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55화 (55/144)

-55-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되진 못해도, 또 완벽하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대니얼은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았다.

“밀리안에게 먼저 동의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뭐?”

“가볍게 노는 상대 아니라며? 지금도 밀리안은 딱히 널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강제로 임신까지 시켜봐. 그땐 널 어떻게 보겠어?”

“…….”

클레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먹히는 것 같아 대니얼은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는 진심으로 친구의 연애가 걱정됐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 클레이. 이건 친구로서의 조언이야.”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친구의 조언이라.”

“야! 솔직히 너도 연애는 이번이 처음이잖아!”

매번 남자를 만난 것도 그냥 섹스파트너에 불과했으면서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 것조차 가볍게 취급했다. 대니얼은 네 마음대로 하라며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클레이는 그런 대니얼을 향해 뭐라고 구박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바닥으로 떨어진 펜을 주워 건넸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밀리안이 임신을 하겠다고 할 수가 있지?”

“뭐……?”

“넌 잘 아는 것 같으니까 말해봐.”

“그, 일단 좀 잘해주고.”

“지금도 잘해주고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껴주고 있다고.”

아니, 분명히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잘해주는 거겠지. 밀리안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지만 대니얼은 그 말을 하는 대신 다른 쪽으로 대안을 제시했다.

“……그, 그럼 밀리안이 원하는 걸 해준다든가?”

“그러다 당장 헤어지고 싶다고 하면?”

“…….”

사납게 눈을 빛내는 클레이의 질문에 대니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헤어지라고 말하면 그대로 목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

대니얼은 클레이가 비웃는 것처럼 짧은 웃음을 흘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응접실을 나가버린 뒤에야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씨발. 내가 다신 쟤 연애에 참견하나 봐라! 밀리안 디모시가 도망가라고 기도했으면 했지, 클레이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니 밀리안이 서 있었다. 다리가 저린 듯 무릎을 살짝 굽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 안에 있었는데 설마 계속 서 있었던 건 아니겠지? 클레이는 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앉아있지 왜 서 있어?”

설마 계속 서서 기다린 거냐는 클레이의 추궁에 밀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닥터 크래포드와의 면담은 이제 끝난 겁니까?”

“그래. 별 이상은 없다고 했어.”

“다행이군요.”

“걱정했어?”

“…….”

“야박하긴.”

살짝 시선을 내린 밀리안의 눈에 아릿한 그림자가 졌다. 정갈하고 단정한 겉모습 안에 숨길 수 없는 우울함이 가득 베어 나왔다. 내 옆에 있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클레이는 다시 한번 저 남자를 완전히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곁에 두고 끊임없이 아껴주면 언젠가는 저 야박한 마음까지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밀리안과 내 아이.’

분명 사랑스러울 테지. 자신의 아이를 배에 품은 밀리안도, 그와 저를 닮은 아이도. 분명 아이의 존재는 클레이의 삶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자신 역시 부모님의 삶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살아왔으니까. 분명 그들의 피를 받은 자신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아이라는 수단으로 상대를 묶어둘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고작 오메가의 마음 하나를 가지지 못해 언제라도 달아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다니. 이렇게 여유가 없어진 것도 자신답지 않았다.

그녀가 가만히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밀리안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까?”

“대니얼이 노폐물을 빼는 약을 한 달 늘렸어.”

“……네?”

그게 무슨. 밀리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클레이는 그런 밀리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하러 가자.”

“……거, 거짓말, 아닙니까?”

“내가? 대니얼에게 확인시켜줘?”

마침 응접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던 대니얼은 클레이의 말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밀리안의 시선도 그에게 옮겨졌다.

“정말 한 달……을 더 먹어야 합니까?”

제발 클레이 디어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말해달라는 듯한 간절한 시선과 함부로 입을 놀리면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험악한 시선을 동시에 받은 대니얼은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살에 파묻힌 작은 눈이 정신없이 밀리안과 클레이를 오갔다. 그러다 눈을 아래로 내리고 중얼거렸다.

“미, 밀리안의 상태로는 한 달도 부족할, 수도 있어요…….”

“―!”

충격받은 남자의 얼굴은 대니얼의 죄책감을 미친 듯이 자극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밀리안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의 처방은 이게 맞았다. 하지만 밀리안이 자신이 처방한 약으로 클레이에게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맞는 처방을 하고서도 양심이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 옆에 있는 여자가 당신을 임신시키려고 해요! 도망가요, 밀리안!”하고 다 불어버리고 싶었다. 대니얼은 입을 뻐끔거리다 클레이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얼굴로 저는 이만 바빠서 가 보겠다고 말하며 그 미치도록 불편한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 * *

아침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바로 화장실로 끌려갔다. 밀리안은 딱 삼십 분에 맞춰진 시계를 보며 성기를 꽉 쥐고 있었다. 성기 안에 꽂힌 플래그가 움찔거리는 몸을 따라 미묘하게 안을 건드렸다. 당장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절박함과 맞물려 자극은 더 그를 괴롭혔다.

