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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로 인해 화려한 거리와는 달리 파티 장소로 선정된 호텔은 고요했다. 흔한 전구 장식도 없었다. 밀리안은 이런 호텔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호텔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차분하다. 고위급들만 모이는 자리라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 건가. 클레이 디어의 사적인 행사를 수행하는 것도 처음이라 어색함은 더 했다. 밀리안은 중세 유럽의 성처럼 철벽같은 문이 위로 열리는 장면을 차창을 통해 지켜봤다. 허락이 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배타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도착하면 나오지 말고 바로 돌아가.”
“……네.”
“알파들의 모임이라 당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
알파들의 모임. 그 단어가 주는 위협에 밀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체 그 모임이 어떻길래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일까.
호텔 로비 입구에 도착한 차가 멈춰 섰다. 이번에는 에릭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창문을 아래로 내리고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자신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여자가 왠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때, 어떤 남자가 클레이를 향해 다가왔다. 당당한 걸음과 자신 있는 표정,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클레이 디어의 섹스 파트너였던 남자였고, 호텔을 직접 예약하기도 해 모를 수가 없었다. 오드레아 드뷔쉬. 그가 서글서글한 얼굴로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디어, 드디어 도착하셨네요.”
“오드레아. 너도 왔군.”
“네. 에이전시에서……, 그런데 저분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꼭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어서.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서. 네가 신경 쓸 상대가 아니야.”
“아아, 비서…….”
“…….”
거기까지 듣고 창문을 올렸다. 비서. 신경 쓰지 말라던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 남았다. 정말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듯 무심한 목소리. 맞는 말이다. 자신은 클레이 디어의 비서였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하더라도 뭐라고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해서도 안 되고, 할 이유도 없었다. 자신 역시 저 남자와 마찬가지의 입장일 뿐이었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무척 잘 어울렸다. 너무 잘 어울려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 그녀의 곁에 선 남자를 막연히 상상했을 때의 그 모습이었다. 밀리안은 쓰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자신과 다른 세계에 있는 여자를 두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그렇게 착각하게 한 사람은 클레이 디어였다.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가운 유리에 기대 있어도 엉망으로 엉킨 머리는 풀리지 않았다.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 * *
오드레아는 클레이의 곁에 붙어 걸어가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신기하네요. 당신이 이런 곳에 비서를 대동한 적은 처음 아닌가요?”
“특별한 비서거든.”
“특별하다고요?”
비서가 특별해 봤자 얼마나 특별하다고. 오드레아의 목소리에 미묘한 가시가 돋았다. 클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오드레아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호텔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후 처음 갖는 접촉에 오드레아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저절로 그녀와의 뜨거웠던 정사가 떠올라 아래가 달아올랐다. 오늘 그녀가 온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던가. 가능하다면 오늘 클레이 디어의 파트너가 되고 싶었다. 다른 오메가가 아닌, 자신이.
하지만 그를 보는 여자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내 비서는 너처럼 쉽게 발정하지 않거든.”
“디, 디어?”
“몇 년을 내 옆에 있어도 무심한 남자니 특별할 수밖에.”
그래. 너무 무심해서 도리어 자신을 안달하게 만드는 특별한 남자였다. 클레이는 아주 작은 흥미조차 사라진 얼굴로 오드레아의 턱에서 손을 거뒀다. 진작에 저택으로 보냈어야 했다. 그랬으면 오드레아 드뷔쉬가 제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앞서 걸어갔다. 아마도 밀리안은 이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았을 것이다. 그가 직접 호텔을 예약하기도 했으니까. 클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문란한 과거가 지금은 짜증이 났다. 그의 마음을 얻어야 할 때 하필이면.
그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남자인데.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신경이 쓰였다. 당장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이곳에 온 이상 얼굴이라도 비춰야 했다.
그게 그들 사회의 규칙이었다.
그 규칙에서 벗어나려면 정식으로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단 한 사람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클레이는 오메가의 페로몬과 알파의 페로몬이 짙게 밴 홀에 들어서며 찬웃음을 흘렸다.
* * *
파티에 참석한 주인을 두고 홀로 돌아온 밀리안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마저 하지 않는다고 거부해서 더 신경이 쓰인 벤틀로가 그를 따라 침실로 이동하며 다시 한번 권유했다.
