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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57화 (5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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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까마득히 남은 계약. 이제 겨우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밀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화면을 끄고 벗은 옷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두었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입고 나가자 너무 넓고 호화로운 수영장의 모습에 밀리안의 눈이 커졌다. 클레이 디어의 욕조도 굉장히 커서 수영을 해도 될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수영장에 비하자면 정말 작은 수준이었다. 저택의 한 층을 모두 수영장으로 만든 수준의 크기였다. 이런 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클레이 디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이 여자의 부가 다시금 실감났다. 아니, 이것도 아주 일부일 뿐이겠지.

먼저 수영장 안에 들어가 있던 클레이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물에 잠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밀리안은 여자의 손짓이 꼭 뱃사공을 바다에 빠트리려는 사이렌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홀리는 외모도 그랬지만, 여자에게 잡히면 수렁에 빠지는 것도 그랬다. 밀리안은 잠시 주저하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영할 줄 알아?”

“어릴 때 배우긴 했는데, 지금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어릴 때, 밀리안이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에는 부모님은 그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배우고 싶어 했던 것, 여행, 가지고 싶은 것은 대부분 주었다. 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벌써 십여 년이나 물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물 안에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밀리안은 착잡한 얼굴로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에 하얗게 빛나는 물을 바라봤다.

이리로. 이미 물 안에 있는 여자가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밀리안은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미 물에 뜨는 방법을 체득했으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

차가우리라 생각했던 물은 적당히 시원한 정도였다. 물에 둥둥 떠 있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끼자 기분이 묘했다. 여자의 말처럼 모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물과 어우러졌다.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는 높이였지만, 밀리안은 능숙하게 물을 가로질러 헤엄쳤다. 조금 전에 들어가기 싫다고 망설였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물 안에 있는 게 기분 좋았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수영을 했던 터라 밀리안은 레일의 끝까지 도달하기 전에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물에 빠지기 직전 매끄러운 팔이 그의 허리에 감겼다.

“―!”

“조심해.”

짧은 순간에 물을 그대로 들이켠 밀리안이 숨을 헐떡거리며 토해냈다. 여자가 그를 안은 채로 레일 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를 들어 올려 수영장 밖으로 빼냈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벤틀로가 수건을 들고 쫓아왔다.

“바로 손을 놓고 헤엄치길래 잘하는 줄 알았더니 사람을 왜 이렇게 놀라게 해?”

“……죄송합니다.”

물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선베드에 앉아 쉬게 됐다. 밀리안은 물을 먹은 것도 아주 짧았고, 이미 멀쩡해졌는데도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이 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에 민망해졌다. 여자의 손은 여전히 그의 등을 쓸고 있었다. 꼭 사고 친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의 잔소리는 더 길게 이어졌다.

“벤틀로 얼굴 좀 봐. 나이 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 아니야.”

“아니요. 무시하시니 됐습니다. 오히려 초보자를 이렇게 수심이 깊은 수영장으로 데리고 온 주인님이 잘못한 거죠.”

“오, 벌써 밀리안 편을 드는 거야? 나 조금 섭섭해.”

“두 분 중에 편을 든다면 밀리안 님을 편드는 게 맞는 겁니다.”

사고를 친 건 밀리안 님이 아니라 주인님이라며 벤틀로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밀리안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닥터 크래포드를 부르겠습니다.”

“아, 아니요! 정말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괜찮습니다.”

제발 일어나시라고, 밀리안이 애원하듯 말했다. 별거 아닌 일로 너무 과한 반응을 했다. 벤틀로도, 클레이 디어도 모두. 밀리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클레이가 낮게 웃었다.

“이제 벤틀로의 관심이 네게 옮겨갔군. 진정한 과보호가 뭔지 알게 될 거야.”

“네?”

“주인님께서 처음 저택으로 모시고 온 분인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

처음? 물론 클레이 디어는 파트너를 호텔로 부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이라니. 아니, 이런 거에 의미 부여를 하지 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밀리안 디모시. 밀리안은 머리에 덮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수건은 과할 정도로 부드러워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벤틀로는 한참 밀리안을 들여다보고는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오겠다며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옆에 앉아 새로운 수건을 그의 어깨에 감쌌다.

“오랜만에 하는 것치고는 꽤 잘하던데? 체력만 조금 더 키우면 되겠어.”

“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벤틀로의 말대로 내 실수가 맞아. 수심을 좀 더 낮추는 건데 괜찮을 줄 알았어. 그래. 수영에 능숙해지면 다음에는 섬에 갈까? 이런 수영장보다 바다가 더 기분 좋을 거야.”

섬. 푸른 바다 안으로 들어가 산호와 물고기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밀리안은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었다.

밀리안의 상기된 얼굴을 가만히 보던 여자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귀여워.”

여자의 말에 밀리안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러자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에는 혀까지 얽혔다. 두 사람 모두 작은 수영복만 걸친 채여서 물기에 젖은 살갗이 맞닿았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여자는 천천히 몸을 그의 선베드 쪽으로 이동해 그의 몸 위를 차지했다.

