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섹슈얼-34화 (3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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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밀리안의 냄새에 약한 것처럼, 밀리안 역시 그녀의 냄새에 약했다. 고작 조금 페로몬을 흘린 것만으로 이렇게 고분고분해지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클레이는 밀리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주 작던 냄새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걸 약 따위로 억누르며 살았다니. 아까운 짓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밀리안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내고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반듯한 이마가 보기 좋아 입술을 묻고 가볍게 키스했다. 이마를 시작으로 눈꺼풀, 코, 양 볼과 입술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을 맞췄다. 살짝 내리떴던 눈을 들어 올리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이제는 버릇이라도 든 양 자연스럽게 입술이 끌어 당겨졌다.

살짝 짙었던 냄새가 순간 얼어붙기라도 한 듯 농도가 옅어졌다. 그와 반대로 클레이의 페로몬은 더욱 부피를 키웠다. 하지만 강제로 굴복시키던 지난 밤 같지는 않았다.

밀리안은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몸에서 힘이 풀리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만약 클레이가 성욕을 자극했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은 뜨겁고 몽글몽글했다. 꿈을 꾸는 것처럼 평온했다. 평소의 클레이 디어와는 전혀 달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느꼈던 감정처럼…….

온 방 안에 남아 있던 여자의 냄새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던 자신의 낡은 맨션에서 눈을 떴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한동안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 다시 잠이 들뻔했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섰다.

약을 찾아 헤맸지만, 내용물이 사라진 빈 통만 있었다. 급하게 약을 처방받기 위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그랬더라. 흐물거리며 풀어진 뇌를 어떻게든 돌리며 여자가 했던 말을 되새기던 밀리안은 번뜩 몸을 떨었다. 클레이 디어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

“아버지가 왜. 왜…….”

“아아. 죄를 지었으니 처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밀리안.”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침 햇볕이 그녀의 금발을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밀리안은 순간 눈이 아찔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길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상체를 타고 흘러내렸다. 완벽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부드러운 가슴, 쭉 뻗은 육체가 아름다웠다.

인간 같지 않은 것은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딴 걸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네가 아까워.”

그 말에 밀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자는 그런 밀리안의 눈을 놓치지 않고 계속 주시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넌 서류상으로 닥터 디모시와 남이야. 네 이민 수속을 밟으면서 한 짓이지.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

“…!”

“너 혼자만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안쓰럽다는 듯 여자의 손이 그의 볼을 쓸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서류 한 장만 떼면 알 수 있는 거로 거짓말을 할 것 같아?”

여자의 체온이 닿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뜨거웠다. 밀리안이 몸을 떨자 여자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호적 정리를 했다고?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자신을 혐오하는 부모님을 마음 한구석에서 의지하고 있었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아니다. 클레이 디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하려고 해도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가 이런 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서류 한 장만 떼도 알 수 있는 거로 허술하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가 아는 클레이 디어라면.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아버지라면 호적을 정리하고도 남았다.

“날 의지해, 밀리안.”

여자가 그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뜨겁다 느낄 정도로 높은 체온이 마치 화상을 입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밀리안의 목이 꺾였다. 그는 클레이 디어의 어깨에 힘없이 고개를 묻었다.

아파.

너무 아팠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괴로웠다. 클레이의 살에 닿은 피부는 뜨거워졌지만, 마음이 너무 시렸다.

밀리안이 흔들리고 있는 게 겹쳐진 피부를 통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엾은 밀리안. 하지만 이 남자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음습한 쾌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단속했다. 그리고 위로하듯 밀리안의 얼굴을 끊임없이 쓸었다.

그렇게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피가 났는지 아랫입술 한가운데가 움푹 패 딱지가 생겼다. 참나. 저런 상처마저 야할 건 뭐람. 클레이는 결국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밀리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클레이 디어가 만들어낸 균열은 대니얼이 와서 밀리안을 진찰한 뒤에 더 깊어졌다. 의료기기가 갖춰진 버스를 끌고 디어 가로 온 대니얼은 밀리안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 처음으로 몸을 맡긴 밀리안은 열 가지가 넘는 검사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렸다. 한 시간 뒤 의사가 종이뭉치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밀리안은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보고 불안해졌다.

“으음. 정확히 십이 년을 복용했다고 했죠?”

“네.”

“최근에는 원래 복용량의 두 배를 넘겼고요?”

