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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8화 (1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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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번쩍 눈을 뜬 클레이의 눈이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푸른빛이 돌 정도로 새하얗던 흰자위에 핏줄이 죽죽 그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또 그 남자의 꿈을 꾸다니. 그것도 평소보다도 더 생생하고 난잡한 꿈이었다. 자기 전에 보았던 가련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남자를 정신없이 헤집었다. 그렇게 거칠게 구는데도 남자는 제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꿈속에서 몇 번을 사정했는지 세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던 클레이는 결국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걸쳐져 있는 가운을 입었다.

이게 모두 밀리안 디모시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그리고 있던 손에 움찔했다. 황망한 눈으로 제 손을 바라봤다. 그를 만졌던 감각이 남아있는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부축을 빙자해 밀리안의 복근을 쓸다가 본능적으로 그의 하체로 내려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키만 훌쩍 큰 비실비실한 체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근육이 탄탄했다. 나름대로 운동을 오래 했는지 몸의 라인이 무척 예뻤다.

꿈에서 그렇게 많이 봤는데, 현실에서 그의 몸을 안아본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게 다시 꿈으로 이어졌다.

비서를 건드리다니. 클레이는 결코 직원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저열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상대가 부족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달콤한 냄새만 남긴 오메가를 찾아보려고도 해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접었으니 그것은 논외의 일이었다.

문제는 짧은 섹스파트너로 소비하기에는 밀리안 디모시는 매우 소중한 인재라는 점이었다.

아마도 머리가 맛이 간 모양이었다. 그딴 더러운 꿈을 꾼 것도 모자라 현실에서조차 발정하다니. 클레이는 여전히 저릿한 손을 꽉 쥐었다. 밀리안 디모시라니. 말도 안 되지. 아무리 굶주려도 그 남자는 아니었다.

비록 그의 젖은 눈이, 늘씬하고 잘록한 허리가, 작고 탄력적으로 올라붙은 엉덩이가 심각하게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또다시 생생하게 그려지는 밀리안 디모시의 모습에 클레이는 작게 신음했다. 망할.

아프면서 바로 퇴근을 할 것이지 뭐하러 그렇게 식은땀에 온몸이 젖을 정도로 버틴단 말인가. 그런 모습만 안 보였으면 이렇게 심란한 일도 없었을 텐데. 클레이는 단지 죄가 있다면 아팠을 뿐인 밀리안에게 책임을 돌렸다.

아프다며 일찍 퇴근하겠다고 말을 하기 전까지 그의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도 황당했다. 아니지. 밀리안이 아픈지 몰랐던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조차 몰랐으니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밀리안 디모시가 너무 철저했던 탓이다.

“뭐라는 거야.”

아픈 와중에도 끝까지 제 본분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다니. 아무리 현실 도피를 하는 와중이라도 이건 아니었다.

클레이는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 도무지 냉정함을 되찾을 수가 없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할까 하다가 삼 층의 수영장으로 향했다.

* * *

날이 아주 화창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정원에서 들리는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아주 완벽했다. 새벽 두 시에 깨어나 그 뒤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클레이 디어의 상태와는 달리.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온 클레이를 맞이하던 벤틀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핏발이 너무.”

“그렇게 티나?”

“네, 굉장히. 잠자리가 좋지 않으셨습니까?”

스스로 까다로울 정도로 관리하던 클레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부스스했다. 결 좋은 금발이 헝클어져 있었고, 매끄럽게 빛나던 피부가 오늘따라 색이 죽은 것처럼 칙칙해 보였다. 보석 같던 눈동자도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져 있었고, 흰자위는 붉은 핏발로 온통 붉었다.

어제까지 분명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대체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역시 건강에…….”

“아니야. 그냥, 잠을 좀 설친 것뿐이야.”

