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53화 (53/144)

-53-

온 회사가 들썩거렸다.

외모만은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클레이 디어가 평소와 달리 화사한 미소를 뿌리고 있었다. 출근 때부터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들어와 사장의 성격에 치를 떨던 직원들조차 그 빛나는 얼굴에 넋을 놓았다. 저 성격에 저런 얼굴이라니. 미인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지만, 저 정도까지 아름다우면 오히려 해로운 존재였다. 그녀가 뿌려대는 문란한 스캔들과 냉정한 일 처리에 그렇게 질색을 하면서도 막상 클레이 디어의 얼굴만 보면 속수무책으로 홀려서 문제였다.

그 고통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비서실 직원들은 사장이 차라리 블라인드를 내려주길 바랐다. 상사의 기분이 좋은 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사장은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줬다. 차라리 폭풍이 치기 전 맑은 하늘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제는 그저 눈 호강한다고 좋아하던 레이까지 다리를 달달 떨며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었다.

맥시는 단체 메신저 창에 밀리안을 소환했다. 평소라면 메신저가 아니라 직접 물어봤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사무실 내에서 큰 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밀리안 사장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모릅니다.]

[아, 밀리안은 알 줄 알았는데.]

[저기 밀리안. 혹시 사장님께 블라인드 좀 내려달라고 부탁]

“…….”

거기까지 본 뒤, 밀리안은 그 아래로 쭉 내려가는 채팅창을 꺼버렸다. 정면에 있는 모니터만 바라보며 키보드를 쳤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 여기저기에서 몰려드는 서류들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오전까지 처리해야 할 마지막 서류를 훑고 있을 때였다. 상의 안쪽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에 밀리안은 모니터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복도 쪽으로 나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밀리안 디모시입니다.”

[밀리안! 이렇게 전화를 받을 거였으면서! 설마 엄마 전화만 안 받은 거니?!]

“…….”

밀리안은 히스테릭하게 쏟아지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하필.

[듣고 있는 거니?! 요즘 집에는 왜 안 들어가는 거니? 이웃에게 물어봐도 널 본 사람이 없더구나. 설마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

[아, 세상에. 맙소사. 지금 아버지가 너 때문에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는 있니?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니? 넌 약만 받아먹으면 끝이지?]

더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제가 뭘요? 왜 저 때문입니까?”

[네가 그 짐승 같은 것으로 태어났으니까!]

“―!”

심장을 내리꽂는 잔인한 말에 밀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머니는 그동안 쌓인 분노를 모두 그에게 쏟아냈다. 정신없이 귀에 꽂히는 어미니의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온몸을 난도질했다. 빨리 전화를 꺼버려야 하는데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토해내더니 이제는 빌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매번 하던 방식이었다. 속에 쌓인 독을 폭언으로 푼 다음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제발 빨리 떠나 줘. 제발, 제발 부탁이야. 그동안 엄마 충분히 힘들었어. 이제 좀 놔주렴. 응? 이민 수속은 모두 마쳤다니까? 너만 가면 모두 끝나. 내일, 내일 당장이라도 비행기 표 끊어줄까? 어차피 그만둘 회사 뭐 하러 정리까지 해줘. 일단 여행 비자로 간 뒤에,]

“끊어.”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누군가가 채갔다. 밀리안은 어느새 제 앞에 서 있는 클레이 디어를 멍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종료 버튼을 누른 것도 모자라 그의 핸드폰을 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플라스틱과 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제 것이 망가졌는데 우습게도 밀리안은 그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

고장 난 기계처럼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여자가 그의 턱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미쳤어? 왜 저딴 말을 계속 듣고만 있어? 네가……, 밀리안?”

여자는 무엇 때문인지 말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러지? 밀리안은 문득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닿은 여자의 손은 뜨거울 정도로 체온이 높았다.

“괜찮아?”

“잠시만.”

“뭐?”

밀리안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여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자는 따듯하니까. 그에게 체온을 나눠주고도 남을 만큼 뜨거워서 그래도 될 것 같았다.

클레이는 스스로 제 품에 안겨든 밀리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올려 느리게 그의 머리를 쓸었다. 에릭을 통해 밀리안의 모친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나왔지만, 밀리안은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밀리안을 끌어안은 상태로 더 구석을 향해 이동했다. 이 상황을 이용하면 지금 이 모습을 남들 눈에 띄게 하는 건 쉬웠다. 그녀의 책임이 아니기도 했고. 그럼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남자를 더 괴롭게 만들 정도로 비열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에릭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의 잔재와 휴대폰이 깨지면서 생긴 소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클레이는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밀리안을 따라 바닥으로 함께 주저앉았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밀리안이 안정되길 기다렸다.

