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60화 (6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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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는 자리로 돌아온 밀리안이 재킷도 벗지 않은 채 의자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축 처진 얼굴이 어지간히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자신이 과도하게 그를 만지고 있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모두 밀리안의 탓이었다. 싫다면서 왜 그렇게 좋은 소리로 울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게다가 밤새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빨아서 잠 못 들게 한 사람은 밀리안이었다. 자신은 그보다 아주 조금 빨았을 뿐이었다. 유두가 아릿하게 서서 괴로운 사람은 밀리안뿐만이 아니다. 그의 휴대폰에 뜬 숫자를 보고 다운된 기분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뭉개고 아이처럼 자는 밀리안의 얼굴에 더욱 심란해졌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막판에 그의 유두를 물고 빨아 꼿꼿이 세운 뒤 자신의 유두로 비벼 울리고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사람 마음도 모르고 재깍 돌아오지 않고 에릭 드와이스와 구석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도 그녀의 기분을 어지럽히는데 한몫했다.

“벗어, 밀리안.”

“네? 뭐, 뭘…….”

“재킷하고 베스트. 더운데 굳이 안에서까지 입고 있을 필요가 없지.”

“사장님 그건,”

“내가 셔츠까지 벗으라고 한 것은 아니잖아?”

여자의 말 행간에는 말을 듣지 않으면 셔츠까지 벗기겠다는 통보였다. 밀리안은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혹시라도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지만, 클레이는 한번 그를 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밀리안은 고작 그를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움까지 느끼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탈했지만, 지금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클레이 디어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위안을 해야 했다.

근래 이상할 정도로 다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변덕이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일관되게 행동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시시때때로 기분이 바뀌어서 도통 종잡기 어려웠다.

모니터의 전원을 켜고 다음 일정을 확인한 밀리안은 새로 생성된 클레이 디어의 일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연말, 크리스마스 앞뒤로 휴가가 길게 잡혀 있다. 사전에 클레이에게 이런 일정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이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음?”

긴 금발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개를 따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흩어졌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이 그녀에게 닿아 마치 금이 녹아 그대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우아한 속눈썹과 그 아래에서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여자가 눈을 깜박이는 것에 따라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밀리안은 새삼스럽게 여자의 외모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언제나 새롭게 느껴졌다.

“밀리안?”

“……네?”

클레이의 목소리에 밀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하는 밀리안을 보며 여자의 웃음이 짙어졌다.

“뭐야. 물어볼 게 있다더니 왜 넋을 놓고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더 봐도 돼. 나도 좋은 거 보고 있으니까.”

“무슨.”

“다음에는 조금 더 살이 비치는 셔츠를 입혀야겠어. 오늘 입은 건 생각보다 덜 비치네. 뭐 그래도 아주 예뻐.”

“―!”

“눈요기로 아주 좋아.”

그녀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달은 밀리안이 뒤로 물러서자 클레이가 질 나쁘게 웃었다.

“그렇게 귀엽게 구니까 자꾸 놀리고 싶어지잖아.”

대체……. 밀리안이 깊은 한숨과 함께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연말에 휴가를 잡으신 걸 확인했습니다. 사전에 들은 바가 없어서, 혹시 사적인 일정입니까?”

“음. 사적이라고 한다면 그렇겠지. 왜?”

“그럼 제가 수행하지 않는 것이,”

“그건 안 되지. 너와 가려고 잡은 일정인데.”

클레이가 아예 의자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짧은 치마가 한쪽으로 꼰 다리에 더 위로 올라가 하얀 허벅지가 도드라졌다. 검은색 가터벨트의 끈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 밀리안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붉어진 순진한 남자의 귓불을 빤히 바라보던 클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섬에 가기로 했잖아.”

“그건.”

주말에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일정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아니, 정말 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해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클레이가 그의 손을 잡고 제게로 이끌었다. 손끝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았다. 강하게 잡은 것도 아닌데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여자의 목소리는 은밀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듯 더 낮아졌다.

“그날, 너와 할 거야.”

“―!”

“크리스마스에 첫 섹스라니 낭만적이지? 이건 네가 아무리 키스를 해도 물려주지 않을 거니까 너도 각오해 둬.”

밀리안은 제게 떨어진 통보에 입술을 잘게 떨었다. 왜 그토록 여자의 외모에 순간순간 놀라게 되는지 깨달았다. 매번 정신없이 휘둘리다 보면 그녀의 외모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그 알맹이는 본능에 충실한 사나운 짐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정신을 차리는 것도 힘겨운 와중에 여자의 외모를 생각할 틈이 있을 리가 없다.

* * *

클레이는 밀리안을 먼저 집으로 보낸 뒤, 혼자 대니얼의 병원을 찾았다. 왜 또 왔냐고 속으로 욕하던 대니얼은 클레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진짜 할 거야?”

“할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말해봐, 닥터 크래포드.”

“…….”

