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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다니? 어떤 경력을 지닌 직원이길래 그가 특별하다고 말할 정도란 말인가.
전용기부터 헬기까지 있는 곳이니 서재를 관리하는 사서가 있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님에도 어딘가 기가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집사인 벤틀로뿐만 아니라 곳곳에 유니폼을 입은 메이드들이 있었다. 클레이 디어와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기척이 지금은 잘 보였다. 어떻게 그동안 몰랐지 싶을 정도로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아직도 작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의 저택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임에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현대와 중세의 문명이 우아하게 합쳐져 있었다. 이 건물 자체만으로도 예술품에 가까웠다.
벤틀로를 따라 걸으니 어느새 별채로 들어와 있었다. 지하부터 이어진 계단이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밀리안은 색색의 빛이 쏟아지는 천장을 홀린 듯 바라봤다. 한참을 서서 올려다보는데 옆에서 벤틀로가 말을 붙였다. 진중한 목소리에서 은은한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아름답습니다.”
“별채 다락에 천체망원경이 있으니 날이 좋은 날에는 별을 보기 좋습니다.”
“네?”
“다음에 주인님과 함께 보시지요.”
“…….”
“돌아가신 마님께서 별을 좋아하셔서 만든 것인데,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방치 중입니다.”
사실 주인님께서 별채 다락에 가시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묘하게 씁쓸한 목소리와 표정에 밀리안은 의문을 삼켰다.
벤틀로의 안내를 따라 복도와 계단을 번갈아 걸으니 어느새 별채의 서재 앞에 도달했다. 책이 이 정도로 많으면 텁텁한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서재 내부는 완벽한 습도와 공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만 관리하는데 드는 돈이 얼마일까.
“그럼 조금 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천천히 둘러 보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한쪽 손을 등 뒤에 댄 채 우아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하는 벤틀로를 향해 밀리안도 마주 허리를 굽히려고 했다. 하지만 곧 허리를 세운 벤틀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막았다.
“익숙해지십시오. 한낱 고용인에게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됩니다.”
“……저도 고용인일 뿐입니다.”
“글쎄요. 지금은 단순한 고용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벤틀로가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밀리안은 서재 입구에 홀로 선 채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했던 기분은 서재로 들어간 이후 그나마 나아졌다. 서재라고 하기보다는 도서관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큰 규모였다. 수없이 많은 책의 양에 감탄부터 새어 나왔다. 다 읽을 수는 있는 건가. 매일 책만 읽는다고 해도 힘들 것 같은 양이었다.
하긴. 책을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부자들은 특유의 재력을 과시하는 버릇이 있다고 들었다. 디어 가의 재력이라면 이 정도는 티끌만큼의 타격도 가지 않을 테니 사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서가 있다고 했는데.’
밀리안은 서재를 둘러 보았지만, 사람의 인기척을 찾을 수가 없었다. 퇴근한 걸까. 하지만 그랬다면 벤틀로가 사서에게 부탁하라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워낙 넓어서 찾을 수가 없는 건지도. 어차피 무슨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던 터라 차라리 잘 된…….
냐아아-
고양이? 분명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서재와 고양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밀리안은 여전히 들리는 고양이 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머문 지 꽤 되었지만, 고양이를 본 적은 없었다. 클레이도 고양이를 키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몰래 저택 안으로 숨어든 게 아닐까 싶었다.
냐아옹-
“너 여기 사는 애니?”
고풍스러운 작은 쿠션 위에 도도하게 앉은 고양이는 정성껏 관리한 태가 났다. 고양이가 앉은 쿠션도 사람이 쓸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사람도 섣불리 구매할 수 없는 브랜드 로고가 쿠션에 붙어 있더라도.
‘아주 특별한 사서죠.’
밀리안은 벤틀로의 의미심장했던 말을 기억해내고 웃어버렸다. 고양이 사서라니. 정말 특별한 사서긴 하다.
노란색이라기보다는 황금색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털은 매우 길고 부드러워 보였다. 특히 목의 갈기가 매우 풍성했다. 고양이와 시선을 맞춰 몸을 숙인 뒤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니 고양이는 커다란 녹색 눈동자로 그를 훑어봤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 머리 위에서 고고하게 내려보는 품위마저 보였다.
클레이 디어처럼.
