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69화 (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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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아무리 도로가 막힌다고 하더라도 이 시간에 이렇게 오래 걸릴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클레이는 운전석 쪽과 스피커를 연결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돌아갈 거지?”

“이제 곧 도착합니다.”

“이제 곧?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면서 이제 곧?”

“벤틀로가 최대한 천천히 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벤틀로가?”

밀리안이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하면 했지, 이렇게 빙 둘러 오라고 말을 했다고? 클레이는 바로 벤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라고 할 사람이 아니다. 대체 그 여우 같은 속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이런 짓을 시켰을까.

[벤틀로입니다.]

“왜 이렇게 빙빙 돌게 시켰지?”

[아, 그래서 늦으셨군요. 네, 이해하지요. 밀리안 님, 주인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하시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

[밀리안 님께서 식사도 하지 않으신 채 주인님만 기다리시는 중이니 빨리 오십시오.]

“…….”

벤틀로는 뜬금없는 말을 해대며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클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긴 했군.

‘밀리안이 식사도 하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다고?’

그대로 믿기에는 영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그녀가 아는 밀리안은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기다릴 남자도 아니다. 하지만 미묘하게 들뜬 기색의 벤틀로의 목소리가 신경을 잡아끌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곧 도착한다. 벤틀로의 꿍꿍이는 얼마 뒤에 모두 드러날 테니 일단은 기다려 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 * *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벤틀로는 클레이와의 통화를 끝낸 뒤 밀리안에게 응접실 소파에 앉길 종용했다. 밀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한다. 곧. 직접 통화하는 것을 들었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밀리안은 소파에 앉은 뒤 때때로 창문을 바라봤다. 응접실에 있는 창으로는 클레이 디어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함에도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택에 돌아온 지 다섯 시간이 되어 가는데, 밀리안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였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하물며 더 이상 기다리다 못해 직접 그녀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더 그랬다.

밀리안은 차갑게 식은 두 손을 깍지껴 잡았다. 가서 뭘 어쩌려고 그랬지? 알파들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클레이가 돌아오고 있다며 벤틀로가 자신을 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뒤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찾으러 갔을 것이다.

“아, 오셨군요.”

벤틀로의 한마디에 밀리안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현관을 나가 차에서 내리고 있는 클레이를 발견했다. 밀리안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서 있다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밀리안?”

마중 나온 거야? 그를 발견한 여자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고작 다섯 시간이었다. 그들이 떨어져 있던 시간은.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밀리안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여자를 향해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니, 뛰었던 것 같다. 여자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밀리안은 여자의 뻗어진 두 팔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늘씬한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밀리안이 먼저 제 품에 안긴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밀리안의 모친의 전화 때문이었으니 특수 상황으로 친다면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레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밀리안을 마주 안은 채 현관 쪽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벤틀로를 바라봤다. 뿌듯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보니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됐지 하고 어리둥절하던 머리가 서서히 밝아졌다.

‘정말 날 기다렸어?’

클레이는 밀리안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이 남자가 나를 기다렸다고?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를? 고작 다섯 시간을 참지 못해서 이렇게 뛰어와 안길 정도로…….

‘맙소사.’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클레이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용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벤틀로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에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뜨거운 물에 푹 젖은 밀리안의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클레이는 자신이 바르겠다는 밀리안의 요구를 무시한 채 크림을 손에 덜어 그의 얼굴에 부드럽게 펴 발랐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없,”

클레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밀리안의 양 볼을 잡고 제게로 돌렸다. 남자는 시선을 내리깐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누른 채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그를 채근했다.

“내 눈을 봐야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 오드레아 드뷔시는…….”

“뭐?”

“오메가인데, 알파들의 파티라고 분명, ……아니, 아닙니다.”

“…….”

정리되지 않은 조각들을 겨우겨우 꺼내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잊으라고 한다. 오드레아 드뷔쉬. 오메가. 알파의 파티. 클레이는 밀리안의 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오드레아 드뷔시는 오메가인데 왜 알파들의 파티라고 말한 곳에 왔냐는 뜻이야?”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질문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파티는 일정 시간이 지나가면 다소 문란해졌고, 엄선된 오메가들이 파티에 참석한 알파의 파트너가 되곤 했다. 스폰서 겸 섹스 파트너. 그걸 이 순진하고 곧은 남자에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게 날 기다린 이유와 관련이 있어?”

“―!”

밀리안의 몸이 움찔 튀었다. 빙고. 클레이의 눈이 짙어졌다.

“하나만 더 대답하면 나도 당신 질문에 대답해 줄게.”

“무슨.”

“혹시, 내가 다른 오메가와 잘까 봐 걱정했어?”

