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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계심을 낮추긴 해도 이렇게까지 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클레이는 축 늘어진 밀리안을 안아 들었다.
“도수가 낮은 걸 가져온 게 아니었어?”
“적당한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하여간.”
제 성격이 이렇게 형성된 원인의 반이 벤틀로의 책임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심계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밀리안을 안고 계단을 올랐다. 벤틀로도 뒤따랐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잠들면 그 기억이 꽤 오래간다고 합니다.”
“흐음?”
“오늘은 평소와 달리 많이 웃으신 것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드디어 옳은 방식을 찾으신 것 같군요.”
“첫 연애잖아. 나도 어설플 때가 있어.”
강압적으로 찍어 눌러서 길들이는 것보다 밀리안의 호감을 사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달았는데, 실패한 방법을 고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았는지 밀리안은 조금씩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누군가의 기분을 살펴본 적은 처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대가가 밀리안의 웃음이라면 그렇게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득에 가깝다.
클레이는 밀리안이 빼앗겼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하고 싶었다. 목석처럼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메마르게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다시 기억하기 괴로운 기억이라면 차라리 새로운 기억으로 덧붙여버리면 된다. 하나하나 덧붙여 나가면 그의 좋았던 기억은 모두 자신과의 것으로 물들 것이다.
“저는 밀리안 님께서 평생 이곳에서 머무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좀 더 다정하게 대하라며 참견을 덧붙였다. 기가 막혔다. 대체 이보다 더 어떻게 잘해주라는 건지. 클레이가 툴툴거렸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더 최선을 다하십시오. 부족합니다.”
“참나. 누가 보면 밀리안의 부모인 줄 알겠어.”
“한눈에 봐도 정에 굶주린 티가 나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눈이 가고 아껴주고 싶고, 가지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클레이는 벤틀로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밀리안을 다시 고쳐 안고 벤틀로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임신은 무조건 밀리안 님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너도 그 소리군.”
대니얼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클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주말 내내 적극적으로 둘 사이에 개입한다 했더니, 자신이 섣부른 짓을 할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밀리안을 임신시키는 것은 매우 유혹적이었지만, 뻔한 미래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대답을 듣지 못한 벤틀로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약속해주십시오.”
우뚝, 걸음을 멈춘 클레이는 한숨을 쉬고 다시 몸을 돌렸다.
“벤틀로. 난 어린애도 바보도 아니야.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정말, 이시죠?”
“그래. 그러니 이제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마. 밀리안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쉽게 입을 열어?”
“……조심하겠습니다.”
침실에 다 와서 벤틀로가 먼저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클레이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 밀리안을 침대에 눕혔다. 벤틀로는 침실 안을 정리하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이제 자신이 끼어들 시간이 아니었다.
클레이는 밀리안만 눕히고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밀리안이 그녀의 옷을 잡아당겨 덩달아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옆에 눕자 밀리안은 그녀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알콜에 체온이 올라가긴 했지만, 여전히 서늘한 손이 피부에 닿자 클레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풍만한 가슴이 완전히 뭉개지도록 움켜잡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주말 내도록 키스만 하고 밀리안을 건들지 않았던 클레이는 생각지도 못한 밀리안의 공격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밀리안에게 닿은 몸이 홧홧했다.
순간 그대로 덮쳐버릴까, 그런 충동이 일었지만 클레이는 자신의 셔츠를 풀어 밀리안이 마음껏 만지도록 내버려 뒀다. 정말 낮과 밤의 갭이 큰 남자였다. 아니, 이성이 무너졌을 때와 평소의 그의 차이랄까. 이렇게 자신의 몸을 좋아하면서 왜 이렇게 튕기는 건지.
클레이는 제 어깨에 묻은 밀리안의 머리를 끌어 가슴에 묻었다. 잠을 자긴 글렀네.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가장 낮은 조도로 바꾼 뒤 밀리안의 허리를 당겼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밀리안은 제가 곁에 누우면 온기를 찾아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바짝 달라붙었다. 그래서 더 좋다. 아무도 이 남자의 이런 점을 보지 못했으리라는 우월감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
이 남자는 항상 지친 기색으로 잠들었다. 깨어있을 때는 어떻게든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잠들고 나면 약한 속이 모두 드러났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거였다. 자다가 울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품을 찾아 기어들어 오기도 했다. 따뜻한 체온에 닿고 나서야 안도한 듯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남자를 지켜보는 것이 새로 생긴 클레이의 취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밀리안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겼다.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주었던 보람이 있게 뻣뻣했던 머릿결이 부드러워졌다. 손에 감기는 감촉이 좋았다.
그때 밀리안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침대로 흘러내렸다. 집에서까지 이런 것을 보고 있었다니. 클레이는 손을 뻗어 검은색 기계를 주웠다. 걸리적거리니 테이블로 옮겨 놓을 생각이었다. 주우면서 액정에 손가락이 닿았는지 검었던 화면이 밝아졌다.
‘D-328’
숫자의 정체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와 자신의 계약이 끝나기까지의 날짜. 느른하게 풀어졌던 클레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기분 좋아. 밀리안은 말랑한 무언가에 얼굴을 비볐다. 그 말랑한 것의 주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밀리안,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으음.”