몸이 안 좋다고 하면 그대로 드러누울 것처럼 구는 벤틀로의 모습에 클레이가 서둘러 반박했다. 정말이냐며 묻는 주름진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정말이라니까. 얼마 전에 검진 결과 들었잖아.”

너무 건강해서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라던 대니얼의 진단을 언급하자 벤틀로의 의심이 한풀 꺾였다. 대니얼 크래포드가 얼마 전에 클레이를 대상으로 신약을 임상 시험하는 미친 짓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극성맞은 부모처럼 굴던 벤틀로의 얼굴이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유능한 집사로 변신한 노신사의 모습에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덕분에 새벽 내내 들끓었던 속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뻐근한 어깨와 목을 가볍게 풀고 신선한 샐러드와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사실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마저도 먹지 않는다면 벤틀로의 극성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인자한 얼굴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 폭탄은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 뒤집어 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스포츠웨어로 갈아입고 저택 외곽에 있는 트랙을 돌았다. 그 상태로 무슨 운동이냐며 반대를 하던 벤틀로는 속이 복잡해 보이는 클레이의 눈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섰다.

허리까지 오는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고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차피 밤새 수영을 시작으로 헬스, 클라이밍까지 준비운동은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머리에서 자꾸 잡생각이 들었다. 그 딱딱한 인간이 침대에서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하다. 눈앞에 열에 들뜬 젖은 눈, 꽉 깨물었는지 붉게 부풀었던 단정한 입술이 떠올랐다. 땀에 젖어 촉촉하던 피부까지. 클레이는 거친 한숨을 내뱉고 속도를 높였다.

평소라면 트랙을 도는 속도와 길이를 컨디션에 맞춰 조절했을 텐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었다. 오 킬로미터가 넘고 있음에도 클레이 디어의 몸에는 땀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눈의 흰자위가 더 붉어지고 있었다.

‘밀리안 디모시는 내 비서야.’

‘비서면 어때? 이 정도까지 끌리면 일단 안고나서 생각해도 돼.’

‘안으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질릴 테고, 그럼 그는 퇴사하겠지. 밀리안 디모시 같은 인재를 찾는 건 힘들어.’

짧은 섹스파트너와 유능하고 충실한 부하직원. 본능은 탐이 나는 육체를 손에 넣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유혹하고 있었고, 이성은 그 이후를 경고하고 있었다.

밤새 계속된 치열한 전쟁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본능에 충실한 게빈 스튜어트 같은 인간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을 비웃었으리라.

게다가 밀리안 디모시는 베타다. 오메가처럼 수월하게 알파의 관을 받지 못할 거다. 심지어 자신의 관은 성교에 능숙한 오메가도 버거워했다. 분명 요도는 버진이 분명할 텐데. 그 좁은 구멍을 넓히는 과정은 짜증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클레이의 다리가 조금씩 느려졌다.

짜증이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몸은 조금 달겠지만, 분명 즐거울 거다. 요도를 넓히는 얇은 막대를 좆에 박고 괴로워할 밀리안 디모시를 생각하니 입이 바싹 말랐다. 가슴만 겨우 가린 탑이 답답하게 조였다.

전속력으로 뛸 때도 흐트러지지 않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 뻣뻣한 인간이 제발 싸게 해달라고 빌 땐 어떤 얼굴을 할까.

밀리안 디모시는 꽤 키가 컸고 다리가 제법 긴 편이었다. 칼같이 다린 단정한 정장을 통해서도 다리 선이 유려하다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는 저 비루한 다리로 일이나 제대로 하려나 비웃었던 과거는 미화된 지 오래였다.

그 늘씬하고 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씨발.”

클레이의 다리가 완전히 멈춰 섰다.

본능이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 * *

월요일 아침. D&J 그룹, 기획비서실은 패닉 상태였다.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밀리안 디모시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화도 받지 않았다.

특히 레이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전화기의 통화 버튼만 반복해서 눌러댔다. 발신음이 끝나면 다시 걸고 또다시 걸었다. 보다 못한 맥시가 뺏어서 전원선을 뽑아버렸다.

