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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62화 (6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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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방해한 것 같아 손을 치우려고 하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하라며 속삭인다. 항상 정신없이 그를 휘두르던 때와는 다른 힘없는 목소리는 어딘가 안타까움마저 느껴지게 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그의 손은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한 행동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안 돼. 가지 마.”

여자의 팔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려던 찰나였던 터라 밀리안은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부드러운 쿠션 위로 그의 몸이 살짝 튕겨 올랐다 떨어졌다.

“읏!”

“괜찮아?!”

“……네?”

“다치지 않았어?”

그가 낸 짧은 신음에 누워 있던 여자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정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댔다. 밀리안이 괜찮다고 해도 계속 손을 더듬어 혹시라도 다치지 않았나 확인을 했다. 넘어졌다 하더라도 고작 소파 위였다. 침대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푹신한 쿠션이었고, 신음을 흘린 이유는 놀라서였다.

“대니얼을 부를까?”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고작 이런 것에 주치의까지 부르려는 기세에 밀리안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눈을 마주한 채 침착하게 괜찮다고 다시 한번 말을 하자 그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놀라게 하지 마.”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정말 놀랐던 것 같아서, 밀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소동을 길게 이어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온 클레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내렸다. 가슴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감촉보다도 빠르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더 신경 쓰였다. 자신의 심장마저도 그 박동의 속도를 따라가려고 했다.

나가려던 것도 잊고 밀리안은 계속 그 심장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 * *

결국 대니얼 크래포드가 호출됐다. 이미 자정을 향해가고 있는 시간이었고, 놀라서 달려온 것과는 달리 너무 멀쩡한 밀리안의 상태에 푸근한 인상에 짜증이 서렸다. 밀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진찰을 받았다.

정작 그는 이 상황이 부끄러워 빨리 진찰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는데, 클레이가 뒤에서 자꾸 훈수를 두었다. 최대한 친절한 얼굴을 유지하려던 대니얼의 미간에 깊은 선이 죽죽 그어졌다.

“대충 보지 마. 혹시라도 뇌출혈이 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적당히 좀 해. 넘어진 곳이 별채 온실의 소파라며? 그 소파에 머리를 찧어서 무슨 뇌출혈이야?”

“어머니는 고작 그거에……, 아니다. 정말 문제가 없는 거지?”

클레이가 잠깐 흘린 말 한마디에 짜증을 내던 대니얼의 표정이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밀리안은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직감했다. 고작 소파에 머리를 찧은 것만으로도 사색이 되던 클레이와 ‘어머니는 고작 그거에’까지만 듣고도 표정이 바뀌는 대니얼. 모르면 바보일 정도로 확실한 단서였다.

“아무튼, 별 이상 없으니까 난 이제 가도 되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늦은 시간에 오시게 해서요.”

대니얼이 투덜거리며 가방을 다시 챙겨 들자 밀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늦은 시간에 이곳까지 오게 만든 원인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탓이었다. 밀리안의 사과에 대니얼이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에요. 밀리안이 미안할 게 어딨어요. 괜찮아요.”

“그래. 그렇게 머리 숙이지 마. 넌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뿐이니까.”

쟤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 줄 알면 그렇게 쉽게 고개가 내려가지 않을 거라며 클레이가 밀리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 그렇지.”

아, 진짜 한 대만 치고 싶다. 대니얼의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걸 클레이가 말하니 속이 울컥 뒤집혔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밀리안이 은근히 풀어진 얼굴로 클레이의 품에 안기는 모습도 눈꼴셨다.

얄밉기 짝이 없는 친구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혼자만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닌, 쌍방으로 이어진 연애를. 정관 수술을 하겠다고 왔을 때도 생각했지만, 저 클레이 디어가 단 한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정착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렇게 살을 빼라고 클레이가 구박해도 별생각이 안 들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왠지 다이어트를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니얼은 아예 자신이 있다는 걸 신경도 쓰지 않고 제 남자에게 키스하는 클레이를 흘겨보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 * *

그녀는 자신이 누운 침대 끝에 어정쩡한 자세로 걸터앉은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어딘가 불편한 얼굴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 무슨 일이…….”

“별일 없었어. 그냥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잠깐 혼자 있었던 것뿐이야.”

“…….”

클레이는 잘못 건드렸다는 듯 표정이 어두워진 밀리안을 보며 미소지었다. 힘이 없는 처연한 미소에 남자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까처럼 팔을 뻗어 밀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한 번쯤은 저항했을 남자가 순순히 그녀에 끌려왔다. 남자의 손이 멈칫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닿았다.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걸까. 클레이는 밀리안의 배에 얼굴을 묻으며 입가의 미소를 감췄다.

