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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물론 꿈은 미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현실에서 오메가와 섹스를 했을 때보다 더. 그래서 황당한 거였다. 우습지도 않지. 어떻게 그 남자와…….
한번 꾼 거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이상하지 않을 거다. 하루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남자는 미치게 섹시하고, 끝내주게 순종적인 얼굴로 매일 그녀의 꿈으로 찾아왔다. 남자가 품에 안겨 오면 클레이는 약에 취한 것처럼 남자에게 입 맞췄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걸음이 거칠어지자 바닥을 긁는 힐이 끼익, 요란한 소음을 냈다. 곁에서 걷던 에릭이 눈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혹시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뭐?”
“소리가 좀.”
에릭이 눈으로 그녀의 신발을 가리켰다. 클레이는 그제야 자신의 귀에도 대리석 바닥을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게 자신이 내는 소리라는 것도.
“……미안하군.”
“아닙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아니. 없어.”
그런 것 따위 없다. 없어야 했다. 단호한 클레이의 대답에 에릭이 전혀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는 사장실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
“요즘 계속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는군요.”
결코 지각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밀리안 디모시는 회사에서 정한 출근 시간보다도 훨씬 이르게 회사에 온다. 그런데 근래 들어 계속 늦었다. 무슨 일이 있나? 에릭은 밀리안의 마른 등을 바라봤다. 차라리 이미 그의 비밀을 알고 있고, 말할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는 척이라도 했다가는 더 힘들어할 것 같아 며칠째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은 밀리안 디모시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용주도 근래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흠.’
밀리안 디모시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하지만 밀리안과 클레이 디어의 접점은 항상 업무시간 내에서만 발생했고, 그 자리에는 그도 있었다. 그가 자리에 없을 때는 두 사람이 사무실 안에 있을 때였고, 그때 역시 항상 카메라로 확인했기에 그도 아니었다. 특별한 일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접점이 없다면 모를까. 클레이 디어는 평소보다 밀리안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밀리안 디모시도 업무에 관련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에릭은 밀리안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멈춰 선 클레이를 흘끗 바라봤다.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두 사람의 목적지가 같으니 함께 올라가는 게 시간을 절약한다. 이건 평소의 클레이 디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장님. 안 가십니까?”
“……가.”
클레이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낮진 않았다. 대체 왜?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을 삼키며 에릭 드와이스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클레이 디어의 뒷모습을 말없이 따랐다.
밀리안 디모시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클레이는 순간 그를 품에 끌어당기고 싶었다. 밤에 그랬던 것처럼 제 품에 안겨 좋은 소리를 내도록 만들고 싶어서. 오늘 오메가를 호텔로 들여야 하나 순간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남자를 생각하자마자 불쾌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밀리안 디모시 때문에. 그것도 현실에서도 아닌, 꿈에서 만난 베타 때문에.
“하.”
클레이의 입에서 다시 짧은 웃음이 터졌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경호원들은 애써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에릭 드와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레이 디어는 최상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한 걸음 떼자마자 훅하고 풍기는 달달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또.’
밤에는 밀리안 디모시가, 낮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그녀의 신경을 깔짝거리며 긁었다.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던 터라 이전에 맡았을 때보다 더 거슬렸다.
클레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제 곁에 선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 드와이스.”
“네, 말씀하십시오.”
“여기에 오메가가 있는 모양이야.”
“―!”
“누군지 알아내서 내 앞으로 데려와.”
클레이 디어는 며칠 전 에릭에게 했던 말을 철회했다. 계속 봐주었더니 이제는 대놓고 페로몬을 뿌려댄다. 그것도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할 때에 그러니 괘씸죄가 더 붙었다.
* * *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클레이 디어의 목소리에 밀리안이 얼어붙었다. 하필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라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 생생했다. 잘못 들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때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밀리안은 그가 자신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이것으로 모든 것이 확정됐다. 혹시라도 아니라고, 모를 거라고 애써 세뇌했던 생각들이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에릭은 다시 고개를 돌려 클레이 디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밀리안은 그들의 대화를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되는 양 멍하니 서서 듣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내.”
“……네.”
