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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3화 (1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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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나머지 대답이 느렸는데, 에릭은 그걸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를 나오기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건데 민망해할 필요 없어.”

“에릭도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비번 때 핸드폰을 아예 꺼놓고 살고 싶어.”

비번 때 불려 나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짜증 난다며 에릭이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휴가인데도 기어코 회사로 나온 당신이 이해가 안 가긴 해.”

“……에릭은 가족과 함께 살죠?”

“그렇지. 결혼을 했으니까.”

“저는 혼자 살아서 그런지 집에 오래 있으면 외롭더라고요.”

“너…….”

그때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밀리안이 먼저 밖으로 나와 에릭을 바라봤다.

“괜한 말을 했네요. 가시죠.”

“음.”

잔뜩 찌푸린 눈으로 밀리안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뗐다. 밀리안은 그 옆에서 걸으며 정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안 하던 짓을 했다. 쓸쓸한 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밀리안은 에릭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앞을 향해 걸었다.

보안실은 언제봐도 긴장감이 돌았다. 수없이 많은 모니터와 그걸 지켜보는 직원들, 그리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날카로운 눈빛을 한 경호원들까지 모두 빈틈이 없었다. 밀리안은 보안실 안쪽에 있는 에릭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앉아.”

에릭은 귀에 꽂은 인 이어를 빼고 의자를 끌어 밀리안에게 가져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밀리안은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손을 모았다. 에릭도 밀리안의 맞은 편에 앉았다. 단단하게 각이진 턱을 매만지며 뜸을 들여 더 속이 탔다.

“이전에 사장님께서 가져가셨다는 영상 말인데.”

“네.”

역시 이거구나. 밀리안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에릭의 푸른 눈이 그를 직시했다. 마치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혹시 사장님께 뭔가 들은 게 없나?”

“사장님께서 에릭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제게 할 리가 없죠.”

“……음.”

에릭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이내 긍정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영상을 수십 번 돌려봐도 이상한 점이 없어. 그래서 다른 가정을 했는데, 만에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

“―!”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냄새가 대표적이겠지. 그거라면 카메라에 잡힐 리도 없고.”

“그, 럴 수도 있겠군요.”

목이 말라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말라버린 성대를 억지로 울려 목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저는 사무실에서 특별히 이상한 냄새를 맡은 적이 없어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맞아. 고작 냄새 따위로 영상을 따로 복사해 갈 리가 없으니까.”

에릭은 말을 하는 내내 밀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미 모두 다 알고서 떠보는 것 같아서. 에릭의 가정은 일견 말이 안 되는 듯했지만, 밀리안의 비밀에 가장 근접해있었다.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로.

“하지만 사장님만 맡을 수 있는 냄새도 있지.”

“…….”

“사장님은 알파니까. 만약 다른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면? 특히 비서실에는 존재해선 안 되는 오메가의 냄새라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밀리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에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바로 앞에 앉은 에릭의 얼굴도 뿌옇게 보였다.

“그렇지만, 고작……, 그런 것이라면 보안실에 맡기지 않고 사장님께서 직접 영상을 확인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래서 모르겠단 말이지.”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팔짱을 꼈다. 미칠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게 지옥 같았다. 정말 모르는 게 맞는 걸까? 에릭이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니라, 직구로 물어볼 것이다.

“그럼 이제 올라가도 될까요?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같아서…….”

“아, 미안하군. 내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어.”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대로 서 있는 게 맞는 걸까? 표정 관리는?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겠지? 끔찍한 물음이 그의 머리에서 뒤죽박죽 쌓였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래. 밀리안, 당신도.”

삐걱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당겨 에릭의 사무실 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 밀리안, 잠시만.”

“……네?”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밀리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에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의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가져왔다. 작은 종이 가방. 저게 뭐지?

“받아.”

“이게, 뭐죠?”

“내 아내가 오메가야.”

“……네?”

온몸이 경련하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러지? 차라리 에릭이 자신을 향해 오메가냐고 묻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오메가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몸이 좀 약해. 그래서 항상 챙겨 먹는 약인데, 베타에게도 좋다더군.”

“그걸, 왜 저에게…….”

“두통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 체력이 좋아지면 스트레스도 줄어들어. 면역력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테니 한번 먹어보고 더 필요하면 말해.”

“그……, 감사합니다.”

“음.”

별로 무겁지 않은 무게였는데 받아드는 순간 팔이 아래로 확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밀리안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에릭의 사무실을 나섰다.