기분이 묘했다. 클레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수술 따위가 그녀를 이런 감정에 들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핸드폰을 통해 봤던 숫자가 계속 잔상처럼 눈앞을 떠돈다. 떠나고 싶어 하는 밀리안의 마음이 그 숫자를 통해 전해졌다. 아무리 잘해준다고 하더라도 밀리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그에게 한 행동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강제로 붙잡아 강간하고 약점을 잡고 휘둘렀던 과거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지 말걸. 모든 게 뜻대로 될 거라는 자신감에 한 행동이었다. 항상 그랬으니까.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을 텐데.’

물론 당할 일도 없겠지만, 만약을 가정한다면 그랬다. 그런데 이 순진한 남자는 담담히 헤어질 날만 손꼽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 차라리 그녀를 향해 감정을 쏟아내던 밀리안이 더 상대하기 편했다.

밀리안이 무섭다는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제게 마음을 주지 않고 벗어나려는 남자를 어떻게 해서든 잡을 자신이 너무나 예측 가능해서 무섭다는 거였다.

부모님이 생각났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면서 집이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항상 겁에 질려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런 아버지의 집착에 질린 어머니는 더욱 말라 갔고, 약해졌다. 결국 죽음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뒤따라갔다.

그런 짓을 똑같이 반복하게 될까 봐 무섭다. 밀리안도 어머니처럼 자신만 보면 두려워할 것 같아서. 평생 밀리안의 뒷모습만 볼 것 같아서.

선례를 이미 봤으면서도 똑같은 길을 가려고 했다. 만약 중간에 밀리안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속내를 터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끝도 없이 그를 몰아쳤으리라. 그의 마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왜 아직도 제게 넘어오지 않는지 의아해하며.

‘멍청한 것도 정도 것이지.’

그는 짐승이 아닌데, 짐승을 길들이듯 굴었다. 클레이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의 손을 느끼고 옅게 웃었다. 하나만 해, 밀리안. 마음은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면서 행동은 계속 여지를 주니 자꾸 착각하게 된다. 오고 있다고. 자신을 향해 천천히 오고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밀리안의 배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어정쩡하게 손을 허공에 세운 채 당황한 남자의 얼굴을.

“키스해줘.”

당신이 내게 입을 맞추면 뭐든 참을 수 있다. 사실 당장이라도 임신시키고 싶었고, 제 옆에 주저앉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난폭한 본능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의 감정을 통제하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통제당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클레이는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 * *

‘뭐지.’

밀리안은 제 무릎 위에 몸을 말고 누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라도 손을 멈추면 깨물어대는 탓에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서재에서 보기 전까지는 존재도 몰랐던 고양이는 정원에 나와 있는 그를 향해 꼬리를 세우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다리에 몸을 비벼대며 움직였다. 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고양이가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는데 당당하게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당연하다는 듯 몸을 쓰다듬게 했다.

‘정말 닮았어…….’

분명 클레이 디어와 떨어져 있는데도 이 고양이 때문인가, 계속 그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 고양이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종잡을 수 없는 성격도, 외모도 클레이 디어와 똑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죽은 부모님을 생각하느라 잠시 혼자 있었다던 클레이는 다음날 일어나니 보이지 않았다. 벤틀로가 잠시 일이 있어 며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회사까지 나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 분명 그녀가 없어 편해야 할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처연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제게 키스해달라던 클레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항상 강하기만 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보인 약한 모습에 살짝 쾌감을 느꼈던 자신이 혐오스럽다. 빛나는 곳에서 사랑만 듬뿍 받았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내면에 상처가 있다는 것에 미약한 동질감을 느꼈다.

밀리안의 표정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클레이 디어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비열하구나. 못났다, 밀리안 디모시.

캬아아-!

고양이의 풍성한 털을 쓰다듬으며 연달아 한숨을 내쉬는데 그의 무릎에 누워 있던 고양이가 털을 세우며 날 선 소리를 냈다.

“추운데 왜 여기 나와 있어?”

“사장님?”

여자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왜 벌써? 며칠은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자는 하루 만에 돌아왔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온 여자는 그의 무릎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표정을 구겼다.

“……체셔가, 왜 여기에 있지?”

캬아! 캬아앙!

여자의 목소리에 고양이도 날카로운 위협 소리를 냈다. 마치 제 영역을 침범하는 경쟁자를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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