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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70화 (7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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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후들거렸다. 아니, 심장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떨렸다. 극도의 긴장감이 정신을 옭아맸다. 분명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클레이와 단둘만 남게 되자 기억 언저리에 각인된 두려움이 찾아왔다.

십여 년 전에 처음 경험했던 히트 사이클은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발현은 다행히 집에서 자다가 나타났다. 덥고 몸이 간지러워서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를 기어 다녔던 것 같다. 사실 그때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어머니의 비명이었다.

항상 인자하고 다정했던 어머니가 치를 떨고 그를 멀리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경멸과 비난, 원망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렇게 머리에 각인됐다. 오메가는 짐승이고, 절대 히트 사이클이 와서는 안 된다고.

“…….”

히트 사이클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걸 이제 겪어야 한다. 그의 몸을 위해서도, 또……. 크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내뱉었다. 긴장하고 싶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동안 수차례 검색하고 봐온 영상이나 문서는 남의 이야기처럼만 느껴졌다. 여성 알파의 질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성기가 삽입된 오메가의 성기 안으로 삽입된다고는 나왔지만, 영상도 설명도 그것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연결된 몸 안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교였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있던 밀리안은 한숨을 쉬고 일어나 침실 옷장 문을 열었다. 분명 이미 옷을 갈아입었을 클레이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섬에 도착해서 한 시간도 안 돼서 돌아간 벤틀로는 그새 짐을 완벽하게 정리해 두었다. 아예 옷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고작 일주일 있을 일정에 과할 정도로 옷이 많았다. 모든 것에 철저한 벤틀로다웠다.

밀리안은 검은색 수영복을 꺼내 입고 셔츠를 상체에 걸쳤다. 그러다 기분이 이상해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워 살을 가렸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셔츠를 입은 것은 몸이 계속 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섬에 왔는데, 이상하게 몸이 시렸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여니 클레이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오래 기다린 듯 성의 없이 책을 뒤적거리다 그를 돌아봤다. 긴 금발을 하나로 묶은 여자는 차라리 옷을 입지 않은 것이 더 나을 것만 같았다. 그와 똑같은 검은색 비키니를 입었는데 느낌이 너무 달랐다. 온몸에 관능이라는 것이 흘러넘치는 것 같다. 극도로 긴장한 와중에도 클레이가 과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떨렸다. 공포와 긴장, 설레임, 또 두려움이 다시 뭉쳐 그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밀리안이 굳어버린 것처럼 서 있자 클레이가 그에게 다가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어차피 바다에 들어가면 벗어야 하는데 뭐 하러 셔츠를 입은 거야?”

“네? 아니, 그…….”

“벗어.”

“―!”

여자는 밀리안이 스스로 벗을 시간을 주지 않고 그대로 옷을 찢어버렸다. 튕겨 나온 단추가 바닥에 튕기며 떨어졌다. 순식간에 셔츠를 찢어버린 여자는 검은색 수영복 하나를 걸친 밀리안의 몸을 만족스럽게 훑었다.

“예쁜 몸인데 가리면 아깝지.”

물론 자신의 앞에서만 옷을 벗어야 한다며 여자가 재차 강조했다. 밀리안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떨어? 그렇게 긴장돼?”

“…….”

“밀리? 잠깐, 왜 그러…….”

심장이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 있는 것 같다. 큰소리로 요동치는 심장의 펄떡거림이 둥둥-거리며 귀를 울렸다.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려지길 반복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일그러졌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밀리안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클레이가 눈을 뜬 그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괜찮아?”

“무슨, 일이…….”

“신경 쇠약, 과호흡. 극도의 스트레스……. 셋 중의 하나. 아니, 어쩌면 셋 모두.”

갑자기 숨을 헐떡거리더니 의식을 잃었다며 클레이가 황망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조금 있으면 대니얼이 도착할 거야.”

“닥터, 크래포드가 어떻게 여길…….”

“혹시 몰라서 옆에 있는 섬에 미리 옮겨놨거든. 네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강제로 히트 사이클이 오게 만드는 만큼,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대니얼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했지만, 그건 불확실한 가정에 불과했다. 밀리안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만에 하나라는 것은 없다.

그녀가 가진 섬은 이 작은 섬 하나가 아니었다. 이 섬을 둘러싼 세 개의 섬이 있고, 그곳에는 리조트를 세웠다. 안티 파파라치 시스템이 세 개의 섬에 가동 중이었고, 가장 보안이 강한 곳은 그 중앙에 있는 바로 이곳이었다. 대니얼은 두 번째 섬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그녀의 연락을 받고 벤틀로와 함께 헬기를 타고 오고 있었다.

대니얼과 통화하면서 실시간으로 응급처치를 했던 클레이는 아직도 밀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는 모습이 생생했다. 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멍청하게 혼자만 들떠서는.

클레이는 조심스럽게 밀리안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걱정과 자책이 뒤섞였다.

“무서우면 그냥 휴양만 하고 가도 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그건.”