“흐으으…… 읏.”

“십 분 남았어.”

클레이는 그의 앞에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귀엽게도 밀리안 제게 입을 맞추고 스스로 견뎌볼 테니 건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왔다. 솔직히 조금 기가 막혔다. 밀리안은 아주 빠르게 그녀를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먼저 키스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밀리안의 건강과 관련된 부분이라 이건 예외로 둘까 하다가, 스스로 견디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별미일 듯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얼굴에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밀리안이 약을 먹은 뒤부터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지켜만 보는 중이었다.

소변을 보고 싶어 다리를 꼬아가며 안간힘을 다해 참아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클레이는 간질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저 모습을 보니 부른 배를 감싸 쥐고 끙끙거릴 밀리안이 상상이 돼 더 속이 탔다. 정말 임신시키면 안 되나? 이성은 안된다고 말했고, 성급한 욕망은 당장이라도 저 납작한 배를 통통하게 만들자고 속삭였다.

그러다 상처받아 넋을 놓은 밀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밀리안은 딱히 널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강제로 임신까지 시켜봐. 그땐 널 어떻게 보겠어?’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알고 있었지만, 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색달랐다. 기분이 아주 더럽고 짜증 났다. 클레이는 부글거리는 속을 성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밀리안을 보며 달랬다.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삼십 분이 채워졌다.

“이제 싸도 돼.”

“나, 나, 나가세요…….”

“뭐?”

“나가시라고요.”

당장이라도 쏟아내고 싶어 안달하는 얼굴로 하는 말이라니. 클레이는 팔짱을 낀 팔을 풀고 다리를 굽혔다. 그녀는 밀리안과 시선을 맞춘 채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덜덜 떨고 있는 게 손으로 느껴졌다. 빨리 싸버렸으면 좋겠는데, 저 상태로 기어이 참고 있는 게 또 가학심을 자극했다. 강제로 요도에 꽂혀있는 플래그를 뽑아버리고 싶어 손끝이 간지럽다.

“아직도 부끄러워? 괜찮아, 이미 몇 번이나 봤던 거잖아.”

이제 와서 뭐가 부끄럽냐고 그냥 싸버리라고 속삭이는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그러니까 이제 나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보, 보실 만큼 보셨으니까…….”

“…….”

똑똑한데? 클레이는 그녀가 한 말을 잡고 역으로 공격하는 밀리안의 대응에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밀리안은 그녀가 나가지 않으면 끝까지 참을 기세였다. 물론 계속 버틴다면 결국 못 참고 싸겠지만, 시간을 너무 오버해 버리면 오히려 몸에 무리가 갈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강제로 밀리안의 성기에 꽂힌 플래그를 뽑아버렸을 텐데 지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뭐, 밀리안의 말대로 볼 만큼 본 거긴 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일어나려고 할 때,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클레이의 눈이 제멋대로 깜박였다. 지금…….

“빠, 빨리……, 으읏.”

클레이가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밀리안이 다시 입술을 비볐다. 초조해서 한 행동이겠지만, 효과는 죽여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화장실에서 나온 뒤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짜릿한 교성과 함께 무언가를 쏟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이는 손으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쳤다. 정신을 차리려고 한 행동인데 별로 효과는 없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엽다. 정말 귀여워서 미치겠다.

* * *

아침을 먹은 뒤 잠시간의 휴식 후 트레이닝실로 끌려 나온 밀리안은 클레이의 지시에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성욕이 과한 것만 제외하면 클레이 디어는 몸에 해로운 것을 즐기지 않았다. 술이나 마약, 담배 등은 입에 대지 않았고, 철저하게 계산된 영양식을 먹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게 밀리안에게까지 강제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시작했는데 횟수가 반복되자 시야가 흐려졌다.

“하, 하아, 윽!”

“한 번 더.”

“이, 이제 그만…….”

“그럼 오늘은 기절 안 할 자신 있어?”

얼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툭하면 정신을 잃는다고 클레이 디어가 이를 갈며 그의 체력을 올리는 중이었다. 자신 있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망설이자 여자의 눈매가 휘었다.

“없으면 한 번 더 하자.”

“…….”

이제 더 이상은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누울 수 있었다. 매트 위에 엎드려 헐떡이는데 등 뒤에서 여자가 체중을 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딱 근육이 뭉친 부분을 짓누르자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아앗!”

“야한 소리.”

“그게, 아흣, 아, 아픕, 흐아!”

“그러니까 야한 소리라고.”

침대에서 내는 소리와 너무 비슷하다는 말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중에도 원망이 들었다. 비슷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프니까. 클레이 디어와의 섹스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강렬한 쾌감만큼이나 아픔도 컸다. 그러니 소리가 비슷하게 나오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목과 등을 지나 엉덩이 쪽으로 손이 내려왔을 때는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건전하게 뭉친 근육만 풀어주고 여자의 손이 떨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