없다. 없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정관 수술이라니. 그것도 디어 가의 주인이자 L&M 기업의 대표가 오메가 하나 어쩌지 못하고 정관 수술까지 받아가며 눈치를 보다니. 그 클레이 디어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아니, 물론 이 방법이 밀리안 디모시를 생각하면 최선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실을 벤틀로도 알아?”

“당연하지.”

“베, 벤틀로가 이 수술을 동의했단 말이야?”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

클레이의 날카로운 대답에도 대니얼은 멍청한 얼굴로 입만 벙긋댔다.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지만, 남자와는 달리 정소가 배 안에 숨어 있는 여자 알파의 수술은 까다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보통 피임은 남자 오메가가 주로 하지, 여자 알파가 하지 않는다. 묶은 것을 푸는 것도 몸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당사자인 클레이도 모자라 벤틀로까지 동의를 했다고 한다. 와, 벤틀로가 동의를 했다니. 클레이의 몸에 아주 작은 이상이라도 생기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벤틀로가. 대니얼은 그 깐깐한 벤틀로의 마음을 잡아버린 밀리안 디모시의 능력에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 말수 적고 어딘가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 남자가 대체 무슨 수로?

수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한 시간도 안 돼서 수술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클레이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와 별다를 것 없어 보였다. 아무리 크게 절개를 하지 않는 복강경 수술이라지만, 그래도 마취에서 깰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역시 괴물은 괴물이라고 대니얼이 질린 얼굴로 감탄했다.

“야, 그래도 하루라도 입원하고 가지?”

“됐어. 집이 더 편해.”

“물론 벤틀로가 어련히 알아서 간호하겠지만…… 아까 말한 주의 사항은 꼭 지켜야 한다? 한 달간 섹스는 하면 안 되고, 또.”

“알아. 다 들었으니까 피곤하게 굴지 마.”

옷을 갈아입은 클레이가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고 대니얼의 말을 끊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에릭이 그녀의 클러치를 챙겨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벤틀로가 이미 달려와 클레이의 수발을 들었겠지만, 그에게는 보살펴야 할 또 다른 사람이 생겼기에 저택에 남았다. 물론, 수술 경과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달받고 있었다.

* * *

따로 볼일이 있다며 어딘가로 사라진 클레이를 두고 혼자 돌아온 밀리안은 모처럼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라서 진정이 되지 않는다. 첫 섹스.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섬에서 하겠다고 통보를 한 여자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자 알파와의 섹…… 거기까지 휴대폰 웹브라우저 검색창에 적어나가던 밀리안은 그 아래로 줄줄이 뜨는 연관검색어에 놀라 창을 닫았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하고 또 넋을 빼고 허공을 보다 정신을 차렸다. 섹스. 정말 하는 건가? 아니, 그게 처음 여자와 한 관계와 다른가? 밀리안은 고통스럽도록 강렬했던 쾌감을 어설프게 기억했다. 마치 악몽을 꿨던 것처럼 뚜렷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성기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것이 더 생생했다.

밀리안에게 그렇게 강렬했던 일이 제대로 된 알파와의 섹스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충격적이었고, 미칠 것 같던 섹스가, 클레이 디어에게는 참고 또 참아야 했던 관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정말 제대로 된 섹스를 하면 어떻게 되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려던 밀리안은 나쁜 습관이라고, 고치라던 여자의 말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고 방이 아니라 ‘집’이라고 해도 될 법한 크기의 침실을 둘러봤다.

홀로 방에 있는 기분이 묘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클레이 디어의 저택은 며칠 머물렀다고 해서 익숙해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너무 크고, 화려했다. 특히 혼자 있게 되니 더 낯설게 느껴졌다.

똑똑―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오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에 밀리안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리조차 없이 문이 열리고 늘 그렇듯 인자한 얼굴을 한 벤틀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밀리안과는 달리 벤틀로는 집사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검은색 정장을 빈틈없이 갖춰 입고 있었다. 밀리안 역시 클레이 디어의 부하직원에 불과한 터라 벤틀로가 그의 편의를 신경 쓰는 게 불편했다.

“흐음. 혹시 책 좋아하십니까? 디어 가의 서재는 웬만한 도서관 못지않습니다.”

“서재요?”

“시간을 보내기 충분할 겁니다. 한번 둘러보시죠.”

“……저는.”

“너무 한 곳에 앉아있기만 하면 사람이 무기력해집니다. 기왕 이곳에 머물기로 하신 이상 최대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게 저의 의무기도 하고요. 벤틀로가 채근했다. 더 거절할만한 명분이 없어 밀리안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다른 것에 신경을 쏟을 일이 필요하긴 했다.

“서재는 별채에 있습니다. 사서가 있으니 필요한 책이 있으면 부탁해도 되고, 검색해서 직접 찾으셔도 됩니다.”

“사서요?”

“네, 아주 특별한 사서죠.”

벤틀로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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