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처음에는 통증이 더 앞섰다면, 그 뒤에는 시원한 감각이 찾아왔다. 세심한 손길은 관절 하나하나를 녹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했다. 마사지가 끝났음에도 밀리안은 묘하게 풀어진 얼굴로 매트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클레이가 그의 옆에 누웠다. 가까이에 마주한 아름다운 얼굴이 부담스러워 눈동자를 돌리는데 뺨에 손가락이 스쳤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야릇한 의도를 가진 손길이었다.
“침대 위에서 짓는 표정을 짓고 있어.”
“아니요.”
“유혹하는 거야?”
“……전혀 아닙니다.”
여자는 그의 대답에 개의치 않았다. 둥글게 휜 눈이 심상치 않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밀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일을 치를지도 모른다. 도망치듯 여자에게서 멀어지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른하고 관능적인 소리에 화끈거리는 귀를 문지르는데 언제 왔는지 벤틀로가 차가운 물이 든 컵을 건넸다.
물 안에 허브잎 몇 개와 레몬 조각이 떠다녔다. 단숨에 들이키고 얼음 하나를 입안에 넣고 굴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달콤하면서 묵직한 향기와 등에 닿는 부드러운 가슴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접촉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접촉에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여자의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물기에 젖은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볼에 밀어 두었던 얼음이 겹쳐진 혀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점점 면적이 줄어들었다. 클레이의 체온이 다른 사람에 비교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탓이었다.
차가운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밀리안의 손에 들려 있는 컵에서 얼음 하나를 물더니 다시 입술을 겹쳤다. 컵 안의 얼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반복하더니 드디어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을 뗐다.
“시원해.”
“…….”
밀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클레이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혼자만 상쾌해 보였다. 수도 없이 몸을 겹친 이후 그의 몸은 클레이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쉽게 반응했다. 다리가 풀려 거의 여자에게 안긴 상태로 멍하게 보고 있자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모양 좋은 입술이 그의 귓가에 붙었다.
“눈이 야해. 하고 싶어?”
“무, 무슨 말을……!”
다른 사람도 있는데. 밀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벤틀로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는 듯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딘가 흐뭇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더 부끄러워서 밀리안의 얼굴이 붉게 익었다.
온천수가 채워진 욕조는 넓었고, 밀리안은 되도록 클레이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었다. 되도록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리고 있었는데 여자의 발이 그의 발에 닿았다. 간지러울 정도로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그의 발등을 덮고 문질렀다.
“아직도 삐졌어?”
“……남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런 게 신경 쓰여?”
“당연―.”
당연하지 않냐고 말을 하려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클레이의 표정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나와 있을 때는 나만 신경 써.”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여자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남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건 저를…….”
“너를?”
“아닙니다.”
“흐음.”
말을 해서 뭐 할까. 어차피 자신과 상식이 맞지 않는 사람인데. 이 관계의 시작조차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채로 이루어졌는데 말을 한다고 그게 통할까 싶었다.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려서, 한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제 발등을 덮은 여자의 발이 보였다. 고작 이런 사소한 것조차도 자신이 그녀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나와 있을 때는 날 봐야지.”
“사……, 클레이.”
“그래.”
잘했어. 여자의 손이 그의 턱 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길이 미묘하게 야해서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밀리안을 클레이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가 너와 연애하는 사실을 티 낼 수 있는 사람은 벤틀로뿐이야. 고작 한 사람 앞에서만 자유롭게 너와 있을 수 있는데 그것도 싫다고 한다면…….”
“무슨……?”
“그냥 다 까발려 버릴까?”
“―!”
피가 발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섬뜩하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는 평소와 다름없어서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게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말했잖아. 난 지금 많이 참고 있다니까?”
“시, 싫, 싫습니다. 계약을…….”
“맞아. 계약서에 썼지.”
여자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여자의 입술이 의미심장하게 휘었다.
“내가 직접 밝히지만 않으면 되잖아. 안 그래?”
“―!”
“그럼 내가 계약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문제가 없지.”
“…….”
“농담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그럴 것 같았으면 이렇게 말로 먼저 내뱉지 않았을 거라며 웃는다. 밀리안은 자신이 쓴 계약서에 수많은 맹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빨리 보완해야 한다는 것도.
“정말 그러지 않겠다는 증거를, ……받고 싶습니다.”
들어줄까. 불안한 심장이 요동쳤다. 경직된 그와 달리 여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선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왜? 계약서를 고쳐줘?”
“네.”
“키스.”
여자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눈마저 내리뜨고 그가 입 맞추기를 기다렸다. 밀리안은 순간 목이 턱 막혔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위를 덮어 내렸다. 아래로 내려간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따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여자의 입술에 키스했다. 매끄럽고 뜨거운 혀가 겹쳐졌다.
