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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검사를 위해 가볍게 입은 가운이 슬쩍 벌어져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훤히 보였다. 분명 사람이 물고 빤 흔적이었다. 묻지 않아도 저 흔적의 범인이 바로 클레이 디어라는 사실임을 알았다.
비서라고 했던가. 베타만 뽑는다며, 절대 비서를 건드리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더니 제대로 잡아먹은 모양새였다. 대니얼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필 걸려도 클레이 디어에게 걸렸을까. 그의 눈에 안쓰러움이 스쳤다.
“혈압도 안 좋아요. 빈혈 수치도 낮은 편이니 식사에 주의하시고요. 이건 벤틀로가 알아서 챙겨줄 테니 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지금 밀리안의 몸은 정말 정말 안정이 시급하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네.”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표정이 어두워진 남자를 향해 대니얼은 날카로운 클레이의 시선에 끝내 하기 싫은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되도록 클레이 옆에 붙어 있어요. 알파의 페로몬이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지금 약을 따로 처방하는 것보단 그게 효과적이에요. 아, 가능하다면 섹스를 하면 더 좋아요. 안에 쌓인 노폐물이 더 빨리 배출될 거예요.”
대니얼은 자신의 말에 클레이의 입술이 길게 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좋아 죽는 것 좀 보라지. 살짝 배알이 뒤틀렸지만, 그래도 자신의 상황에서는 클레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밀리안의 상태로는 강한 페로몬을 지닌 알파와의 성교가 옳은 처방이기도 했다. 체내에 단단하게 뭉친 노폐물은 말 그대로 오메가의 페로몬이어서, 상극인 알파의 페로몬으로 자극하면 약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빨리 체내에서 방출될 것이다.
문제는 본인 스스로가 그 처방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겠지. 아무리 봐도 밀리안 디모시라는 남자는 클레이에게 강제로 잡힌 꼴이었다. 어떻게든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클레이가 말을 걸거나 손을 대면 창백하게 질리는 모습이 같은 남자로서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줄어든 투자금의 반을 다시 올려준다는 조건이 있으니 그로서는 거부할 수도 없었다. 오늘을 포함해 고작 두 번 본 남자를 위해 귀한 투자금을 날릴 정도로 대니얼이 고결한 성품도 아니다.
‘어쩌다 저런 여자한테 걸렸는지.’
제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붉어지길 반복하는 남자는 딱 봐도 순진해 보였다. 저 음흉한 클레이 디어에게 휘둘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클레이의 페로몬만 해도 그랬다. 제 영역이라고 싸지른 알파의 냄새가 너무 심해서 코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밀리안 디모시가 클레이가 데려온 환자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상대와는 다르게 대하는 것 같으니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니얼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일주일 뒤에 다시 뵙죠. 반가웠어요, 밀리안.”
“감사합니다. 닥터…….”
“크래포드. 대니얼 크래포드예요.”
“네, 닥터 크래포드.”
우울하던 표정이 스윽 풀어져 옅은 미소를 짓는 게 일품이었다. 단정한 생김새였지만, 클레이가 지금껏 만났던 상대와 비하자면 한없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미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 남자는 클레이 디어에게 아까운데. 대니얼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남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디어 가를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 * *
밀리안은 약통을 쥔 채로 조용했고, 클레이 역시 말없이 그런 밀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했지만,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분위기에 벤틀로는 능숙하게 식사 준비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났다.
“내가 어제 제안을 할 게 있다고 했던 말, 기억나?”
나긋한 클레이의 말에 밀리안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정신이 없는지 멍한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잡히고 있지 않아 클레이는 혀를 차며 그의 앞에 앉았다. 심신이 위축된 밀리안과는 반대로 그녀는 여유로웠다. 밀리안과의 관계에서 모든 승기를 쥐고 있는 것이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협박이나 하며 널 강제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진짜 본론은 이거야.”
“…….”
“너는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살고 싶잖아. 하지만 지금까지 먹었던 약은 이제 먹을 수도 없고, 구하지도 못해. 네 주치의였던 닥터 디모시는 현재 수사당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니까. 그렇다고 다른 의사를 찾으면 널 오메가로 공식적으로 등록할 테니 네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영리한 남자는 금방 알아들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던 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는 걸 보면서 클레이는 저 눈동자를 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 년이야. 일 년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한다면 네가 평생 먹을 약을 보장해주지.”
“무슨.”
