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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오드레아 드뷔쉬가 일 층 로비에서 자신을 만나겠다고 밀리안을 상대로 설쳤다는 에릭의 보고를 들은 뒤였다. 그런데 돌아온 밀리안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기는커녕…….
“…….”
클레이는 제 곁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는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업무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과하게 붙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지만, 갑자기 변한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오드레아 드뷔쉬를 만난 이후였으니까. 그녀는 묘하게 가라앉은 기분에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밀리안은 또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밀리안이 그녀를 따라 문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클레이는 문가에 한 손을 짚고 그를 막아섰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려고?”
“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밀리안이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주춤 뒤로 물러서는 밀리안의 허리를 잡아챈 클레이가 그를 화장실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를 벽에 밀친 상태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내 옆에 있고 싶었어?”
“…….”
“요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나 좋아 죽으라고 이러는 거야? 클레이가 밀리안의 귀에 후, 바람을 불었다. 짓궂은 말에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완전히 익어버릴 기세로 달아올랐다.
마음이 통한 이후 밀리안은 굉장히 솔직해졌다. 그가 싫어할까 봐 어떻게든 통제했던 욕망을 밀리안이 끄집어내게 했다. 그를 집어삼킬 듯 굴지 않으면 만족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부끄러워하면서도 욕망에 솔직했다. 메말랐던 갈색 눈동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습윤한 윤기가 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클레이는 밀리안의 날렵한 콧대를 이로 살짝 깨물었다.
“읏!”
“큰일이네, 요즘. 너무 야해졌어.”
야한 남자. 저런 물기에 젖은 눈으로 볼 때마다 마치 해달라고, 만져달라고 그녀를 자극하는 것 같아 참는 것도 일이었다. 예쁜데……. 너무 과하게 예뻐져서 그를 주시하는 사람도 많아져서 문제였다. 그녀만 알아보았던 밀리안의 매력을 다른 여자도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당장 밀리안을 집 안에만 가둬두고 싶은데, 밀리안은 올곧은 눈으로 자신만 바라보고 있어서 겨우 참는 중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밀어 밀리안의 가슴을 눌렀다. 완전히 밀착되어 뭉개진 가슴으로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클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하고 있네?”
“사장님도, 하고 계시니까요…….”
“그래.”
밀리안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린 모습도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욕망을 당겼다.
“보여줘.”
“네?”
“이거 말이야. 보고 싶어.”
클레이는 손으로 밀리안의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왼손 약지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반지가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하지만 여긴…….”
“왜? 여긴 우리밖에 없는데. 아니면 내가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할까 봐 기대돼? 난 그냥 보기만 하려던 거였는데. 우리 밀리, 야해.”
“읏.”
“내가 정말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빨리 보여줘.”
넥타이는 그대로 단 채 셔츠의 단추만 풀라는 말에 밀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클레이의 반지와 동일한 디자인의 목걸이가 찰랑 흔들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클레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는 약지에 밀리안의 목에서 흔들리는 링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작게 좁혀놔서 손가락 한 마디만 겨우 들어갔다. 그 상태로 반지를 넓혀 밀리안의 손가락에 끼웠다. 이 별거 아닌 반지가 주는 만족감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예쁘다.”
“…….”
“우리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아.”
낮게 가라앉은 속삭임에 밀리안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
“……응?”
정말 이상한데? 회사에서 이름을 부르다니 평소 같지 않아. 클레이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과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모습은 굉장히 귀엽고 색달랐지만, 밀리안답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요.”
“뭐?”
“집에…….”
벤틀로가 기다리고 있고, 여자와 함께 지내는 집에 가고 싶었다. 언젠가 우리의 관계가 끝나면 떠나야 할 곳이었지만,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단 하나의 ‘집’이 되어버린 곳으로.
밖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위태로워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 * *
집에, 가고 싶다고? 클레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거였나? 밀리안이 이상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가? 이런 말을 하려고 순종적으로 군 거였어? 밀리안은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그녀를 진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밀리안의 턱을 강하게 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집에 가고 싶다고? 무슨 집? 너에게 집이 있던가?”
“네?”
“넌 아무 데도 못가.”