* * *

괜히 왔다. 차라리 집에 있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만약 클레이 디어가 준 휴가를 모두 채운 뒤에 출근했다면 그날 에릭이 그를 부르리라는 것을.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었다. 늦든 빠르든 반드시.

밀리안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에릭이 준 선물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비서실 안은 어수선했다. 그가 없는 사이 레이가 큰 실수를 해 클레이 디어에게 호되게 혼이 난 모양이었다.

맥시의 설명에 밀리안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그가 비서실의 책임자였기에 레이의 대변인 역할을 했을 텐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사실 맥시의 말도 제대로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말이 끝난 것 같아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뿐이었다.

밀리안은 책상 위에 종이 가방을 올려놓고 차마 건드릴 생각도 못 하고 보기만 했다. 굳이 아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말한 이유가 뭘까. 단순한 걱정일까? 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에릭이 한 말이 모두 의미심장했다.

계속 넋을 놓고 보고만 있자, 비서실 직원들도 그의 책상 위에 있는 물건에 대해 궁금증을 보였다. 맥시와 줄리아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뭔데 그렇게 보고 있어요?”

“…….”

“밀리안?”

“……네?”

맥시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시야가 막히자 밀리안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그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자, 맥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말을 걸어도 못 듣는 거냐며 짓궂게 웃었다.

“혹시 고백이라도 받은 거예요?”

“네?”

“하긴 요즘 밀리안이 섹시해지긴 했죠. 그렇지, 줄리아?”

“확실히.”

맥시의 말에 말수가 별로 없던 줄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밀리안 이런 선물 받아도 돼요? 애인 있는 거 아니었어요? ”

“제가요?”

무슨 애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맥시는 그가 일부러 숨긴다고 오해한 듯했다.

“에이, 우리끼리 왜 이래요? 갑자기 섹시해진 이유가 있을 텐데.”

“맥시, 성희롱이야.”

도를 넘으려는 맥시를 향해 줄리아가 경고했다. 맥시는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밀리안, 저 신고하려는 건 아니죠?”

“안 해요. 하지만 애인은 정말 없습니다.”

맥시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애인이 없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밀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멀쩡한 척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애인이 있었다면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에이, 진짜 애인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럼 그건 뭐예요? 여자에게 받은 건 맞죠?”

“아니요. 에릭이 줬습니다. 건강에……, 좋은 약이라고 하더군요.”

“밀리안 어디 아파요?!”

맥시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갑자기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고음에 밀리안이 눈을 움찔 감았다. 귀가 얼얼할 정도의 성량이었다. 워낙 큰소리였던 터라 어느 정도 방음이 되는 사장실에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클레이 디어까지 나왔다.

“누가 아파?”

“사장님, 그게.”

“사장님. 에릭이 밀리안에게 약을 줬대요.”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사장을 향해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 텐데 맥시는 이상할 정도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병원은요? 검진은 받아봤어요? 아무리 의료비용이 비싸도 병이 커지는 것보다 나은 거 알죠?”

“맥시…….”

밀리안은 맥시가 쏟아내는 말에 기운이 쭉 빠졌다.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그 전에 치고 들어왔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니 밀리안은 입만 벙긋대다 결국 포기하고 다물었다.

맥시가 말을 할 때마다 눈을 찌푸리던 클레이 디어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다행히 그녀가 끼어들어 맥시의 소란이 잠시 멈췄다.

“밀리안, 잘 쉬고 온 게 아니었어?”

“비행기에서 스트레스성 두통이 있다는 말을 에릭이 신경 써주신 것 같습니다. 그걸 맥시가 오해했고요.”

“흐음. 에릭이 선물을 줬다고?”

여자는 그가 차마 건드리지도 못한 종이 가방를 뒤적거렸다. 정사각형의 박스 하나를 꺼낸 클레이 디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오메가들이 먹는 약이 아니었나? 아, 베타도 복용할 수 있는 약이군.”

“……뭔지 아십니까?”

“그래. 엘레나가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거거든. 아, 엘레나는 에릭의 와이프야.”

정체를 알고 나니 흥미가 가신 듯 클레이 디어는 그 상자를 다시 종이 가방에 집어넣었다.

“잘 챙겨 먹어. 냄새는 좀 이상해도 효과는 좋은 것 같으니까.”

“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클레이 디어와 그가 나눈 대화로 인해 진실을 알게 된 맥시가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정말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며 사과를 했다. 줄리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은 미미하게 경련하는 입술을 끌어당겨 어설프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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