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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밀리안은 벤틀로가 조용히 내려놓은 따뜻한 홍차를 마셨다. 클레이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긴 눈꼬리를 둥글게 휜 채로. 그녀는 밀리안의 배에 손을 대고 움직이며 부피를 쟀다. 이제 막 복근이 생기려는 납작한 배에서 한 뼘 정도 앞의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댔다.
“괜찮아. 난 당신 배가 이만큼 부풀어도 사랑스러울 테니까.”
“그 정도로 부풀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닥터 크래포드의 체구만 해진다는 건데, 그렇게까지 살이 찔 리가 없었다. 움직이는 강도에 따라 대충이나마 칼로리 계산을 하고 있었다. 몸이 둔해지는 건 싫다. 밀리안이 질색하자 클레이는 묘하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길게 휘었던 눈꼬리가 살짝 누그러지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설마 체격이 좀 있는 걸 좋아했던 걸까?
“혹시 살집이 좀 있는 게 취향, 이라거나…….”
“……밀리, 당신은 정말 눈치가 없어.”
“네?”
무슨 눈치를 말하는 거지? 대화를 되짚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밀리안의 얼굴이 진지해지자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무튼 난 당신이 살이 찌든 말랐든 다 좋으니까 대니얼의 말은 신경도 쓰지 마.”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쓸모가 있었던 적이 별로 없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말하고는 직접 포크를 들어 아직 남아 있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찍어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
“아, 해”
“배가 불러서…….”
“안 돼. 다 먹기 전까지 못 일어나.”
“하아.”
제멋대로의 행동에 한숨이 저절로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자 이전과 같은 행동에도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밀리안은 입을 벌려 클레이가 내민 고기 조각을 받아먹었다. 분명 아까는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막상 먹으니 또 잘 들어갔다. 스테이크는 여전히 맛있었다.
밀리안이 고분고분하게 잘 받아먹자 클레이가 다시 웃었다. 역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심장 안쪽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이 여자가 말한 사랑은 언제까지일까. 평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쉽게 뒤집힐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밀리안은 다시 제 입 앞에 고기 한 조각을 들이미는 여자의 행동에 옅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저 이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이런 따뜻한 감정을 받아본 적이 언젠지 떠올리기도 힘든 갈급한 나날을 보냈던 탓인지 끝이 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느끼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사랑이 이어지는 동안만큼은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최대한 이 감정을 끌어모아 심장에 담아 놓으면 언젠가 혼자가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 힘들지 않으리라.
* * *
크리스마스 전에 휴가를 낸 후, 회사에 복귀하니 새해가 훌쩍 지나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비서실 직원들은 제각각 휴가를 만끽했는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레이는 태닝을 한 것처럼 피부색이 짙어져 있었다. 섹시해 보이지 않냐며 자랑을 하는데 솔직히 더 어려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밀리안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는 레이를 향해 맥시가 혀를 내찼다. 하지만 이전처럼 레이를 구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전보다 피부색이 좀 더 짙어진 밀리안을 바라봤다.
“밀리안, 휴가 잘 다녀왔어요?”
“저는 사장님을 수행했습니다.”
“맙소사. 미안해요, 밀리안.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닙니다. 저도 사장님 덕분에 잘 쉬고 왔어요.”
“……오, 밀리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크리스마스에 사장을 수행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맥시뿐만이 아니었다. 줄리아도 레이도 동정 어린 눈으로 밀리안을 바라봤다. 맥시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안쓰러운 눈을 했다.
“애인이 많이 섭섭해했겠어요. 잘 달래 줬어요?”
“네? 아, 그……, 네.”
차마 그 애인이 클레이 디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인……. 클레이와 자신의 관계가 그런 단어로 묶였다는 자각이 들자 밀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밀리안, 얼굴이.”
“오래 놀았네요. 자, 이제 일하죠.”
밀리안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맥시가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러다 줄리아에게 옆구리가 찔리고는 자리로 질질 끌려갔다. 레이도 슬쩍 눈치를 보더니 회의실을 나섰다. 혼자 회의실에 남은 밀리안은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몸이 건강해지자 먼저 벽을 세워 사람들을 경계했던 마음도 누그러졌다.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를 무서워하고 피하기만 급급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대하는 방법을 클레이 디어와 함께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누구도 클레이를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렵지 않았으니까.
밀리안은 손으로 목 부근을 주무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상사는 그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해에 돌입할 업무 방향에 대한 자료가 들어 있는 USB를 PC 본체에서 뽑고 자리를 정돈한 뒤 클레이 디어가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사장실 문을 열자 안에는 에릭 드와이스가 있었다. 에릭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다 말고 “그럼 나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봐도 대화가 끝난 게 아니라, 자신이 들어와서 중간에 멈춘 거였다.
“혹시 제가 방해된 거라면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야. 할 말은 다 했어. 나가봐, 에릭.”
“알겠습니다. 그럼 밀리안, 수고하게.”
“네……. 에릭도 수고하십시오.”
