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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11화 (1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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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신경이 쓰이니 계속 눈이 갔다. 클레이는 차분한 얼굴로 제 옆을 따르는 밀리안을 주시했다.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남자는 의외로 괜찮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눈이 특별했다. 무심하다고 생각했던 눈은 눈꼬리가 내려가 어딘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깊게 진 그림자는…….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다. 한번은 정체 모를 오메가의 냄새에 발정하질 않나, 이번엔 밀리안 디모시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요즘 정말 자신이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클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한 중국 출장으로 인해 국내 일정이 꼬여 정신이 없던 차에 머리마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이제 급한 일정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지?”

“네. 당분간은 외부일정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밀리안, 당신도 오늘은 그만 퇴근해.”

출장부터 시작해서 열흘간은 거의 정신없이 제 뒤를 따라다녔으니 과하게 부려먹었다. 클레이는 목요일인 오늘부터 화요일까지 쉬라고 휴가를 줬다. 제 말에 놀랐는지 피로가 첩첩이 쌓인 갈색 눈이 크게 뜨였다.

“왜, 싫어?”

“아니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좋은 상사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콧대가 너무 높은 거 아니야?”

“낮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입바른 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입이다. 클레이는 기가 막혀 짧게 웃었다. 그 낮은 콧대도 넘지 못할 정도로 쓰레기라는 거야, 뭐야?

“지금 날 욕한 거야?”

“그것도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남자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사무실 앞까지 도착해있었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다며 밀리안 디모시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어딜 사장보다 먼저 퇴근해?”

“지금부터 휴가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회사를 나간 시점부터 휴가지. 내가 특별히 준 포상휴가인데 내 기준을 따라야 하지 않겠어?”

“…….”

이제는 눈으로 욕하네? 깊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는 흡사 비열한 사기꾼을 보는 듯했다. 클레이는 왠지 모르게 즐거워졌다. 이 남자와 하는 별거 아닌 대화가 꽤 재밌다. 시답잖은 농담이었는데 진담으로 받아들인 듯 체념한 얼굴도 짜증 나면서 웃겼다.

“그럼 정시에 퇴근하겠습니다.”

“농담이야. 지금 퇴근해.”

“정말입니까?”

“믿기 싫으면 휴가는 없던 일로 할까?”

“…….”

“밀리안, 당신은 말하는 게 좀 짜증 나긴 해도 내겐 소중한 사람이거든? 난 내 사람은 나름대로 잘 챙겨.”

그러니 제발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옷 위로도 살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 클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깨 라인은 유려한 편인데 너무 말랐다.

“쉬는 동안 식사 좀 잘 챙겨 먹고. 운동도 해. 이렇게 말랐으니 두통이 계속 오는 거야.”

스트레스성은 무슨. 영양부족과 운동 부족으로 몸이 아픈 거겠지. 이것 봐. 고작 어깨를 좀 두드렸다고 덜덜 떠는 게 말이 되냐고. 클레이는 혀를 차며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약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거면 내 주치의에게 진찰을 한번 받…….”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의사셔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아.”

부친이 의사라면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호의를 베푸는 건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밀리안의 대답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클레이는 어서 퇴근하라고 말을 한 뒤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연 참이었다.

미약한 냄새가 난다. 얼마간 자신을 괴롭혔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아주 약하게 느껴졌다. 클레이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들과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밀리안 디모시.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모습이었다. 이상한 기미를 느낀 것은 자신뿐.

밀리안은 아니다. 그는 베타가 맞았고,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으니까. 만약 밀리안이 이 냄새의 주인이라면 계속 붙어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서실을 주의 깊게 보다 짐을 정리하고 일어난 밀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창백한 얼굴. 클레이는 조금 전까지 직원들에게 품었던 의심을 내려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신경을 쓸 테니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다.

* * *

“이게 무슨 약인지 아십니까?”

에릭 드와이스는 비닐에 밀봉한 하얀색 알약을 대니얼 크래포드에게 보였다. 대니얼은 에릭이 건넨 약을 받아 앞뒤로 보고 가볍게 대답했다.

“이건 오메가들이 먹는 약인데, 이걸 왜 에릭이 가지고 있죠?”

그것도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구할 수 있는 약이다. 대니얼의 눈에 의문이 맺혔다.

“…진통제가 아닙니까? 다시 확인해주십시오.”

“여기 이 표시 보이죠? 이건 오메가용 약에만 사용할 수 있는 부호예요. 그리고 숫자로 등급이 매겨지죠. 오래 볼 것도 없어요.”

“정확한 용도는 어떻게 됩니까?”

“페로몬을 막는 약인데, 이 등급은 꽤 약이 독해서 오메가가 복용하면 베타라고 알 정도라고 보면 돼요.”

“독하다, 라. 그렇다면 두세 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세 번 이상 복용을 하면 어떻습니까?”

“……미쳤어요? 죽으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이건 그렇게 과복용하면 안 돼요. 잘못하면 전신 마비, 더 심각하면 심정지까지 올 수 있다고요. 설마 아는 사람이 이걸 그런 식으로 먹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이렇게 밀봉까지 하고 에릭이 들고 왔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죠. 말해봐요. 비밀 지킬 테니.”

“……닥터 크래포드와 비밀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요.”