“고작 일 년만으로 평생 치의 약을 보장받는다는 거야.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좋은 약을. 너도 손해 볼 게 없는 조건, 아닌가?”
밀리안의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클레이는 흔들리는 밀리안에게 쐐기를 박듯 첨언 했다.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아? 어차피 이제 네게 약을 줄 사람도 나뿐이야.”
“…….”
대니얼이 오기 전, 아주 작은 기사 한 조각을 보여줬었다. 자선사업으로 유명했던 닥터 디모시의 비리 사건.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증시키는 기사에 밀리안은 순간 정신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무기력한 얼굴, 궁지에 몰려 힘이 빠져버린 몸은 그녀의 품으로 쉽게 쓰러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이가 가볍게 팔을 당기자 밀리안의 몸이 힘없이 넘어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아침에 봤던 바짝 마른 등을 천천히 쓸었다. 도톰한 가운을 통해서도 섬세한 뼈의 윤곽이 느껴졌다. 확실히 많이 먹이긴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밀리안이 한숨처럼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
“대체 제 어디가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상한 조건을 내세울 만큼,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꿰뚫어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협상을 가장한 협박을 할 만큼.
밀리안은 자신이 지금 거대한 물의 압력에 짓눌려 있는 감각을 느꼈다. 깊고 깊은 심해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압박했다. 발이 지반에 닿지 않고 그저 물이 이끄는 대로만 움직여야 하며 너무 깊어서 벗어날 수도 없는.
모든 것이 막막했다.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의 앞에 있는 클레이 디어뿐이었다. 밀리안은 그를 끌어안은 여자의 따뜻한 품이 어색했다. 여자 특유의 부드러운 살결은 따뜻한 온기를 넘어 뜨거울 정도로 체온이 높았다. 그대로 이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잠들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 여자가 결코 자신이 쉴 곳이 아님을 밀리안은 알고 있었다.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자 도리어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클레이 디어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밀리안은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는데, 다행히 조금이나마 유리한 조건이 걸렸다.
밀리안은 힘없이 소파 패드에 걸친 팔을 들어 여자의 몸을 뒤로 밀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의외라는 얼굴을 하더니 선선히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계약서를 써주십시오.”
클레이 디어는 묘한 눈을 했다. 투명할 정도로 맑았던 녹색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진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딱히 거절의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빛내며 그를 부추겼다.
“공증을 위해 변호사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
여자의 곁에서는 자꾸 정신이 흐트러져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알파의 향기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어차피 지금 변호사를 불러도 여기까지 한 시간은 걸릴 테니까. 그 이상은 안 돼.”
“네,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그 뒤에 식사를 하는 걸로 하고.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 같지?”
“……네.”
거기까지 말한 뒤 클레이 디어는 미련을 두지 않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넓은 공간에 밀리안 혼자 남았다.
적막은 익숙한 것이었다. 밀리안은 제 손에 쥐어진 하얀색 약통을 가만히 바라봤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버려졌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고작 호적이 파인 것으로 새삼 충격받은 자신이 한심했다. 클레이 디어의 주치의로 인해 알게 된 사실도 그 충격에 불을 붙였던 것 같다. 오래 복용하면 좋지 않은 약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릴 때부터 그에게 약을 먹여왔다는 것이…… 슬펐다.
그래. 이 기분은 슬픔에 가까웠다. 항상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끈질기게 잡고 있던 애정에 대한 갈구가 저를 슬프게 만들었다. 하……. 짧게 새어 나온 웃음 끝에 눈물이 맺혔다. 두 손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조금이라도 제게 유리한 조건을 생각해 내야 하는 시간 동안 감상에 젖어 소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흠뻑 젖어버린 손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 * *
클레이는 응접실 문을 닫으며 신경이 뻐근하게 곤두선 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손끝에서 혈관이 파득파득 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순순히 넘어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밀리안은 그보다 더 단단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제게 유리한 지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게……. 그녀는 성마른 얼굴로 아랫입술을 빨았다.
“이러다 진짜 빠지겠네.”
갖고 싶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욕망에 밀리안을 쓰러트려 집어삼키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그가 바라는 대로 자리를 피해준 것도 있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그를 손에 쥐고 싶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그래. 완전히 갖고 싶었다. 그건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명백히 다른 감정이었다. 완전한 소유. 육체뿐 아니라, 그가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까지 전부 갖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이건 좀 위험한데.
잠시 손을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던 클레이가 곧 기분 좋게 웃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일 년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자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