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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4화 (1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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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클레이를 에릭 드와이스가 잡았다. 무슨 일이지? 클레이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뭐지?”

“며칠 전에 보안실에서 CCTV 영상을 가져가신 일에 관한 용건입니다.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아니, 여기서 말하면 돼. 그때 일은 신경 쓰지 마.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보안에 대해,”

클레이는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하는 에릭의 말을 끊었다. 이제는 신경을 쓰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자세한 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보안이 그렇게 신경 쓰였다면 진작 물어봤어야지.”

“……죄송합니다.”

“질책하려던 건 아니야. 아무튼, 그 일은 이제 잊어도 좋아.”

“알겠습니다.”

정말 이대로 묻어도 되는 건가? 어딘가 기분이 석연찮았지만, 클레이 디어가 워낙 확고하게 말해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에릭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용건은 그거뿐?”

“네.”

“싱겁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멈췄다.

“그런데 밀리안 디모시와 친분이 있었던가?”

“사장님의 곁에서 가장 오래 버틴 비서지 않습니까.”

“하긴 오 년이나 내 옆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엘레나에게 그걸 받아올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셨습니까?”

“음. 밀리안 디모시가 멍청한 얼굴로 보기만 하더군.”

클레이는 퇴근을 할 때까지 멍한 얼굴로 제 곁을 따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만 하더라도 멀쩡해 보였는데 어딘가 정신을 빼놓은 듯이 굴었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실수를 연발했다. 순간 밀리안 디모시가 갓 회사에 입사한 신입인 줄 알았다. 정말 몸이 안 좋은 건가. 그녀는 작게 혀를 찼다. 하여튼 쉬랄 때 쉬지 굳이 회사에 나와서는.

“그래도 오메가들이 먹는 약을 주다니 좀 짓궂은 거 아닌가?”

“뭐가 말입니까?”

“정력보조제잖아, 그거.”

“……네?”

“뭐야, 엘레나가 그걸 그렇게 오래 먹었는데 몰랐어?”

“몰랐…… 습니다.”

몸이 약한 아내가 그걸 먹고 나서 건강해져서 단순히 좋은 약이라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대니얼 크래포드도 그렇게 말하며 주었다. 에릭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에릭을 보며 클레이가 혀를 찼다.

“엘레나 좀 작작 괴롭혀. 오죽하면 그런 약을 달고 살아?”

“…….”

자신이 괴롭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약한 몸으로 자꾸 덤벼들어서 문제였다. 하지만 남에게 부부의 잠자리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밀리안 디모시에게도 나쁘진 않겠지.”

어떻게 보면 적절한 처방일지도. 엘레나에게 들은 바로는 그 약을 먹으면 열이 올라 혼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먹고 나면 뚜렷하게 체력이 좋아진다고 그랬다. 베타도 복용 가능한 약이니 밀리안도 비슷하게 반응하겠지. 오늘 그 약을 먹었다면 잠자리가 아주 볼만할 거라고, 클레이가 질 나쁘게 웃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벤틀로가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앞에 서서 그녀의 재킷을 받아들었다.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한 뒤에도 자꾸 밀리안 디모시가 떠올랐다.

‘내일 어떤 얼굴로 출근하려나.’

밀리안이 꼭 그 약을 먹길 바랐다. 아주 좋은 꿈을 꾸겠지. 아마 속옷을 잔뜩 적시고 일어날 것이다. 제 꼴을 확인하고 무슨 얼굴을 하려나. 당황한 얼굴을 할까? 아니면 해소되지 않은 욕망을 풀기 위해 섹시한 신음을 흘리며 자위를 할까?

‘하읏.’

땀에 푹 젖은 얼굴로 허리를 흔들며 야한 신음을 흘리는 밀리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이 됐다. 절정에 달한 뒤에 붉게 달아올라 헐떡이며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겠지. 성기를 흔드느라 손은 애액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클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속옷이 젖고 있었다.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이 났다. 고작 밀리안 디모시 따위에게? 그것도 직접 아래에 깐 것도 아니고 상상만 조금 했다고 발정하는 게 말이 되나?

그녀는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위로 쓸어올렸다. 미친 망상은 아예 본격적으로 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밀리안 디모시를 보여주었다. 제 머릿속에서의 밀리안은…… 기가 막히게 야했다. 그 망상은 몇 시간이 지나 꿈속에도 계속 이어졌다.