“회사, 가지 말까?”
회사? 이성을 자극하는 말에 밀리안의 눈이 번뜩 떠졌다. 눈앞에 하얀 살이 보였다. 도톰하게 부푼 살과 그 중심에 솟아 있는 짙은 색의 정점이 지금까지 그가 얼굴을 비벼댔던 것이 무언지 깨닫게 했다.
“―!”
“아, 그렇게 세게 잡으면 아파.”
이렇게 부드럽게 잡아 달라며 여자의 손이 그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예민한 곳을 자극당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밀리안은 자신이 여자의 가슴을 세게 움켜잡았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왜? 계속 만져도 되는데.”
클레이는 어딘가 피로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는 한 번 더 밀리안의 성기를 주무른 뒤, 더 미련을 두지 않고 손을 뗐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잠 못 자게 한 벌은 톡톡히 받아낼 거야.”
“네?”
“당신이 하도 가슴을 만지고 빨아대서 한숨도 못 잤어.”
“……네?”
“괜찮아. 귀여웠으니까.”
조금 피곤하긴 해도. 클레이는 그의 뺨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뒤 그를 끌고 욕실로 갔다. 이제 회사에 갈 시간이었다.
* * *
클레이 디어는 아예 밀리안의 자리를 사장실 안쪽으로 옮겨버렸다. 주말이 지나 출근을 하고 나니 이미 그렇게 변경되어 있었다. 사장실 자체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밀리안의 책상 하나 옮겨오는 것 정도는 자리를 차지하는 수준도 되지 않았지만,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블라인드를 내려야만 비서실과 사장실이 분리됐던 이전과는 달리 따로 블라인드를 내릴 필요가 없이 벽으로 가려버렸다. 비서실도 각기 직원별로 파티션 구간을 넓혀서 개인 공간을 기존보다 두 배 이상이 늘었다.
출근한 직원들은 사전 예고도 없이 불시에 바뀐 사무실 정경에 어리둥절했지만, 달라진 공간이 이전보다 훨씬 좋았기에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다만 고작 주말 이틀 만에 공사를 마쳤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이제 사장실과 완벽한 분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건 클레이 디어에게도, 직원들에게도 무척 좋은 일이었다. 밀리안에게만 안 좋은 일이었다.
밀리안은 벽에 밀쳐진 채 클레이의 키스를 받는 중이었다. 여자는 저택에서도, 차에서도 모자라 회사에서조차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여자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눈을 감을 정도였다.
“으응.”
“하아.”
정신없이 얽혔던 혀가 천천히 풀어졌다. 밀리안은 거의 풀어진 눈으로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그녀의 혀를 따라 살짝 빠져나온 혀가 새삼 구미를 당겼다. 클레이는 남자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쥐고 붉은 혀에 가볍게 입술을 뭉갰다.
“이렇게 바꾸니까 편하네.”
“……설마 이러려고…….”
“너도 눈치 안 보고 좋잖아.”
이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밀리안이 한 말 때문이었다. 밀리안은 너무 자주 사장실로 호출하는 클레이 디어 때문에 사원들이 이상하게 볼까 무섭다고, 조금만 회수를 줄여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럼 부르지만 않으면 되냐고 클레이가 다시 질문했고, 밀리안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결과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순진하긴.”
“……하아.”
클레이는 밀리안의 볼을 살짝 깨물었다. 거죽밖에 없던 얼굴이 요즘 살이 붙어 만지는 맛이 났다. 물론 살이 붙은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손으로 쥐고 있는 남자의 엉덩이도 적당히 살이 붙었다. 물론 그래도 작았지만.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로 밀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쪽에 침실도 만들었는데, 구경해 볼래?”
“아, 아니요.”
“굳이 사양할 거 없어.”
“정말 괜찮습니다!”
대체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침실까지 만들어 놨다는 거지.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와의 계약 이후 처음 출근한 날부터 여자의 아래에 깔려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창백하게 질렸다.
차라리 사무실이 달랐다면 밖으로 도망칠 수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졌다. 조금만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돌이킬 수 있다면 그때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건데……. 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원래의 사무실로 되돌리는 것 역시.
“이제 일을 해야…….”
“무슨 소리야. 오전에는 일정이 따로 없는 거 아는데.”
밀리안이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고 움직이는 순간 그의 엉덩이를 움켜쥔 여자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살짝 양쪽으로 벌렸다가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손길에 밀리안의 다리가 살짝 풀렸다.
“흣.”
“이렇게 예민해서 어떡해. 다른 여자가 만져도 이렇게 반응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참나.”
남자는 멋도 모르고 순진한 소리를 했다. 내가 빠질 정도인데 당연히 개나 소나 눈독 들이겠지. 클레이는 자신의 심미안이 굉장히 높다고 자부했다. 지금도 고작 한 달을 옆에 끼고 가꾸니 더욱 화사하게 살아났다. 매일 공들여 마사지한 피부는 창백하기만 했던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살도 적당히 올라서 딱 보기 좋았고, 꾸준히 하는 운동에 자세도 더 좋아졌다. 머릿결은 항상 만지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