어떻게 해 줄까? 아예 이 나라에서 사라지게 만들까? 애써 쌓아 올린 기반을 무너트리고 잔뜩 망가트려 도망 다니게 해줄까? 존경의 눈으로 보던 시선들이 모두 등을 돌려 차갑게 외면당하게 할까?

밀리안의 등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무뚝뚝한 척 해봤자 속은 여리디여린 남자가 제 부모를 해쳐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리 그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성격이 못됐다.

모든 보복은 그녀가 알아서 할 것이다. 밀리안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

오전 내내 밀리안의 행동으로 좋았던 기분은 이미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래, 이것은 밀리안의 복수가 아니다. 충분히 즐기기도 전에 제 심기를 망가트린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클레이는 밀리안의 얼굴을 제 어깨에 묻게 한 뒤, 모두 처리했다는 에릭의 신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죄송합니다.”

밀리안은 자신과 함께 바닥에 앉아있는 클레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왜 자신이 항상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될 상대에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번 똑같은 후회를 하면서.

“어떻게 보상할 생각인데?”

“……그건.”

“한 시간을 이 더러운 바닥에 앉아있었더니 기분도 별로야.”

“…….”

차가운 목소리에 밀리안의 고개가 더 아래로 떨어졌다.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가진 게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보상한다 한들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유한 여자는 코웃음도 치지 않을 것이다.

밀리안이 우울한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자 클레이가 기가 막혀 짧은 웃음을 토했다. 그리고는 남자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일에서는 그렇게 똑똑하게 굴면서 상대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은 둔해 빠졌다.

“바보야?”

“네?”

“어제 가르쳐 줬잖아. 내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아.”

설마 키스를 말하는 건가? 어제도, 오늘도 수차례 했던 그것만으로 보상이 된다고? 밀리안은 여자가 눈을 감는 모습을 보면서도 얼떨떨했다. 활짝 펼쳐진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입술이 한 번 붙고 떨어졌다. 밀리안은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한 번 더.”

똑같은 말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밀리안의 입맞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여자의 기분을 풀기 위한 행위였는데……. 마지막 입맞춤이 끝났을 무렵, 밀리안의 표정도 눈에 띄게 풀어져 있었다.

풀리지 않은 것은 밀리안의 부모를 향해 이를 갈고 있는 클레이의 분노뿐이었다. 그녀는 밀리안의 콧등에 짧게 입술을 비비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숨겼다.

* * *

디모시 여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명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풀려났는데, 아이의 회사로 가려던 찰나 재수사를 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변호사는 대체 뭘 하고 있길래, 그 비싼 수임료만 받아먹고 남편을 움직이게 하는 거지?

나름대로 유명인사였던 남편이 비리를 저질러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나자마자 주변에서 그녀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낮잡아 보는 그들의 시선에 디모시 여사의 신경이 갈수록 얇아졌다. 그런데도 매주 나가는 모임을 빠질 수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하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치 제 발 저린 것처럼 모임에 불참하는 순간 소문은 꼬리를 물고 더 부풀 것이다.

모두 밀리안, 그 아이 때문이었다. 하필 그런 짐승 새끼가 제 배에 숨어들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망쳐버렸다. 그 아이만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모두 괜찮아질 것 같다. 모두 그 아이 때문이니까!

제 연락을 무시하던 아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번호로 연락을 하니 받았다. 어찌나 기가 막히고 황당하던지. 저 때문에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지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 일부러 연락을 피한 게 분명했다.

속이 상해 조금 야단을 쳤다. 아주 조금뿐이었다. 그리고 이민 가겠다고 동의를 했으니 기왕이면 빨리 가달라고 애원하던 중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여자! 왜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연락도 안 되나 했더니 뒤로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거였다. 손이 다 떨렸다. 디모시 여사는 그때 밀리안이 회사에 있을 시간이라는 사실도 기억에서 지운 채, 아들이 정말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뒤에 다시 걸어도, 다른 번호로 걸어도 받지 않았고, 며칠 뒤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받아 잘못 걸었다고 끊어버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아들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악몽까지 꿀 정도였다.

초조하게 거실을 오가던 디모시 여사는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근래 마음고생이 심해 야위어 있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남편을 안으로 잡아끌고 문을 닫았다.

“여보? 이게 다 뭐예요?”

“…….”

남편의 손에 커다란 캐리어가 있었다. 여행이나 출장이 잡혔다는 말은 없었는데……. 디모시 여사는 불안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라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가라니, 어, 어딜요?”

“병원에서.”

“―!”

“매스컴까지 타서 일이 커졌다고. 분명 어제까진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말하더니 오늘은 당장 병원에서 나가라고 짐,”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소리 지르지 마.”

“지금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요? 항의는요? 왜 당신이 모두 뒤집어쓰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