에릭이 문 근처에 서 있는 밀리안을 지나쳐 사장실에서 나갔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회사 안에서는 그와 에릭의 업무가 달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굳이 상하관계를 따지자면 에릭이 더 높기도 하고.
밀리안은 자리에 앉으려다 클레이가 자신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는 걸 보고 그녀에게 갔다. 밀리안이 가까이 다가오자 클레이가 의자를 뒤로 끌고 앉은 채로 양팔을 벌렸다. 무릎 위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이건 좀…….”
“그냥 안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싫어? 클레이가 섭섭한 얼굴로 물었다. 여자가 이렇게 약하게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밀리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눈을 꾹 감고 다리를 벌려 클레이의 무릎 끝쪽에 살짝 걸터앉았다. 하지만 그가 앉기 무섭게 클레이가 팔로 그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아 바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몸이 완전히 밀착됐다. 밀리안은 여자의 허벅지에 완전히 올라타 버린 상황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보다 더한 짓도 당했었는데 새삼스럽게 수치심이 들었다. 이곳이 회사라서 더 그랬다. 그는 달아오른 얼굴을 여자의 어깨에 묻었다.
“흐음. 당신 살 냄새가 좋아.”
여자는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비볐다. 약을 먹고 있어 오메가의 향도 나지 않는데, 좋다니. 바짝 곤두섰던 등에 힘이 주룩 풀렸다. 이렇게 서슴없이 애정을 드러내는 여자에게 약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붙어 있다가 관계가 짙어지곤 했다. 데스크의 테두리가 등에 닿자 자연스럽게 이 책상에 눕혀진 채 여자에게 성기를 빨렸던 때가 떠올랐다. 밀리안은 그의 허리에 감겨 있는 여자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클레이는 그를 무릎에서 내려주었다.
“자, 이제 일해야지.”
“……사장님?”
“왜? 할 말 있어?”
여자는 다른 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 산뜻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밀리안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얼굴은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밀리안은 살짝 발기되었던 성기를 느끼고 불편한 얼굴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클레이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꼭 기대라도 한 것처럼…….
밀리안의 얼굴에 확, 하고 열이 올랐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히트 사이클 이후, 클레이는 이전과 달리 매우 부드럽게 그를 만졌다. 삽입 섹스를 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가끔 삽입까지 가더라도 그가 절정에 오르면 몸을 뒤로 물렸다. 딱 괴롭지 않을 정도의 안온한 쾌감만 주었다.
그런데 몸이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열이 식지 않았다. 한계의 한계까지 여자의 안에서 절정을 느끼고 괴롭혀졌던 그 미친 것 같은 쾌락이 계속 생각났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담백해서……, 마치 의무적으로 그와 관계를 가지는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든다.
‘의무적으로…….’
인사팀에서 넘어온 파일을 내려받아 열던 밀리안의 손이 움찔 떨렸다. 설마 벌써 질린 걸까. 하지만 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여자의 눈은 여전히 따뜻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듯이.
‘하지만 만지질 않아.’
열에 들떴던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 밀리안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보고 있는 클레이를 바라봤다. 여자는 전에 없이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지만, 약탈하듯 그의 몸을 탐하던 과거가 더 그를 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렇게 괴로워했으면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밀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새해가 되기도 했고, 긴 연휴 끝에 첫 출근이어서 일정은 평소보다 느슨했다. 러시아워가 시작되기 전,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가 중간에 한 번 멈춰섰다. 창밖으로 보니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밀리안은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클레이를 바라봤다.
“다른 일정이 있었습니까?”
“아니. 맡겨 놓은 물건을 찾아오는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맡겨 놓은 물건? 그게 뭐지. 하지만 그걸 되묻기 전에 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클레이가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비비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려서 신경이 흐트러졌다. 밀리안은 자신의 검은색 슈트 위로 흩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을 홀린 듯 바라봤다.
“예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나른하게 감겼던 여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자의 긴 속눈썹이 여러 번 깜박이며 움직였다. 그리고 보석 같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여자의 모든 순간순간이 그림 같았다.
“내가, 예뻐?”
“……네.”
어떻게 예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당신은 클레이 디어인데. 밀리안은 고해 성사를 하듯 여자의 아름다움을 인정했다. 나를 망가트리고, 다시 살려 놓은 사람. 아득한 진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의 순순한 대답에 클레이가 웃었다. 더없이 행복하다는 얼굴로. 밀리안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들어.”
“설마요.”
포털에 클레이 디어의 이름만 검색해도 추종자들이 넘쳐났다. 아무리 그녀가 문란한 사생활로 비난을 당해도 결국 그들은 그녀에게 홀려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로 수식하는 말도 아닌 고작 예쁘다는 단순한 말을 처음 들었을 리가 없다.
“당신에게 들은 거 말이야. 다른 사람의 말은 필요 없어.”
“…….”
“정말 기뻐.”
진심이야. 클레이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 그리고 귓불을. 그리고 선을 그리듯 손을 움직여 그의 목을 감쌌다. 밀리안은 그녀의 은밀한 채근을 따라 상체를 숙였다. 여자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