클레이의 손이 서슴없이 그를 끌어당겼다. 섬세한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샴푸를 뿌려 거품을 내고 두피 구석구석을 마사지하며 문질렀다. 이래서였다. 자꾸 속에 있는 말을 해도 여자가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착각을 하는 게. 머리로는 다 포기한 척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선을 넘으려 들었다.
‘내가 너와 연애하는 사실을 티 낼 수 있는 사람은 벤틀로뿐이야.’
그런데도 사뭇 아쉽다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았다. 연애라고? 당신과 내가? 결코 이런 관계가 연애라는 것일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여자가 근래 보이는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다.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드는 잔인한 말은 여전했지만, 고작 키스만 하면 그가 바라는 것을 했고 제멋대로 굴려다가도 참았다. 어머니께 전화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밀리안은 자신의 머리를 뒤로 밀고 샤워기로 샴푸를 닦아내고 있는 여자를 올려다봤다.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기는커녕 평생 시중만 받고 살아왔을 여자가 즐거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왜? 어디 불편해? 눈에 거품이라도 들어갔어?”
“……아니요.”
“혹시 모르니 눈 감고 있어.”
여자는 아예 욕조 옆에 있는 선반에서 깨끗한 수건을 빼내 그의 눈가에 올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미 시야가 가려졌지만, 여전히 여자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밀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 * *
하지만 그렇게 다짐해도 소용없다는 듯 클레이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다음 날, 클레이가 밀리안을 끌고 간 곳은 수영장이었다. 근육에 무리 없이 기초체력을 쌓기 좋은 것이 수영이라면서. 주말 내내 키스를 제외하고는 여자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식사를 챙기고, 그를 씻기고, 이제는 운동까지. 밀리안은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꼭. 꼭…….
‘내가 너와 연애하는 사실을 티 낼 수 있는 사람은 벤틀로뿐이야.’
왜 자꾸 여자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걸까. 연애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제멋대로 사람을 휘두르는 여자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키스해줘.’
여자와 한 수많은 행위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마치 꿈에서 만났던 ‘그녀’처럼.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이후로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았다. 아니, 그 전부터……. 언제부터였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 꿈을 꾸고, 또 꿈에 그녀를 만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정말 몽정에 불과했나. 그렇게 생생했는데…….
밀리안은 고작 꿈에 나왔던 여자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긴, 클레이 디어에게 그렇게 많이 괴롭힘을 당하고 또 그런 꿈까지 꾸면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그럼에도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이제야 다시 기억해놓고 아쉬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밀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데 한숨을 몇 번이나 쉬어? 내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고.”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이 듬뿍 담긴 시선에 밀리안은 당황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한숨이 나와서.”
“나쁜 버릇이야. 고치도록 해.”
“……네.”
다시 한숨을 내쉬려다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는 잘 했다며 그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스치듯 입술이 닿았다. 가볍게 입술 표면만 꾹 눌렀다가 떨어지는 키스가 몇 번이고 그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마주한 녹색 눈동자가 따뜻한 빛이 감돌았다. 밀리안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감은 그의 눈꺼풀 위에도 부드러운 감촉이 웃음과 함께 내려앉았다.
여자는 어차피 체모가 없으니 이대로 들어가도 되지 않겠냐며 벤틀로가 건넨 수영복을 뺏으려 했다.
“여긴 너와 나밖에 없어. 네 몸 구석구석을 다 봤는데 굳이 수영복을 입을 필요가 있어? 편하게 생각해. 욕조에 옷을 입고 들어가지는 않잖아.”
욕조와 수영장은 그 용도부터가 달랐다. 그리고 그는 별로 수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해왔던 것을 모두 지우려고 노력한 것 중에는 수영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따뜻한 섬에 그를 데려가 물에서 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밀리안은 그들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어린 시절 사랑받았던 기억은 오히려 고통이 되었다. 그날들을 떠올리며 다시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쳤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받았던 것이 많아서 그가 지워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취미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어차피 약값으로 돈이 많이 들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점 때문이었다. 몸이 편해지면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근래 본의 아니게 휴가를 몰아서 사용하긴 했지만…….
“그럼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사, …클레이 님만 들어가십시오.”
“까다롭긴.”
여자는 툴툴거리며 그에게 수영복을 내밀었다. 밀리안은 솔직히 놀랐다. 사실 말뿐인 거절이었다.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클레이 디어에게 끌려갈 거라고 반쯤 포기한 채였다. 별거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말을 들어준 것도 처음이라 밀리안은 얼떨떨하게 수영복을 받아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벗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클레이 디어가 자신의 핸드폰을 던져 부신 이후, 바로 그날 새로 개통한 핸드폰을 쥐여줬다. 번호도 예전과 달랐다. 그가 다시 연락하지 않는 이상 부모님과 연결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회사로 찾아올 수는 있지만, 남들 앞에서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런 것은 걱정되지 않았다.
밀리안은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잠금 버튼 위에 적힌 숫자가 보였다.
‘D-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