다 끝났구나. 이제 진짜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밀리안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지? 수없이 질문해 보아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에릭과의 대화를 끝내고 몸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클레이는 문 앞에 서 있는 밀리안을 발견했다. 순간 열이 훅 올랐다. 클레이는 밀리안을 본 순간 자신의 몸에서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지?”
“……네?”
“왜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아니, 됐으니까 비켜.”
“아!”
클레이는 황급히 문에서 떨어지는 밀리안을 스쳐 안으로 들어갔다. 짜증이 났다. 저 남자를 끌어안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그리고 쓸데없이 야한 얼굴을 한 남자에게.
에릭은 다른 경호원들을 먼저 내려보낸 뒤, 밀리안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다 조심히 말을 걸었다.
“밀리안. 잠깐 대화를.”
“아니요. 바빠서……, 다음에 하죠.”
“……그래.”
“…….”
밀리안은 바쁘다고 에릭과의 대화를 거절했으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다리뿐이 아닌가? 뇌도 딱딱하게 굳은 것 같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바닥으로 떨어진 시야에 여전히 제 앞을 지키고 선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밀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쁘시지 않습니까? 먼저.”
“일주일. 내가 최대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이야.”
“……에릭?”
“네가 직접 말해. 사장님께서 널 특별하게 대우한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런 분이 고작 네 정체를 안다고 내칠 리가 없지 않나. 나도 네가 없으면 일이 피곤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문제없이 일이 끝났으면 하네.”
밀리안은 벌벌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만약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히고도 이곳에 남으려면 정부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건……, 밀리안에게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었다.
“감사,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벌어준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 * *
어디가 심기가 안 좋은 얼굴로 출근한 클레이 디어가 회사를 발칵 뒤집어엎었다. 사장은 기획실장이 다시 만들어온 신규 아이템에 대한 기획서를 검토한 뒤, 회의를 소집했다. 밀리안은 각 부서에 회의 관련으로 메일을 보낸 뒤 밀려드는 메신저에 관성적인 답을 보냈다.
[혹시 오늘 사장님 기분 안 좋으셔?]
[아뇨, 평소와 같으십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회의야?]
[그건 메일에 모두 쓰여있습니다. 그럼 회의 때 뵙겠습니다.]
[밀리안! 잠깐만!]
밀리안은 메신저의 상태를 자리 비움으로 바꾼 뒤 알림을 해제했다. 레이는 그런 밀리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그, 네에.”
얼빠진 대답을 하는 레이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밀리안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려 키보드를 쳤다. 따각따각. 일정하고 빠른 소리가 사무실 내에 울렸다.
너무 큰일이 닥치니 오히려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밀리안은 자료 하나를 저장한 뒤,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몰아치듯 일을 처리하고 HR팀장과 인사팀장과 차례로 면담해 비서실에 필요한 비품과 새로 충원할 인력에 대해 논의를 나눴다.
생각보다 시간을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속도로 애써 버티고 있던 밀리안의 체력도 빠르게 고갈됐다.
정적이 감도는 사무실에서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은밀하게 사장의 뒷말을 하던 사람들은 흠칫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밀리안 디모시가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그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굳은 얼굴로 사장실을 노려봤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레이는 기겁하며 밀리안의 팔을 잡았다.
“밀리안! 밀리안! 대체 왜 그래요?!”
밀리안의 고개가 잠시 레이에게 닿았다. 창백한 안색과 더불어 얼굴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보고 밀리안의 팔을 잡고 있던 레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세상에. 어디 아파요?”
“네. 그러니 팔, 놔주십시오.”
“퇴, 퇴사하려는 거 아니죠?”
“…….”
몸이 아프다는 것에서 갑자기 퇴사로 이야기가 튀었다. 밀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유리 벽 안쪽에 있는 클레이 디어를 향하고 있었다. 클레이도 밀리안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사장실 문 앞까지 걸어가 노크했다.
“사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혔다 뚝 떨어졌다. 들어가겠다고 말해놓고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발끝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모든 힘이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밀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클레이 디어의 페로몬이 공격적으로 밀리안을 덮쳤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알파의 냄새만으로도 벅찼는데, 지금은 거의 질식할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각오했음에도 깜박 정신을 잃을 뻔했다.
“무슨 일로……. 뭐야, 당신 아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나 했는데, 목이 졸린 것처럼 당장이라도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