클레이 디어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뒤, 정원에 혼자 남은 에릭은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엘레나에게 받았다고는 했지만, 사실 대니얼 크래포드가 따로 챙겨준 약이었다. 이걸 먹으면 그나마 중화가 될 거라고.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가벼운 입을 가졌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까지 다 떠벌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외부로 발설하는 것은 딱 그 정도의 가벼운 일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오지랖이 넓어서 신경이 쓰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대니얼 크래포드에게 받은 약이 엘레나가 먹는 것과 같은 약인 것은 우연이었다. 밀리안에게 네가 오메가인 것을 알고 있고, 또 네가 먹고 있는 약이 위험해서 의사의 처방을 받고 가져왔다고 할 수가 없으니 엘레나의 핑계를 댄 것뿐이다.

그게 정력보조제로 쓰인다고 할지라도 의사로서 실력이 있는 남자니 틀린 처방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엘레나가 그걸 먹고 체력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니 밀리안에게도 나쁘지 않겠지. 에릭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찬바람에 열을 식히며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알약을 꺼냈다. 이것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은 건가.

살짝 떠보기만 했을 뿐인데 밀리안 디모시는 마치 그대로 죽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창백해졌다.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위장해 회사로 들어온 게 아닌가 의심을 했던 것이 허무했다. 약한 짐승을 괴롭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어차피 클레이 디어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자신만 덮어두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에릭은 작은 봉투 안에서 약을 꺼내 엄지와 검지로 짓이겨 버렸다. 가루가 되어버린 약이 손가락 사이로 흩날렸다. 그는 자신이 클레이 디어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음을 되새기며 밀리안 디모시의 약점을 지워버렸다.

* * *

집으로 돌아갈 기운도 없었다. 밀리안은 불 꺼진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간간이 공기 순환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뿐,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안에는 적막했다. 아니, 건물 자체가 고요한 것 같았다.

오늘은 실수가 많았다. 자료를 빼먹는다든가, 중요한 메일을 다른 사람에게 잘못 보내기도 했다. 차라리 출근하지 않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밀리안은 작게 웃었다. 안 되겠다. 더는 무리다. 버틸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목이 조이는 기분으로 살 게 분명했다.

텅 빈 사무실을 천천히 훑었다.

“…….”

떠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떠나기 싫은 곳이 되어버렸다.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이토록 미련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선택을 고민할 상황이 아닌데…….

오래 있으면 카메라를 통해 이곳을 살피고 있는 보안실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간접 등만 켜진 복도에 그의 발소리만 선명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따라 밀리안을 간신히 지탱해준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앉아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을 정도로 속이 뒤집힌 상태였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내장이 뒤틀렸다. 약 기운이 떨어졌는지, 회사 곳곳에 벤 클레이 디어의 페로몬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회사에 앉아 있었다니.

아주 옅게 느껴졌던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밀리안은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거칠어지는 걸음을 따라 속이 더 울렁거렸다. 조금씩 주차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행히 자신의 세단에 앉기까지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 차 문을 닫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운전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외부와 차단된 장소니까.

넥타이를 내리고 목을 조이는 단추를 몇 개 풀어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에어컨을 켜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렸다. 굳어버린 얼굴이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누구지? 창문 넘어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보안실 직원이었다. 밀리안은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핸들 위에 얹은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역시 밀리안 씨였군요.”

“네, 늦은 시간까지 수고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주차장으로 내려오시는데 몸이 휘청거려서 혹시나 하고 따라왔습니다. 안색이 창백하신데 운전하실 수 있습니까?”

경비원은 젊은 남자였다. 잘 단련된 근육이 빈틈없이 입은 정장 밖으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밀리안을 꼼꼼히 살폈다. 밀리안은 거칠게 나올 것 같은 숨을 최대한 가다듬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조금 쉬었다가 운전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경비원은 그래도 걱정된다는 듯 잠시 그를 바라봤지만 이내 뒤돌아갔다. 밀리안은 바로 창문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밀어 몸을 누였다. 몸이 다시 긴장해서 그런지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지만, 조금 전에 경비원에게 말을 한 게 있어서 잠시 시간을 둬야 했다. 정확히 오 분이 지난 뒤 밀리안은 의자를 세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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