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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속셈이지.’
좋아서 그런다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밀리안은 순진하지 않았다. 저 달콤한 미소는 오히려 경계심만 돋웠다.
순순히. 되도록 여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며 밀리안은 표정을 다듬었다. 그래야 빨리 질릴 테니까.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장단을 맞추며 고분고분하게 굴기로 각오했는데도…… 이런 속옷을 입고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건 수치스러웠다.
성기의 안쪽이 아직도 저렸다. 숨을 쉴 때마다, 살짝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여전히 삽입된 것이 안쪽을 찔렀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여자의 작은 속옷까지 입고 버텨야 한다니.
고작 단 하룻밤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빌어먹을 내기를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하지만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약점을 모두 쥔 상대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적을 차례인가?”
“……네?”
“줄줄이 내가 불리한 조건만 적어놨으니 나도 뭔가를 써야 공평한 거래잖아. 안 그래?”
이 내기 자체가 불공평하다. 밀리안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내리눌렀다. 참아야 한다. 잠시만. 잠시면 끝날 거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내가 이기면, 음…… 내가 원할 때마다 네가 다리를 벌리는 것으로 할까? 그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이 말이야.”
“…….”
“이 정도면 쉬운 조건 아니야? 너도 좋아하잖아.”
나 잘하는 것 같은데. 클레이 디어가 그녀답지 않게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게 보였다. 밀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각서, 적은 지 아직 오 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밀리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걸 참을 수 있을까?
“그딴 걸 왜…… 빨, 아니, 왜 하고 싶은 겁니까?”
“예뻐. 크기가 커서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것도 좋고, 목구멍까지 밀어 넣어주면 줄줄 싸는 것도 좋아. 듬뿍 싼 걸 삼키면 네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그래, 지금 네 얼굴처럼 말이야.”
“보지, 마십시오.”
“얼굴은 봐도 되는 거 아니었어?”
“아뇨, 보지 마세요.”
밀리안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자는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오히려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제발 다른 거로.”
“왜? 내기에 질 거 같아?”
그럼 굳이 이런 각서 따위를 적을 필요도 없겠군. 클레이 디어가 하얀 종이를 흔들었다.
“내 조신한 비서가 여자 속옷을 입고 세우고 줄줄 싸는 변태였다니.”
“사장님.”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슨 조건을 걸어도 상관없잖아.”
여자는 그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되는 도발이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여자의 말에 말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막다른 길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순히 말을 듣기로 했잖아. 그래야 여자가 빨리 제게 질릴 테니. 밀리안은 조금 전까지 세뇌하듯 머리에 주입했던 결심을 다시 되새겼다. 밀리안이 수치스러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제가 이기면…….”
“그래. 이기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곡선이 우아한 사인까지 마친 여자가 너는 절대로 내기에서 이기지 못할 거라는 듯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일할 시간이지?”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그에게 불길한 미래를 내포하는 것만 같았다. 밀리안의 심장도 덩달아 내려간 기분이었다.
* * *
클레이와 밀리안이 외부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에서는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슨 커플 룩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물론 아니겠지만…… 묘하게 밀리안과 사장님의 옷 색이 같은 계열이라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뭐가 같아. 밀리안은 거의 어두운 청색이고, 사장님은 비비드 계열의 푸른…… 그러고 보니 둘 다 포인트로 금색을 넣었네?”
“그것 봐요. 맥시도 좀 이상하죠? 솔직히 오늘 같이 출근한 것도 그렇고, 미묘하게 옷 색을 맞춘 느낌이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사장님이 요즘 스캔들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이게 가장 중요한 거죠. 맥시가 자신의 말에 조금 흔들린 기색이 보이자 레이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추리를 덧붙였다.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꼽아가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밀리안이 사장님하고? 사장님이 그동안 그렇게 많은 남자를 만나는 걸 봤는데 그 고지식한 밀리안이 넘어갈 리가 없지 않나?”
“……으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둘 다 일이나 해. 그리고 만약 사장님이 밀리안을 넘어트린 거면 난 바로 신고할 거야.”
“그건 나도! 나도 신고할 거야!”
“……진짜 연애를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두 여자의 열띤 기세에 레이가 조금 기가 죽은 얼굴로 다른 가정을 내밀었다. 맥시와 줄리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차갑게 식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줄리아는 한숨을 쉬고 키보드를 두드렸고, 맥시는 레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레이, 넌 정말 긍정적이야.”
“욕하지 말라니까요!”
“됐으니까 둘 다 그만 놀고 일해!”
줄리아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큰 소리를 냈다. 말수가 적어 과묵한 편이었던 줄리아의 짜증에 맥시와 레이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역시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화낼 때가 제일 무섭다고 속닥거리며.
* * *
게빈 스튜어트의 호텔로 이동하는 내내 밀리안은 고개를 돌린 채였다. 다리를 오므리고 미세하게 허리를 떠는 모습을 보니 대충 지금 상태가 어떤지 짐작이 가긴 했다.
