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41화 (41/144)

-41-

“밀리안 디모시. 오랜만이군”

“에릭…….”

에릭 드와이스. 검은색 정장을 입을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밀리안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비서실에 숨어든 오메가를 찾으라는 클레이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주일이라는 유예를 주었던 사람.

하지만 그의 호의에도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밀리안은 왠지 그를 마주 보기가 거북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클레이 디어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니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가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니 따로 인사를 시켜주지 않아도 되겠지?”

“네. 앞으로 밀리안이 비서실을 총괄해준다니 안심이군요.”

“꼬시느라 꽤 힘들었어.”

“……아.”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밀리안은 이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비서실을 총괄? 그건 이미 거절한……. 하지만 미묘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클레이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에릭이 밀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밀리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클레이는 그의 손을 놓아준 상태였다. 밀리안은 자신을 향해 내민 에릭 드와이스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에릭은 진중한 얼굴로 그의 손을 한번 힘주어 쥐고는 바로 놓아주었다.

“차에 타, 밀리안.”

“사장님부터 타십시오.”

“그 눈빛 좋은데? 섹시해.”

자신에게 정신없이 휘둘리던 남자가 아니라, 예전의 그 딱딱한 비서 밀리안 디모시로 돌아간 그에게 클레이가 귓가에 속삭이고 먼저 차에 올랐다. 찌릿하게 울리는 귀의 감각을 무시하며 밀리안도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소리도 없이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묶어두고 싶은데, 또 같이 출근을 하는 것도 좋으니 큰일이야.”

클레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칸막이가 내려가 앞 좌석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리가 없는데, 밀리안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업무 쪽으로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맥시가 제 일을 맡아주었습니까?”

경직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싫은 건가. 부질없는 발버둥이 귀여워 그녀는 순순히 밀리안에게 맞춰주었다.

“그래. 그래도 당신처럼 능숙하지 못해서 피곤했어.”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최대한 딱딱하게 대답하자 클레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네가 있는데, 이제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일 년 뒤에는…….”

“그건 그때 이야기하면 돼. 지금은 현실만 생각하도록 해.”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혼란이,”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야. 밀리안, 널 위해서라도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줄이는 게 좋아.”

“무슨.”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사냥감이 도망칠수록 의욕이 솟아. 그걸 꼭 명심해 둬.”

“―!”

반박하려던 밀리안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여자에게는 모두 도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대화가 끊어진 채 침묵이 이어졌다.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리안은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워낙 고가의 세단이었던 터라 차가 이동하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승차감이 부드러웠다. 저택과 회사는 꽤 거리가 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밀리안은 먼저 차에서 내려 클레이 디어가 있는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걸을 때마다 아래가 조여졌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었다. 입 안쪽의 연한 살을 질끈 깨문 그가 차 문을 열고 대기하자 클레이 디어가 우아한 다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색이 강한 푸른색의 정장과 금색의 힐은 그녀를 강렬하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

저 다리 아래 무릎 꿇었던 남자가 몇 명일까. 그가 입사한 이후로 셀 수도 없는 스캔들이 터졌던 것이 떠올랐다. 쉽게 떨어져 나간 남자도 있었고, 케이 드렉스처럼 끝까지 부정하고 매달리다 나락으로 떨어진 남자도 있었다. 자신도 그중의 하나인 걸까.

밀리안은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그렇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조건을 건 일시적인 계약일뿐이니까. 클레이 디어에게 미쳐서 매달리던 남자들과 자신이 결코 같지 않다. 그는 절대로 이 여자에게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밀리안은 우아한 자태로 차에서 내린 클레이 디어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살짝 시선을 내렸다.

* * *

밀리안과 함께 출근한 클레이 디어가 사장실로 들어가자 어딘가 살이 빠진 듯한 맥시가 그에게 다가왔다.

“밀리안! 잘 쉬었어요?”

“네. 계속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안 쉬었던 걸 몰아서 쉰 거죠. 거봐요. 그렇게 일만 하니까 몸이 상하죠.”

“……그동안 별일 없었죠?”

밀리안이 화제를 바꾸자 맥시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일은 없었지만, 힘들었어요.”

“익숙해지세요.”

“냉정해!”

“힘들면 말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맥시가 한 말이니 책임지십시오.”

“와, 일주일 사이에 엄청 변했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이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맥시도, 줄리아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 하신가요?”

“아니요.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뜻이에요. 좀 놀라긴 했지만.”

“맞아요. 그리고 좀 목소리가 뭐랄까…… 느긋해졌어요. 일주일간 잘 쉬었나 봐요. 안색도 좋아요.”

잘 쉬었다니. 밀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감췄다. 안색이 좋아졌다는 말조차 불편할 정도로 힘겨운 날이었다. 게다가 익숙해지라는 말도 미래에 이곳에 없을 자신을 위한 대비일뿐이었다. 그걸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니 다행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느긋해졌다…….

아마도 그건 더 이상 아등바등 발버둥 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숨겨야 할 비밀이 낱낱이 까발려졌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사장님하고 같이 출근하셨네요?”

