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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7화 (1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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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클레이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밀리안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사장님. 오늘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퇴근을, 해야… 했으면 합니다.”

남자가 아릿한 얼굴로 입술을 덜덜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뭐라고 그랬지?

클레이는 남자가 한 말을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고, 로봇 같다 느낄 정도로 원칙주의자가 회의가 있음에도 의무실에 갔다 올 정도라면 생각 보다 많이 아픈 게 분명할 테지만, 그럼에도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몸이 안 좋다는 말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밀리안 디모시의 얼굴을 무심코 살피던 클레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대로 감정 표현도 하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온통 물기로 젖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 저런 상태였던 거지. 저런 몸으로 지금까지 버틴 거였나?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모습인데 클레이 디어는 걱정보다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단정한 입술이 온통 붉어져서 야했다. 침대에서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바로 그 표정이어서 선뜻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육체가 반응하고 있었다. 클레이는 자신의 상태에 기가 막혔다.

아픈 사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헐떡이며 내뱉는 숨마저 야하게 느껴졌다. 클레이 디어는 자신이 상종도 하지 못할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그녀의 문란함을 비난했지만, 별로 타격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말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 자신은 쓰레기가 맞았다. 비서를 상대로 문란한 꿈을 꾸고, 또 현실에서조차 건드리고 싶어 안달 난 쓰레기.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밀리안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 상태면서도 끝까지 딱딱했다.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 그래야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들어가서 쉬도록 해.”

밀리안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가 자리를 정돈하고 퇴근 준비를 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얼마나 땀을 흘린 건지 하얀 셔츠가 흠뻑 젖어 그의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늘씬한 등과 허리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간 입이 바싹 말랐다. 클레이는 집요하게 밀리안 디모시의 뒷모습을 쫓았다.

맙소사.

클레이는 탄식했다. 작고 탄력적인 엉덩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흥분으로 유두가 단단하게 발기되어 셔츠에 쓸리는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남자였다면 성기가 완전히 솟아서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억지로라도 시선을 돌리려 했다. 밀리안 디모시의 몸이 휘청이지만 않았어도.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밀리안!”

“흐읏……!”

클레이의 늘씬한 팔이 쓰러지려던 그의 허리를 안았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불쾌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녀는 그의 등에 가슴을 딱 붙이고 손으로 슬쩍 그의 납작한 배를 쓸었다. 평소의 밀리안이라면 딱딱하게 각이진 목소리로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헐떡거리기만 했다.

“괜찮아?”

“하아…….”

“밀리안? 당신 괜찮은 거야?”

걱정은 진심이었다. 다만 사심이 듬뿍 담겼을 뿐. 클레이는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친. 땀 냄새조차 달콤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는 그의 몸을 지탱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그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붉은 립스틱으로 칠한 클레이의 관능적인 입술이 그의 볼에 닿을 듯 가까이에 서성였다.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어필한 적이 없었다. 손만 내밀어도, 눈빛만 스쳐도 알아서 달라붙어 왔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는 밀리안 디모시에게 과하게 집중하고 있어서 비서들이 숨도 못 쉬고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메신저로 사장을 고용인 성추행으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정신없이 타자 치고 있다는 것도.

“사장님…….”

“정신이 들어? 병원까지 데려다줄까?”

클레이의 목소리가 상냥했다. 설탕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본인은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아뇨. 그만, 놔주셨으면… 합니다.”

“응?”

“떨어지세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닌지, 밀리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 태연히 버티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파렴치하게도 클레이는 그의 목에 선명하게 돋아난 혈관을 핥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녀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밀리안은 잠시 휘청이는 듯하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빠르게 멀어졌다. 조금 전까지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리던 남자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잽싼 몸놀림이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쫓던 클레이의 눈이 깜박였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지금 뭐였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한 클레이 디어는 강하게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쳤다. 그래도 정신이 들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반복했다.