그래. 고양이는 딱 클레이 디어를 닮았다. 털의 색도 눈동자 색도, 그 누구도 자신 위에 없다는 듯한 당당함도 그랬다. 클레이 디어가 잠시 고양이로 모습을 바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허공에 뜬 손을 내리려던 순간, 고양이가 그의 손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려 얼굴을 비볐다.
“아!”
냐아아!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자 고양이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울었다.
“손? 손 다시 달라는 거니?”
냐아아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 고양이의 울음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꼬리의 털마저 부풀었다. 앙증맞은 송곳니 두 개를 내밀며 울어대서 밀리안은 주춤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울음이 멈췄다. 도도하다고 생각했던 고양이가 그의 손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비벼대더니 갸르릉 목을 울렸다. 털이 풍성한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양이는 기분 좋아 보였다. 도도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 본 그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릴 리가 없으니까.
밀리안은 고양이에게 손을 상납한 채로 고개만 돌려 서재를 둘러보았다.
서재의 형태는 독특했다. 원형으로 둥글게 짜여있었고, 꼭 미로처럼 보였다. 드문드문 나무 사다리가 있었고, 주저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긴 방석도 있었다. 누군가가 사용하긴 하는 걸까. 인기척이라고는 그와 고양이뿐인 서재는 무척 고요했다. 심란했던 마음이 진정될 정도로 평온한 침묵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첫 섹스를 할 거야.’
클레이 디어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서재의 고요함을 빌어 잠시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각오해두라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밀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손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
고양이가 그의 손을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기분 좋더니 대체 뭐에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밀리안이 난감한 얼굴로 고양이를 보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고양이는 앉아있던 쿠션에서 뛰어내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밀리안은 송곳니의 흔적이 남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로 같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할 정도는 복잡한 건 아니었지만, 미로는 길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간혹 끝이 막혀서 되돌아가기도 했고, 다른 출구로 들어가 보려다 한 바퀴를 그대로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밀리안은 책을 보러 왔다가 놀이공원에 온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장미 덩굴로 만들어진 원형의 방이 있었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방은 묘하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은 동화 같은 느낌이 났다.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그러면서도 잘 어울렸다.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들어가도 되나? 혹시 잠겨 있을지도 몰라 손잡이를 돌려보니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꼭 들어오라는 듯이. 묘한 기대감이 그를 휘감았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후회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클레이 디어가 그 안에 있었다.
* * *
방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던 예상은 적중했다. 방 안은 붉은색의 장미로 도배되어 있었다. 로맨틱한 풍경이었지만, 어딘가 섬뜩하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푸른 수염의 방 같은 느낌이었다.
클레이 디어가 고개를 돌려 밀리안을 바라봤다.
“여긴 어떻게……. 아, 벤틀로의 짓이로군.”
항상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던 여자는 이상할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선명하던 눈동자에 그림자가 져 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분명 평소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맞는데, 이상하게 가까이 가기 꺼려졌다. 밀리안은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나가겠습니다.”
“가지 마.”
이리 와. 여자가 하얀 팔을 내밀었다. 검은색 슬립과 그와 같은 디자인의 짧은 가운을 걸쳐 여자의 피부가 더 하얗게 빛났다. 마치 악마가 현신한 것처럼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밀리안이 움직이지 않자 여자는 재촉하듯 손을 까딱였다. 지금 저 손을 잡으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언뜻 들었지만, 몸은 홀린 것처럼 여자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밀리안은 여자가 이끄는 대로 그의 키보다 훨씬 큰 소파에 앉았다. 붉은 장미가 꽉 채워진 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클레이 디어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계속 이곳에 있었던 걸까. 어색한 기분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는데 여자가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사장님?”
“…….”
클레이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더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밀리안도 입을 다물었다. 적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리를 세운 채 정면만 보던 밀리안은 결국 고개를 내려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클레이를 바라봤다.
‘주인님은 별채에 가시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벤틀로가 그에게 했던 말이 스쳤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클레이 디어를 마주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서…….
아니. 이들의 생각을 알아서 뭐 할까. 안다고 한들 어차피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린 한숨이 체념처럼 흘러나왔다.
눈을 감은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시선을 끌었다. 아마도 그녀를 모르는 곳에 두어도 모두 이 여자를 바라볼 것이다. 클레이 디어는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렇게 어딘가 힘이 빠진 얼굴을 하더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 피부 위로 녹아내릴 듯 빛나는 금색 실이 흩어졌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