“……네. 사장님께서 이전에 하신 제안을 받아들여서요.”

“제안이라면. 아, 승진?!”

“……네.”

“와! 세상에. 밀리안, 축하……, 할 일이죠?”

승진이라는 말 자체에 반색하던 맥시가 살짝 눈치를 살폈다. 밀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일을 해도 될까요? 맥시,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맥시가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켰다. 밀리안이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레이를 향해 엄하게 눈짓했다. 레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의자를 끌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줄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붙어 있던 사람들이 멀어지자, 자신을 향해 있던 여자의 시선도 사라졌다. 약을 먹은 뒤로 그녀의 냄새가 전혀 맡아지지 않음에도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의 잔향이 느껴졌다. 그건 후각으로 맡아지는 게 아니라, 예민한 살갗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맥시가 파일을 넘기기 전에 오늘 있을 스케줄을 확인 중인 밀리안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진동이 멈추기 무섭게 다시 핸드폰이 잘게 흔들렸다. 그게 다섯 번이 넘어가자 레이가 밀리안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밀리안, 핸드폰이 울려요.”

“아……, 죄송합니다.”

밀리안은 묵음으로 변경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발신인은 ‘어머니’였다.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와 왜 집에 없냐고, 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 거냐는 신경질적인 내용이 연달아 와 있었다. 일견에는 걱정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니었다.

자신이 안 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할지에 대한 감시였다. 며칠간 집에도 없었고, 연락도 받지 않았으니까. ‘어머니’의 눈에 비치는 밀리안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핸드폰을 살피니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많이 쌓여 있었다. ‘어머니’의 메시지는 최신으로 올수록 더 신경질적이었다. 이미 그가 ‘더러운 무슨 짓’을 했다고 확정하는 듯이.

“…….”

그나마 회사로 돌아와 올라갔던 기분이 급격히 낮아졌다. 아, 그래. 아버지가 불법 약물 유통과 탈세로 걸렸다고 했지. 클레이 디어에게 들었던 것인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아들이 아닌데 왜 제게 이러는 걸까. 게다가 이런 문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밀리안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문자를 보다가 어머니의 번호를 차단했다.

우습게도 자신의 부모는 타인보다도 그를 멸시했다. 타인일 뿐인 회사 동료인 맥시, 줄리아, 레이보다도 차가웠다. 심지어……. 밀리안은 핸드폰의 화면을 잠그려다 새롭게 뜬 메시지를 보고 움찔 굳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클레이 디어의 메시지였다. 밀리안은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새로 뜬 메시지를 바라봤다.

[몸이 안 좋으면 말해. 대니얼을 부르면 되니까 참지 마.]

“…….”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밀리안의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 위를 헤맸다. 결국 보낸 것이 괜찮다는 짧은 한 문장뿐이었다.

“밀리안, 파일 보냈어요. 확인해주세요. 다 보면 말해줘요. 브리핑할게요.”

“……네, 확인하겠습니다.”

밀리안은 묵음으로 돌리려던 핸드폰을 그대로 둔 채 재킷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왜, 왜 연락이 안 되지?’

디모시 여사는 몇 번이고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도 받지 않는 밀리안의 행동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이가 살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가도 마찬가지였다. 곧 다른 나라로 가기로 해놓고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끔찍한 예감에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설마 정말 짐승이 된 것은 아닐까? 차라리 다른 나라로 간 뒤라면 상관없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의 상황이 안 좋아진 지금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 시점인데, 지금껏 순종적이었던 밀리안은 연락 두절 된 상태였다.

하필, 왜 지금!

초조하게 거실을 돌아다니던 디모시 여사의 고운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 아이가 짐승처럼 굴 리가 없다. 그동안 그렇게 말을 잘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아이를 본 날 작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밀리안은 순종적인 아이였다. 혹시 호적에서 떼어놓은 게 악영향을 끼쳤을까? 하지만 그녀도 오래 참고 견뎠다. 이제 떠날 테니 미리 준비해 둔 것뿐인데, 이걸로 섭섭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 아이도 자신이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벌써 일주일도 넘게 연락이 두절된 아이의 행동은 안 좋은 쪽으로 뻗어 나가는 상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억울하게 구속된 뒤 그게 기사로 터졌으니 기회를 노린 걸까? 지금까지 온 힘을 다해 보호해주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역시 짐승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밀리안이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평생을 괴로워하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렸던 날이 다가오고 있어서 더욱 초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돼. 밀리안은 무조건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회사. 그래, 그 아이의 회사로 가면…….’

디모시 여사는 충동적으로 외투를 걸치다 우뚝 행동을 멈췄다. 남들 앞에서 그 아이를 만나는 건 되도록 피해왔던 일이었기에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야.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다시 그 회사에 갈 일이 없을 테니 괜찮을 거야.’

이렇게 혼자서 전전긍긍하느라 신경 줄이 다 타버리느니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아이를 한번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지.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여유가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고……. 그래, 신중해져야 한다.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초침 소리에 심장 박동도 덩달아 가파르게 뛰었다. 디모시 여사는 불안한 얼굴로 시계를 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