그렇게 저와 하는 게 싫은 걸까. 고작 하루 얌전히 재워준다는 별 볼 일 없는 내기에 안간힘을 쓰고 버틸 만큼? 한 시간의 여유를 통째로 빼앗아 울려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항상 좋은 기분만 느끼도록 그에게 봉사하는 것은 자신인데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성욕을 참고 또 참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조금 전의 섹스조차도 그녀의 기준에서는 섹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우스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밀리안의 시선이 저에게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택에서라면 모르겠지만, 어느 누가 접근할지도 모르는 외부에선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클레이는 바짝 겹쳐 모은 밀리안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늘씬한 몸이 튀어 올랐다.
“밀리, 업무 중에는 나를 봐야지.”
“손이…….”
“너는 항상 날 보고 있어야 해.”
내가 뭘 하고 있더라도. 클레이는 자꾸 시선을 피하는 밀리안의 턱을 강제로 돌려 저와 마주 보도록 고정했다.
“그게 어려우면 그냥 내 애인으로만 지내든가. 난 그것도 나쁘지 않아.”
“……정부, 아닌가요?”
“그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밀리안 디모시.”
여자는 일을 못 하겠으면 저택으로 돌아가라며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밀리안은 그 말에 살짝 충격을 받은 자신에게 도리어 놀랐다. 고작 일주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여자는 저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저런 냉정한 얼굴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와 눈빛, 손길까지 전부 지금과 달랐다.
이게 당연한 건데 왜…….
“섹스도, 일도 모두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너야. 그 말에 책임을 져.”
너와 나는 정당하게 거래를 한 거라고, 녹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 밀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계속 날 보고 있어.”
엄격한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밀리안이 용서를 구하자 클레이는 다시 다정한 얼굴을 했다. 착하다며 그의 볼을 쓰다듬는 손길에 바짝 졸아붙었던 심장이 서서히 풀어졌다.
“특히 게빈 앞에서는 더 조심해. 손이 빠른 여자니까.”
“……네.”
손이 빠른 것으로 따지면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밀리안을 목구멍 밑으로 간신히 내려보내고 알겠다는 대답만 뱉어냈다. 정답이었는지 여자는 둥글게 눈을 휘었다.
* * *
호텔 최상층에 있는 라운지로 올라가자 게빈 스튜어트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넓은 라운지를 통째로 비워놓은 채 그녀는 제 무릎 위에 앉혀놓은 소년처럼 보이는 어린 남자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클레이와 밀리안, 그리고 경호원 몇 명이 함께 들어왔음에도 남자의 허벅지 안쪽에 집어넣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질색한 얼굴을 한 클레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비서는 그만 건드리는 게 어때?”
“뭐 어때. 이렇게 예쁜데.”
게빈 스튜어트는 요염한 얼굴로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고 무릎에서 내려보냈다. 여린 체구의 남자는 성인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밀리안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리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을 내린 상태에서도 소년처럼 어린 남자의 눈은 계속 게빈 스튜어트에게 가 있었다. 정작 그녀는 흥미가 뚝 끊어진 것처럼 그를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클레이 디어가 가십으로 유명한 이유는 우아한 외모로 문란함의 끝을 달리는 의외성 때문이었다면, 게빈 스튜어트는 온몸으로 방종한 성향을 뽐냈다. 게빈 스튜어트는 독을 품은 화려한 꽃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남자라면 오메가든 베타든 가리지 않았다. 그저 박을 성기의 구멍만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밀리안은 게빈 스튜어트를 만날 때마다 긴장했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희롱을 당하던 게빈 스튜어트의 비서를 동정했던 밀리안은 제 꼴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가 나지 않을 뿐, 그도 클레이 디어에 의해 장난감처럼 다뤄지고 있었으므로.
밀리안은 혹시라도 재킷이 벌어질까 두려워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앞섶이 노출되면 안 된다. 사무실에서부터 자극당한 채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열기가 성기를 달구고 있었다. 게다가 성기를 뚫은 콘돔이 여전히 그의 아래를 감싸고 있었고, 작은 속옷은 걸을 때마다 하체를 조였다.
티를 내선 안 되는 자리였다. 자칫 숨이 거칠게 흘러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막았다.
밀리안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클레이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그녀가 했던 경고가 떠올라 등이 바짝 세워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게빈 스튜어트가 밀리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드디어 자기 얼굴을 보네. 지난번에 찾아온다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섭섭하던 차였는데.”
“찾아온다고 했다고?”
“……사장님 그건.”
업무상의 일이었다. 그것도 클레이가 마음대로 일정을 파기한 날에 한 약속이었던 터라 밀리안이 황급히 사정을 설명하려던 찰나, 게빈 스튜어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건 밀리안과 나의 일이라 말을 해 줄 수가 없는데?”
“그래?”
은밀한 무언가가 둘 사이에 있는 것처럼 교묘한 게빈의 도발에 클레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