“정말 식사를 안 하실 겁니까?”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거르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오늘만요. 오늘은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경 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식욕이 돌아오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밀리안의 표정이 안 좋아서 더 권할 수도 없었다. 벤틀로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주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일 층 로비로 내려가 에릭에게 연락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 대기하려던 에릭은 벤틀로의 연락에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주인님과 밀리안 님 두 분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밀리안 님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 혹시나 해서 물었습니다.”
“음.”
에릭은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차 안에 있을 때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모르니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긴 했다. 하지만 밀리안이 과연 그 모습에 타격을 받았을지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 짚이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뭡니까?”
“음. 호텔에 내리자마자 예전 파트너였던 분이 사장님께 말을 거시는 걸 밀리안이 보긴 했는데……, 모르겠군요. 밀리안이 그걸 신경이나 쓸지는.”
“오.”
점잖은 신사의 얼굴이 환하게 상기됐다. 에릭이 그런 벤틀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가정일뿐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주 좋은 가정이지요. 당분간 밀리안 님을 혼자 둬야겠군요.”
“성격이…….”
아주 나빴다. 저 인자한 얼굴을 하고 속은 완전히 클레이 디어와 판박이였다. 음흉한 사람이라며 에릭은 혀를 내찼다. 인 이어를 끼고 돌아가려는 에릭을 향해 벤틀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을 너무 빨리 모시고 오지 마십시오.”
“…….”
에릭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속으로 조금 전의 생각을 정정했다. 벤틀로의 성격이 더 나빴다. 과연 그 클레이 디어를 키운 사람다웠다.
* * *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클레이 디어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그에겐 자유가 찾아온다. 좋아해도 모자란 데, 왜……. 순간 밀리안은 그 자유가 달갑지 않아졌음을 깨달았다.
자유와 함께 여자의 따뜻한 체온도, 부드러운 피부도, 다정한 웃음도 사라질 것이다. 그 삭막하던 공간으로 돌아가 혼자 지내야 한다. 혼자.
막연히 생각했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여자와 얽히지 않았던 때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런데 클레이 디어가 막상 다른 남자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그 막연했던 상상이 현실감 넘치게 다가왔다.
‘가능할 리가.’
없잖아……. 밀리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불가능했다. 이미 너무 달라져 버려서. 오메가라는 사실을 들키더라도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도록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 클레이 디어도, 벤틀로도, 에릭 드와이스도, 닥터 크래포드도. 클레이 디어와의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조명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에서 밀리안은 허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던 날, 별을 보러 갔다가 첫눈을 맞았다. 계피와 과일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와인은 굉장히 맛있었다. 그런 것은 처음 먹어봤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벤틀로의 정성이, 그 잔을 건네던 인자한 얼굴이 그 맛을 더 진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수영장에 가서 물에 빠졌던 날에도, 함께 포커 게임을 하던 때도. 즐거웠던 것 같다. 키스해 달라던 여자의 요청도 달콤했다. 예기치 않은 어머니의 전화에 패닉이 되었을 때,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안아주던 여자. 그리고 그 대가로 입맞춤을 요구했다. 싫은 행동을 할 때마다 키스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녀와 입을 맞추는 행위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그녀의 요구가 기다려졌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입을 맞추고 혀를 얽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클레이 디어에게 완전히 길들었음을 자각했다.
여자가 그에게 준 것은 쾌락과 고통, 괴로움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달랐다. 그가 원하던, 하지만 포기하고 있던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길들였다. 너무 가난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 아주 조금이나마 맛봤던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갖기 힘든 것인지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밀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클레이 디어가 파티에 간 이후 다섯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지 열 시간이 넘었음에도 뭔가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알파들의 파티는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더 초조해졌다.
자신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다던 파티. 하지만 오메가인 오드레아 드뷔쉬는 그곳에 왔다. 알파의 파티에 오메가가 참석한다면 무슨 이유에서일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지고 있었다. 제멋대로 뻗어가는 안 좋은 생각에 혼자 마음 졸이고 좌절했다가 화가 나기까지 했다. 이제는 클레이 디어가 그 오드레아 드뷔쉬와 몸을 겹치고 있는 장면까지 떠오르자 밀리안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더는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빨리 그 여자를 그곳에서 빼 내오고 싶었다. 당신은 나와 계약했으니까. 그러니…… 그동안에는 나만 봐야 한다.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클레이 디어도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