“으응.”

“정말, 너무 귀여워.”

짧게 얽혔던 혀가 떨어졌다. 밀리안은 젖은 눈으로 제 위에 올라온 클레이를 바라봤다. 여자는 몸이 거의 드러나는 검은색 비키니만 걸치고 있었다. 물기를 대충 닦은 그와는 달리 여자의 살갗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조명에 물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밀리안은 여자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풍만한 가슴 언저리를 그리다 좁은 골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쩐지 목이 마르는 갈증을 느끼고 밀리안이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에 여자는 밀리안의 시선을 따라가 자신의 가슴을 바라봤다.

“만지고 싶어? 벗을까?”

“읏, 아니…, 아!”

클레이는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작은 비키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만지게 하자 밀리안이 얼굴을 붉혔다. 손을 빼내려고 바둥거리는 손을 겹쳐 쥐고 주무르게 했다. 서늘한 손가락 사이로 유두가 뭉개졌다.

“아……. 좋아. 좀 더 세게 만져줘.”

“……그, 그만 하세요. 여, 여긴.”

밀리안은 달뜬 신음을 흘리는 여자를 보고 황급히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러다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돌아온 벤틀로가 소리도 내지 않고 선베드 옆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밀리안은 반사적으로 클레이의 몸을 뒤로 밀었다.

“왜?”

“뒤, 뒤에 벤틀로가…….”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밀리안의 말에 벤틀로는 오히려 잔잔한 미소만 흐뭇하게 짓고 있었다. 클레이가 말을 받았다.

“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잖아. 그럼 계속해도 돼?”

“아니요!”

대체 어디까지 계속한다는 말인지. 밀리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자 클레이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넓은 수영장 안에 여자의 웃음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 * *

“스트레이트 플러시.”

“…….”

여자가 제가 가진 카트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칩을 쓸어가려고 했다. 그때 벤틀로가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아직 이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카드를 펼쳤다. 밀리안도 클레이도 테이블을 보다가 칩을 쓸어가는 벤틀로를 멍하게 바라봤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저게 정말 나오는 거구나. 밀리안은 고작 원 페어 하나만 가진 자신의 카드를 공개하지 않고 아래로 내렸다.

“재미없어.”

클레이가 와인을 들이켜며 툴툴거렸다. 처음 시작은 클레이와 밀리안 둘만의 게임이었는데, 밀리안의 요청으로 벤틀로가 합류했다. 연승행진을 하던 클레이가 강력한 벤틀로의 참전에 힘을 못 쓰고 연이어 패배했다.

“밀리안이 스트립 하는 걸 보나 했더니.”

“…….”

벤틀로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 너무 적나라해서 밀리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말을 하는 클레이도 듣고 있는 벤틀로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는데, 밀리안 혼자만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다.

포커 게임도 클레이 디어가 제안한 것이었다. 뭐든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수락한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키스, 그다음에는 혀까지 얽은 입맞춤까지 받아낸 여자가 다음에는 스트립을 내기로 걸었고, 카드 게임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밀리안이 때마침 와인과 그에 곁들일 핑거푸드를 가지고 들어온 벤틀로를 잡고 늘어졌다.

그때만 해도 벤틀로가 클레이를 이겨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벤틀로는 아주 손쉽게 클레이를 꺾었다. 존경에 찬 눈으로 보는 밀리안을 향해 벤틀로가 멋들어지게 다듬은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주인님께 포커 게임을 가르친 사람이 저니까요. 제자에게 질 수는 없죠. 게다가 제가 지면 밀리안 님께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실 테니 좀 더 힘을 냈습니다.”

“…….”

뒤의 말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밀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요즘 일부러 방해하는 느낌인데, 내 생각일 뿐이겠지?”

“오, 제가 주인님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해입니다.”

“흐음.”

미심쩍어하는 클레이를 무시하고 벤틀로가 밀리안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밀리안 님, 와인을 더 가져올까요?”

“네? 아니요. 많이 마셨습니다. 괜찮아요.”

“모처럼 잘 드셔서요. 한 병만 더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럼, 도수 낮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클레이가 다시 와인을 마셨다. 밀리안의 과거를 조사해본 것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경계심이 잔뜩 누그러져서 평소와는 달리 표정이 밝았다. 와인을 마신 것도 긴장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줬겠지. 오늘 여러모로 밀리안의 새로운 표정을 많이 봐서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강하게 당기기만 했으니 이제는 조금 풀어줄 때긴 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에릭이 밀리안의 조사를 마쳤고, 클레이는 휴일에 맞춰 잘 활용했다.

긴 시간 동안 쌓인 처연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시작이 좋다. 게다가 밀리안이 벤틀로와 친분을 쌓는 것도 좋은 징조 중 하나였다. 하나하나 버리기 아쉬운 것을 쌓아 놓으면 계약이 끝나더라도 쉽게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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