“……네,”

의사가 검사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툭툭. 빠른 속도로 탁자를 치는 볼펜이 내는 소리에 밀리안의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

“밀리안이 먹은 약은 시중에 유통되는 약 중에서는 상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에요. 특히 정량을 넘는 장복의 경우에는 심하면 신경계가 망가져서 전신 마비가 올 수도 있어요. 지금 단계에서 진료를 받은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래, 그리고 과복용했어요.”

“…….”

날카로운 의사의 눈빛에 밀리안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베타로 살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밀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대니얼이 씨익 웃으며 가운 주머니에서 하얀색의 작은 약통을 꺼냈다.

“그런 표정을 할 필요 없어요. 부작용이 없는 약도 있으니까.”

조금 많이 비싸긴 해도. 대니얼이 한 알에 오백 달러라고 말하자 밀리안의 눈이 커졌다.

“뭐 가격문제도 있긴 한데, 이건 위쪽에서만 유통되는 약이라 다른 곳에서 이 약을 처방받을 수는 없어요.”

“그걸 제가 받아도…….”

“이건 디어 가의 이름으로 등록한 거라 괜찮아요. 그게 아닐 때는 조금 문제가 되겠지만요.”

“…….”

그건 밀리안으로서는 돈이 있더라도 절대 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긴, 어차피 저 약을 구할 돈도 없다. 한 알에 오백 달러. 하루에 한 알만 먹는다고 하더라도 한 달이면 만오천 달러다. 자신의 재정 수준으로는 결코 처방받을 수 없는 약. 상류층에만 유통되는 약이라면 지금까지 그가 먹었던 약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밀리안은 의사가 건네준 약통을 손에 쥔 채로 클레이 디어를 바라봤다.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이내 여상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약통이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의 대가는 뭘까.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은 밀리안을 향해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밀리안, 히트 사이클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죠?”

“열여섯 살 때 한번…….”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밀리안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대니얼이 기가 막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보통 그때 처음 하는데, 설마…….”

“네. 딱 한 번 경험했습니다.”

“지금 스물여덟 살이죠?”

“네.”

“그럼 그 뒤로는 계속 약으로 막았었나요?”

“……무슨, 문제라도.”

대니얼의 얼굴이 심각했다. 밀리안은 초조하게 그를 바라봤다. 한참을 밀리안을 바라보던 대니얼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바로 밀리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밀리안.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대체 그렇게 무식하게 약을 처방한 의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아닙니다.”

“당분간 약을 먹지 마세요. 밀리안의 히트 사이클 주간을 아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예요.”

“모르면, 안됩니까?”

그냥 모르고 싶었다. 히트 사이클 따위. 그런 짐승이 되는 날은 차라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계속 약을 먹으면 완전히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대니얼을 바라봤지만, 그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메가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의 히트 사이클을 아는 거예요. 갑자기 길을 가다가 발정기가 오면요? 그것도 십이 년간 쌓인 게 한 번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

“지금 밀리안의 몸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하나 있다고 보면 돼요.”

“…….”

“약으로 누를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배출하지 못하고 계속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펑, 하고 터질 거예요. 마치 끝까지 부푼 풍선처럼요.”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는 대니얼의 말에 밀리안도, 그 뒤에서 듣고 있던 클레이와 벤틀로의 얼굴도 굳어졌다. 탁자를 볼펜으로 툭툭 두드리던 대니얼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준 약은 일주일간 복용금지예요. 먼저 먹었던 약의 잔재를 없앤 후에 먹어야 약효가 제대로 돌 겁니다. 부작용이 없는 만큼 좀 까다로워요. 하루에 세 번, 공복에 아까 제가 드린 액상 약을 먹으면 소변으로 노폐물이 빠져나갈 거예요. 통증이 있을 수도 있고…… 아, 소변 색이 탁할 수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그걸 일주일간 유지하세요. 강제로 노폐물을 배출시키는 거라 빈혈이 심하게 올 수 있으니 회사는 당분간 쉬도록 하고요.”

“그건.”

회사를 쉬라는 말에 밀리안이 난처한 어조로 말을 꺼내려는데 뒤에서 클레이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내리눌렀다. 은근히 짙어지는 여자의 체취에 벌어졌던 입술이 저절로 닫혔다.

“의사 말을 들어야지, 밀리안.”

“…….”

“이럴 땐 상사가 옆에 있으니 좋네요.”

아무리 봐도 무게추가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둘의 모습을 보며 대니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던 약이긴 해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느껴지면 바로 연락하세요.”

이제 볼일이 다 끝나기도 했고, 클레이가 이상한 짓을 하는 모습을 더 보기도 싫어 슬슬 병원으로 돌아가려던 대니얼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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