* * *

밀리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을 기었다. 뒤집힌 속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울컥울컥 위액을 쏟아냈다. 빌어먹을 오메가. 빌어먹을. 차라리 발현을 안 하고 베타로 살았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속을 게워내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거실 바닥에 기어 다니면서 쏟아낸 탓에 그의 몸도 바닥도 엉망이었다. 밀리안은 표정이 모두 사라진 얼굴로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열기를 털어냈다. 속에 남은 잔열을 모두 해결해 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 그동안 약을 너무 과용한 부작용이리라. 다행히 오늘은 금요일이니 주말 동안 몸을 회복하면 될 것이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다.

괜찮아.

밀리안 디모시는 흔들리는 자아를 향해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자기 최면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박살 났다.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여린 얼굴을 한 중년의 여자가 그의 집안으로 들어왔다.

“밀리안, 있구나.”

“……어머니.”

어머니였다. 항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기에 눌려 살던 어머니는 몰래 자신의 집에 들르곤 했다. 대체로 자신이 없을 때 청소와 음식을 해놓고 가던 어머니가 이 늦은 시간에 왔다는 건 그에게 할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나름의 모정이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잔인하게 다가왔다. 애매하게 다정해서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아버지처럼 대놓고 냉정하게 구는 게 나았다. 기대라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어릴 때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기에 한순간에 버림받은 상처는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왜 이렇게 낳았냐고 어머니를 붙잡고 악을 쓰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아버지가 네 유학을 준비하고 계셔.”

“유학, 이라고요?”

“응. 너도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알파가 있다며?”

그것도 오메가라면 가리지 않는다고 소문난 알파.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알파의 발밑을 기어 다닐까 봐 겁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고지식한 그의 어머니는 현대 의학 약품으로 인해 오메가도 무리 없이 일상의 생활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메가는 일반인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임을 부정했다. 그래서 자신이 아들이 오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남은 모정으로 아들의 집에 가끔 들려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 했다. 그래야 자식을 버린 비정한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갖지 않을 수 있으니까.

가장 비참한 것은 그나마 그것이라도 받아먹기 위해 그녀를 용납하고 있다는 거였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하면 아주 조금이나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고 위안을 얻었다. 병신처럼. 고작 그따위가 뭐라고.

거지 같은 기분이었다. 모두 토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다시 메슥거렸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목구멍 위로 올라온 위액을 다시 삼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돌아가세요. 유학은 필요 없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아버지께 전해 주세요.”

“요즘 약도 많이 먹는다며? 그러다 아예 약효가 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악의와 함께 배설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참아야 했다.

“대체 이유가 뭐니? 설마 너, 이미 알파와 그, 그렇게 된 건 아니겠지?”

자신이 말하고도 역겨웠는지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찬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짓이기듯 뱉어낸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망연히 서 있던 어머니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이 미친놈! 나쁜, 나쁜 놈! 네가 제정신이니?! 어디서 엄마한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 것 같던 어머니는 그와 거리가 좁혀지기 무섭게 다시 멀어졌다. 더러운 것에 닿기 싫다는 듯,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얼굴을 하고.

* * *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뒤로 물러선 어머니는 일그러진 아들의 얼굴에 뒤늦은 변명을 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가 더 놀란 듯했다.

어쩔 줄 모르고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다시 닫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건 상처받았을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부적절했던 행동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서라는 걸 밀리안은 알고 있었다. 마른 웃음만 비참하게 흘러나왔다.

“밀리안, 나는, 엄마는……!”

“……그거 아세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잔인해요.”

차라리 맞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어머니에게 닿고 싶어서. 만약 어머니가 중간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마도 그녀를 끌어안았겠지. 그리고 애정을 구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일까. 밀리안은 허망하게 어머니를 바라봤다.

“돌아가세요. 그리고, 다신 오지 마세요.”

“밀리.”

“가시라고요…….”

그가 완전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어서인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씩 뒷걸음치다 도망치듯 그의 맨션을 나갔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게다가 클레이 디어는 자신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최악이네.

밀리안은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보다 파급력이 훨씬 강했다. 그건 그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보 같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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