평생. 클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제게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망칠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게 당당히 내뱉을 정도로 간절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주고 있는데, 그 허름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 추위도 많이 타는 주제에 방한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낡은 집에서 혼자 뭘 하려고?
잘해주자고, 기분 좋은 일만 안겨주자던 다짐도 밀리안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휘발되어 자글자글한 열기만 남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밀리안의 행동에 계속 불안했던 터라 그녀의 반응은 거세게 터져 나왔다. 클레이의 격렬한 반응에 밀리안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뭐든 상관없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오로지 내 곁뿐이야.”
클레이의 녹색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었다. 더 시간을 끌면 오해만 길어질 것 같아 밀리안이 클레이의 입을 막았다.
제 입 안으로 파고드는 눅눅한 혀의 감촉에 클레이가 눈을 치켜떴다. 무슨.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았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밀리안의 키스만 강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자주 입을 맞췄는데 밀리안은 여전히 서툴렀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혀를 건드리는 그의 혀는 밀리안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서툴고, 딱딱하고, 수줍은 움직임. 치밀어 올랐던 화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언제 이렇게 약아졌지?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혀에 밀리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잘게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예뻤다. 클레이는 뒤로 물러나려는 밀리안의 머리를 손으로 잡아 누른 뒤 눈을 감았다.
입맞춤이 끝나고 밀리안의 해명을 들은 클레이가 툴툴거렸다.
“제대로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말을 하려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은 것은 사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말해.”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해할 여지도 주지 말라며 클레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밀리안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순순히 사과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클레이는 밀리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클레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나도 집에 가고 싶어.”
“…….”
귀에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에 밀리안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집에 가서 당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싶어. 아, 빨고 싶다.”
“―!”
“휴가를 더 길게 잡을 걸 그랬어.”
빌어먹을 회사. 허리를 잡고 있던 여자의 손이 밀리안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하체가 바짝 붙었다. 여자는 다리 하나를 그의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고 성기를 짓눌렀다. 뭘 빨고 싶은 건지 말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밀리안은 아래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에 몸을 움찔 떨었다. 성기를 감쌌던 뜨거운 입 안의 감촉과 교묘하게 움직이며 애무하던 여자의 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걸 여자도 느꼈는지 그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침대로 갈래? 기껏 만들어 놨는데 아직 한 번도 안 썼잖아.”
“…….”
“거기선 마음껏 소리 내도 돼. 방음에 신경을 많이 썼거든.”
휴게 용도로 만든 사무실 내의 침실을 방음까지 신경 써서 만들었다니. 또 그걸 여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공사를 맡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예상이 갔다. 아니, 워낙 저질스러운 스캔들을 뿌렸던 당사자니 당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스캔들.
다시 오드레아 드뷔쉬가 떠올랐다. 사실 클레이가 만나고 몸을 겹쳤던 남자는 그뿐만이 아닌데, 그녀와 이런 관계가 된 이후 직접 얼굴을 마주한 남자가 오드레아 드뷔쉬뿐이어서 계속 그 남자가 걸렸다.
‘넌 아무 데도 못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오로지 내 곁뿐이야.’
여자는 그가 필요한 말을 딱 정확한 시점에 말해주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꽉 억눌렀던 감정이 모두 풀어져 버렸다. 밀리안은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절대 안 됩니다. 조금 뒤에 회의가 잡혀 있어서,”
“……이런 상태인데 참을 수 있겠어?”
“읏.”
그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던 여자의 허벅지가 앞뒤로 흔들렸다. 이러다 완전히 발기할 것 같아 밀리안은 더 강하게 여자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이미 불이 붙어버린 여자는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다.
“집에서요. 집에 가서…….”
“…….”
고개를 푹 숙이고 하는 말에 클레이가 눈을 깜박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정갈한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클레이는 순순히 밀리안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밀리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에 밀리안이 머리를 아래로 숙인 상태로 살짝 끄덕였다. 클레이는 자꾸 꿈틀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을 만졌다.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이 심장을 노곤하게 녹였다. 그게 밀리안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더 달았다.
그와 나의 집. 그리고 벤틀로가 있고, 언젠가는 그들의 아이도 함께 존재할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