“널 다치게 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난 정말…….”

‘너를 사랑해.’

아, 그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밀리안이 쓰러지는 순간, 그녀의 심장도 멎었다. 그때의 공포는 너무 끔찍해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밀리안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확실히 깨달았다.

클레이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상체를 숙여 밀리안을 끌어안았다.

“네가 죽는 줄 알았어.”

“클, 레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왜 따라 자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모두 알겠어. 밀리안을 끌어안은 채 클레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의 세계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숨을 쉬고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래 살아 밀리안. 무조건 건강하게 오래오래.”

“…….”

“날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알겠어?”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클레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와 목 얼굴에 정신없이 입술을 비볐다. 여자의 표정, 행동, 모든 말에서 그를 향해 쏟아지는 감정이 벅찰 정도였다. 혹시, 혹시나 했던, 혹여라도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했던 감정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이렇게 겁에 질려 몸을 떨 정도로.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세상의 모두가 그를 배척하는 기분이었다. 짐승이라고 경멸받던 것만 선명해서 항상 정체를 숨겨야 했다. 오메가라는 사실을 들키면 평범하게 그를 대하던 사람들도 돌변할 것 같아서.

무한대의 사랑을 주던 부모님이 그랬으니까. 그를 낳아준 사람들도 그랬는데, 타인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부정해도 본질적인 두려움이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이제 모두 괜찮아.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그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사람으로 현신하면 이 여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두려움은 단 하나뿐인 구원으로 바뀌었다.

정신없이 얽혔던 혀가 떨어졌다. 헐떡이는 숨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 * *

‘세기의 사랑 납셨네.’

잘 놀고 있다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더니 눈에 보이는 건 정신없이 키스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대니얼은 끼어들 타이밍을 엿봤지만, 지금 상황에 방해했다가는 클레이에게 도륙이 날 것 같았다. 힐끔 벤틀로를 돌아보니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나 집사나 똑같았다. 이 상황이 짜증 나는 건 자신뿐이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침실 문을 닫았는데 왜 이렇게 크게 들리고 난리야. 대니얼은 거의 해탈한 얼굴로 시계만 바라봤다. 도착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이러다 섹스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제발 거기까지만 가지 말아라,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클레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늦은 게 아니라,”

“됐어. 들어가서 밀리안 상태 좀 봐봐.”

클레이가 귀찮은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와, 하느님. 제가 쟤를 한 대만, 딱 한 대만 치게 해주세요. 그럼 전 재산을 바쳐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한 대를 치고 나면 그 뒤에 걸릴 소송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도 모자라 거액의 빚을 지겠지. 클레이도 클레이지만, 벤틀로가 더 문제였다. 대니얼은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가니 밀리안이 어색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혈색도 좋고 호흡도 정상이었다. 혹시 몰라 혈압까지 쟀지만, 정상수치였다. 대니얼은 청진기를 떼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그래도 간단한 진료로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었다.

“밀리안, 몸은 좀 어때요?”

“좋아요.”

“스트레스가 심했나 봐요?”

“……네. 조금, 긴장해서…….”

쓰러질 정도면 조금 긴장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대니얼은 속으로 혀를 내찼다.

“아무래도 제가 여기 계속 있어야겠습니다.”

“음.”

내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벤틀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클레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밀리안을 바라봤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돌아가셔도 돼요.”

“그래도 또 언제 쓰러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방은 많으니까 닥터 크래포드와 함께 남겠습니다.”

“엑? 저도요?!”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소리인가. 대니얼이 몸을 펄쩍 뛰었다. 벤틀로의 얼굴이 엄격해졌다.

“저보다도 선생님이 가장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도, 저도 휴가를 보내러 온 건데……, 리조트에서 이 섬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세요. 그냥,”

“선생님.”

“…….”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철벽같은 목소리에 대니얼이 입을 쭉 내밀었다. 휴양지에서의 짜릿한 만남을 위해 나름 다이어트도 하고 왔는데 다 망했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대니얼에게 내려왔다.

“아니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건 안 돼. 또 그런 상황이 오면 어쩌려고.”

밀리안의 말에 클레이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밀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조금 전의 생각이 났는지 여자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밀리안은 겹쳐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긴장이 됐었는데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

“정말 괜찮을 겁니다. 분명히.”

“밀리안.”

“저도 둘만……, 있고 싶습니다.”

새빨개진 얼굴로 밀리안은 꿋꿋이 클레이를 바라봤다. 클레이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오, 미친. 진짜 염병이구나. 대니얼은 입술이 제멋대로 나불거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솔로 앞에서 너무한 거 아닌가? 클레이가 한 말이라면 짜증이 나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밀리안이 그러니까 속이 더 뒤집혔다. 꼭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대체 왜 저렇게 변한 거야?! 온몸이 간지러워서 벅벅 긁고 싶었다. 식도와 내장 안쪽까지 소름이 돋아난 것처럼 간지러워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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