“작작 좀 해, 레이. 누가 보면 정신병 걸린 줄 알겠어.”

“혹시 밀리안이 퇴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저번 주 금요일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퇴근하는 거 못 봤어? 아직 회복이 안 됐나 보지.”

그렇게 말하는 맥시도 찝찝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 회사에 입사한 지는 이제 횟수로 이 년이 됐지만, 밀리안 디모시가 지각을 한 경우는 없었다. 지각이면 차라리 좋겠지만, 결근이라면? 혹은 퇴사를 준비 중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미친놈처럼 전화기만 붙잡고 있던 레이를 말리던 맥시까지 다리를 달달 떨며 불안 증세를 보이자 그들을 보고 있던 줄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밀리안이라면 이런 식으로 퇴사할 리가 없잖아.”

“그렇겠지?”

“응. 아주 철저하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단호하게 나갈 사람이지.”

퇴사 전에 의욕을 잃고 풀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밀리안 디모시처럼 마지막까지 칼같이 일을 처리하는 철두철미한 사람도 있었다. 줄리아의 말에 맥시와 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때,

“누가 나가?”

살짝 낮은 듯하면서도 관능적인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들의 사장, 클레이 디어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신경 써서 꾸민 듯한 아름다운 여자의 눈이 몹시 차가웠다. 이제는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레이는 순간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클레이는 멍청한 얼굴로 저를 맹하게 보고 있는 레이를 지나 바짝 굳은 줄리아에게 닿았다.

“누가, 퇴사해?”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밀리안이 아직 출근을 안 해서…….”

“연락은?”

“해봤는데 받지 않아요.”

세 명의 비서들은 순간 클레이 디어의 몸에서 차디찬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어컨은 딱 적정 온도로 설정되어 있는데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다.

클레이 디어는 그렇게 까다롭거나 무서운 상사는 아니었으나, 알파 특유의 위압감이 사람을 위축시켰다. 그래서 그녀에게 입바른 말을 또박또박하는 밀리안 디모시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아마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게 아닐까 싶은데요…….”

절대 퇴사할 리가 없다며 레이가 눈치를 보다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클레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금요일에 아팠다면 주말 이틀간은 더 쉬었을 텐데 그동안 낫지 않았다고? 너무 연약한 거 아냐?

클레이는 제가 비정상적으로 건강체라는 것도 잊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새벽에 일어나 공들여 외모를 꾸미고 나온 보람도 없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허망한 것도 있지만 비서들이 자기들끼리 퇴사다 아니다를 논하는 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들의 말처럼 오 년간 겪어보았던 밀리안의 성격상 도망치듯 퇴사할 리가 없다.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 않은 적이 처음이라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게 문제일 뿐.

클레이는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 전화기 외에는 올려진 것이 없는 밀리안의 책상을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정돈을 잘하는 것은 좋은 버릇인데 어딘가 거슬렸다. 언제든 사라져도 된다는 듯이 제 소지품 하나 놔두지 않았다.

다른 직원의 책상을 보면 작은 피규어도 있고, 가족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화분을 놓고 키우는 직원도 있었다. 오랜 시간을 보내는 회사를 자신의 작은 생활공간으로 꾸몄다. 사소하더라도 제 소지품 하나 두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밀리안 디모시의 책상은 황량할 정도로 깨끗했다. 회사에서 제공한 비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강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회사에 제 물건을 놓지 않는 것은 단순히 성향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슴 한쪽이 어딘가 서늘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다. 클레이 디어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제 사무실에 들어가려다 우뚝 멈춰섰다.

“밀리안이 혼자 산다고 하지 않았나?”

“네? ……아마도.”

설마 주말 내내 혼자 앓았던 건가. 클레이의 미간이 움푹 팼다.

“주소.”

“네?”

“밀리안의 집 주소.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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