“그, 아니…….”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밀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클레이는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했다. 심장이 너무 큰소리로 뛰어 머리가 멍했다. 나를 기다린 이유가 이거였어? 그렇게 날 보자마자 뛰어와 안길 정도로 내가 다른 사람과 잘까 봐 걱정한 거야?

‘……질투, 했어?’

클레이의 입술이 길게 휘었다. 자신만 전전긍긍하는 줄 알았더니, 이 남자도 조금이나 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알파들이 모이면 서로의 페로몬이 충돌해 다소 안 좋은 성질로 변하곤 하지. 그래서 선정된 오메가들을 함께 불러.”

“…….”

“이미 예상했겠지만, 섹스의 용도로서.”

클레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리안이 살짝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밀리안의 눈동자가 활활 타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갈색이었던 눈동자가 조명에 비쳐 금색으로 빛났다. 클레이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저 눈을 빨고 싶었다. 질투와 혼란, 소유욕과 좌절로 빛나는 다디단 사탕 같은 눈동자를.

항상 애매하게 느껴졌던 그의 감정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다. 더 보고 싶었지만, 밀리안이 오랫동안 오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클레이는 그의 눈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네가 보고 싶어. 널 안고 싶고, 네 몸을 샅샅이 빨고 싶지. 이제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나는 네 거야. 클레이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계속 그렇게 내게 와.”

내게 오고 있기만 하면 계속 기다릴 수 있어. 오늘처럼 아주 조금의 보상이라도 내려준다면,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달게 눈을 감을 수 있다.

‘물론 당신을 데리고 가겠지만.’

내가 죽은 뒤에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사는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클레이는 밀리안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밀리안의 입술에서 조금 전에 발랐던 크림의 맛이 난다. 가볍게 빨고, 입술을 뗐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달콤한 어떤 것을 맛보듯 탐욕스럽게 수없이 입술을 맞댔다.

* * *

클레이 디어가 말한 섬은 전세기로 열 시간을 타고 이동한 뒤 헬기로 갈아타 두 시간을 더 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 비행으로 쌓였던 피로는 작은 섬을 본 순간 날아갔다. 에메랄드로 빛나는 바다와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물이 워낙 깨끗하고 맑아서 산호와 물고기가 그대로 보였다.

해변을 앞두고 방갈로식으로 지어진 별장이 있었다. 동양적인 디자인이 이국적이었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섬과 어우러져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밀리안은 따뜻한 모래를 맨발로 밟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겨울이었는데, 도착하니 여름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바다를 보고 있는 밀리안을 클레이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벤틀로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그럼 저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내가 연락하면 와.”

“그래도…….”

“남의 신혼을 방해하면 안 되지.”

“흠.”

“밀리안의 히트 사이클을 아무에게도 보일 생각 없어.”

히트 사이클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벤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을 주인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는데 걱정이 앞선 탓에 간과해버렸다. 한 달을 먹어도 될 정도로 저장고에 음식을 모두 채워 놓았다. 깨끗한 시트와 생활용품도 모두 갖춰놓았는데 왜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 드는지.

“밀리안 님의 동의를 받으신 게 확실합니까?”

“내가 직접 받진 않았지만, 비슷해.”

대니얼에게 모두 듣고 나서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동의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값싼 입이 도움이 되는 날도 있군. 결과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연구에 거액의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 이 정도의 이용은 당연했다.

그리고 밀리안이 질투를 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잘 것을 염려해 초조하게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저택에 도착하는 동시에 밀리안에게 끌어안겼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버릴 정도로 황홀했다.

클레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생활을 모두 차단당한 밀리안에게 미안하긴 해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는 게 별로 나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킹하고 있다는 걸 밀리안만 모르면 되는 문제였다.

해킹뿐일까.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소지품 전부에 GPS가 달려 있다. 항상 옆에 두고 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마음 한 조각을 조금 보았다고 방심하는 것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벤틀로마저 돌아가니 섬에 남은 사람은 클레이와 밀리안 둘뿐이었다. 집에 있을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도 장소가 주는 특별함인지, 혹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탓인지 밀리안은 클레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클레이는 살며시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밀리안은 꼭 첫날밤을 기대하는 신부 같았다. 벌써 건드릴 생각이 없는데 밀리안이 저러니까 기대에 부응해줘야 할 것 같고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는 얼굴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밀리안을 가벼운 목소리로 불렀다.

“밀리안.”

“―네?”

“왜 그렇게 놀라?”

입술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만지지도 못하겠네. 클레이는 한숨을 삼켰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지. 여기 오려고 그동안 열심히 수영 연습했잖아.”

“아, 네. 네. 그렇죠…….”

“아니면, 내가 입혀주길 바라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요!”

클레이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밀리안이 몸을 흠칫 떨더니 뻣뻣한 몸짓으로 침실에 들어갔다. 찰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저렇게 귀여운 건데?’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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