 못 다루니까 못 찾는 것이리라. 있을 거야. 있어야 해.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도 다른 업체의 정보만 뜰뿐, 그때 봤던 홈페이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여자는 마치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강박적으로 우편함을 확인했다. 누군가가 우편함 근처에 다가가기라도 하면 벌컥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그냥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신발조차 신지 않고 달려 나온 여자를 이상하게 보며 피했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밖을 지키고 있는데, 그 남자는 마치 유령이라도 된 양 모습을 숨긴 채 우편함에 또 무언가를 놓고 갔다. 이번에는 녹음기였다. 친절하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설명서까지 써놓기까지 했다. 그녀는 황급히 녹음기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갔다. 설명서에 쓰인 대로 버튼을 누르자 치익-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자, 자신의 목소리도.
[밀리안 디모시? 당신의 성과 같은데, 혹시…….]
[그,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중요하지 않죠. 친어머니가 아들을 청부살해를 하든 말든 우리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아, 안 돼. 이게 뭐야?! 그녀는 아까 눌렀던 버튼을 한 번 더 눌러 황급히 전원을 껐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들은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방문은 잠갔고, 자신은 혼자였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남편은 출국 준비를 위해 잠시 외출을 한 상태였으니 정말 이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자신뿐일 텐데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아아, 아아아…….”
아니야. 아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혀,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한 것뿐이었다. 총까지 꺼내서 의뢰하지 않으면 꼭 자신을 죽일 것처럼 구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놓고 녹음이라니! 그녀는 녹음기를 들고 초조하게 서성이다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선 다시 달려가 주웠다.
이러다 미치는 게 아닐까?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정성 들여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오도 가도 못 하고 발버둥 치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 * *
“아니, 뭐 별로 대단한 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저러죠?”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 한 여자치고 너무 쉽게 무너졌다. 고작 사진 몇 번 보내고, 녹음기를 보낸 게 단데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었다. 이렇게 잘 반응해주니 고맙긴 한데, 너무 쉬워서 머쓱하기까지 했다. 에릭은 함께 모니터를 지켜보던 부하의 비웃음에 팔짱을 꼈다.
“솔직히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의뢰는 거짓이고, 아들이 살해될 일이 없다는 거요.”
“원래도 정신이 약한 여자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지는 거지.”
오랜 시간을 걸쳐서 천천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밀리안을 괴롭히며 그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사라져서 그걸 혼자 감당해야 하니 더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여자의 상황이 이해가 됐지만, 그렇다고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가 돼서 아이를 보호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제 스트레스를 전가해 학대했고, 그도 부족해 죽일 생각까지 했다. 동정할 가치가 없는 여자다.
“그런데 저러다가 자해라도 하는 거 아닐까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부하가 제 머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그건 저 여자가 알아서 할 문제지.”
그래 주면 손도 안 대고 문제를 다 해결하는 거였다. 에릭의 냉정한 말에 부하가 냉혈한이라며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더 건드릴까요?”
“잠깐 멈춰. 어차피 이제 알아서 무너질 테니까.”
“하긴. 아, 그런데 앨범은 왜 가지고 오라고 한 겁니까? 이것도 따로 사용할 일이 있나요?”
“…….”
쓸데없는 질문에 에릭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부하는 사람을 도둑질하게 만들어 놓고 말도 안 해준다며 툴툴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 *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회사 내부를 정비하는 일은 물론, 각국을 오가야 하는 출장도 많아졌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는, 휘몰아치는 일정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 실수라도 할 것 같아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내야 했다. 이렇게 느긋한 일상을 보내는 시간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일이 바빠져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는 점은 좋다. 괜히 안 좋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항상 클레이와 붙어 있으니 불안한 감정이 끼어들 일이 없었다. 클레이와 함께 있어야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음이 중심을 잡았다. 아니, 그렇게 착각할 수 있었다.
밀리안은 계속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고 키스하는 클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혹시 지금 기분 안 좋습니까?”
“아니.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하지만 계속 반지만 만지고 있어서…….”
“아, 입에 키스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어?”
“아니, 읍!”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던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그를 내리눌렀다. 그들의 곁에서 맴돌고 있던 체셔가 그 모습을 보고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밀리안의 입에 집요하게 입을 맞추던 클레이는 거슬릴 정도로 우는 체셔의 행동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대체 쟤를 왜 여기에 들인 거야?”
“들어오겠다고 자꾸 울어서요. 안쓰럽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애라도 키우는 줄 알겠어.”
클레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체셔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체셔가 캬아악! 거친 소리를 내며 발톱을 세웠지만, 클레이는 작은 고양이를 손쉽게 제압했다. 그녀는 체셔가 할퀴지 못하도록 양쪽 앞발과 뒷발을 손으로 고정해 안은 뒤 문을 열었다.
“벤틀로!”
“네, 무슨…… 이런, 체셔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니?”
그녀가 부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벤틀로가 뛰어왔다. 그는 클레이가 체셔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받아 제 품에 안았다. 왜 여기 있기는. 클레이는 벤틀로의 능청에 코웃음을 쳤다.
“별채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밀리안 님이 보고 싶다고 하도 보채는 바람에……. 체셔도 너무 한 곳에 갇혀 지내는 것도 안쓰럽지 않습니까?”
“별채는 ‘한 곳’이라고 말하기 좀 민망할 정도로 크지 않아?”
“흠흠.”
클레이의 날카로운 지적에 체셔의 변호를 하던 벤틀로가 헛기침을 했다. 그 와중에도 고양이를 제 애처럼 소중하게 안은 채였다. 저렇게 잘 받아주니 저 녀석 버릇이 저 모양이지. 클레이가 혀를 쯧쯧 내찼다.
“예뻐하는 건 상관없지만, 방해는 하지 못하게 해야지.”
“밀리안 님도 체셔를 예뻐하십니다.”
“……그래서 더 기분 나빠.”
“고양이에게까지 질투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벤틀로의 안타깝다는 듯한 시선에 클레이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때 체셔가 벤틀로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다시 침실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밀리안은 제 품에 쏙하고 안긴 체셔를 어정쩡하게 안고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그의 표정과는 달리 밀리안의 무릎을 차지한 체셔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뒷발을 올려 그루밍했다.
“약아빠져서는…….”
“이 집의 권력자를 아는 거죠.”
“그래서 약아빠졌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