묵직한 시선이 대니얼 크래포드의 전신을 훑었다. 흥미진진하게 내막을 캐려던 대니얼의 입술이 잘게 경련했다. 주인이고 부하고 자신을 뭣처럼 여기는데 아주 도가 텄다. 나름대로 학계에서 유명세를 달리는 실력 있는 의사인데 디어 가의 인간들은 툭하면 그를 무시하고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언제 비밀을 누설한 적이 있나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군요. 가장 최근에는 제 검진 결과를 엘레나에게 보내지 않았습니까?”

“엘레나는 에릭의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라도 의사라면 환자의 비밀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그건…… 엘레나가 우는데 어떡해요.”

“고작 눈물 한 방울에 가볍게 환자의 비밀을 발설하는 분이시죠.”

특히 그 눈물이 연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에릭 드와이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폐부를 찔렀다. 대니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특히 에릭이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상태였던 터라 더 그랬다.

에릭은 대니얼의 손에서 밀봉된 알약을 가져왔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 그래요. 에릭도 수고하세요.”

물어볼 것이 있다며 심각한 목소리로 연락해서 기존에 잡힌 예약마저 밀어가며 만났는데, 에릭 드와이스는 제 볼일이 끝나자마자 횡, 하니 나가버렸다. 아주 옆집 똥개구나. 대니얼 크래포드는 빈 진료실에 앉아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디어 가. 주치의 따위 때려치울 테다.

에릭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의 엔진에 시동을 켜고 생각에 잠겼다. 밀리안 디모시가 이것을 먹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렇다는 말은 그가 오메가라는 뜻인데……. 그는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툭툭 쳤다.

베타가 아니었나? 아니, 모든 것을 차치하고 이런 약을 먹으면서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뭐지? 그것도 전신 마비와 심정지. 부친이 담당의인데 약의 부작용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계속 그렇게 먹으면서. 에릭 드와이스의 얼굴이 굳었다.

“…….”

밀리안 디모시가 산업 스파이일 리는 없다. 그가 오 년간이나 사장의 곁에 있으면서 의심 갈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만약 밀리안이 산업 스파이라면 그를 고용한 회사는 쓸데없이 돈을 날린 것이다. 그만큼 밀리안 디모시는 수없이 보고 들은 기밀을 잘 지켰다. 차라리 대니얼 크래포드가 스파이라고 한다면 수긍을 했겠지만 밀리안은 절대로 아니다.

사장, 클레이 디어가 분명 특이한 점이 없던 비서실 영상을 복사해 갔던 게 떠올랐다. 그것과 밀리안 디모시가 오메가라는 사실이 연관이 있을까?

‘이 사실을 사장님께 보고해야 하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약을 챙기던 밀리안이 떠오르자 그것도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아직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밀리안 디모시도 그런 오메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내인 엘레나도 그랬던 터라 그의 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인 호감 때문에 그대로 함구할 가벼운 문제도 아니다.

‘어렵군.’

이런 뜻밖의 사실을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밀리안의 말대로 진통제라고 생각했고, 만의 하나를 위해 확인한 것뿐이었다.

잠시 시동만 켠 채 홀로 생각하던 에릭 드와이스가 기어를 당겼다. 그 뒤로 영상을 가져간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던 클레이 디어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그리고 밀리안 디모시에게도.

* * *

클레이는 제 몸 위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오메가를 무심히 바라봤다. 이전이라면 꽤 흥이 돋았을 정도로 남자의 테크닉은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전혀, 라고 할 정도로 흥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성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오메가의 페로몬이 달게 느껴지지 않는다. 애달프게 유혹하는 향기가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알파의 관이 부풀어 오르기는커녕 아래가 젖지도 않았다. 클레이는 제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열심히 음부를 핥고 있는 남자를 칭찬하기보다 문득 떠오른 남자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남자는 그녀가 먼저 꺼낸 휴가에 눈에 띄게 반색했다가 줄 듯 말 듯 말을 바꾸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입바른 말 한 번이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을 텐데도 남자는 고지식하게 그녀의 결정만 기다렸다.

클레이는 상체를 받치고 있는 쿠션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밀리안 디모시가 과연 여자를 만난 적이 있을까? 여자의 위에서 열심히 허리를 흔드는 모습을 상상해봤지만,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 남자는 차라리 알파의 아래서 우는 편이 더 어울렸다.

‘흐읏.’

그래, 그렇게. 듣기 좋은 소리로 애달프게 우는 게 어울린다.

“아, 클레이. 좋아요? 젖었어요.”

“뭐?”

“갑자기 애액이 흘러나와서……. 다 빨아 먹어도 되나요?”

“…….”

단숨에 상념을 깨트린 목소리에 클레이는 제 다리 사이에 있는 남자를 내려봤다. 야한 얼굴로 입술에 묻은 액체를 혀로 핥는 모습은 거울을 보며 꽤 연습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칭찬하듯 남자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다시 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고, 쓸데없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클레이는 지루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봤다.

많이 말랐지만, 체형은 괜찮았다. 아니, 그런 싸구려 슈트를 입은 것치고는 라인이 퍽 유려했다. 벗겨놓으면 아마 더 그럴싸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몸을 보여줄 여자는 없는 것 같다. 그 딱딱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만한 유연함이나 적극성이 있을 턱이 없다.

동정이려나. 아마도 그렇겠지. 그 남자가 여자와 만난 경험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지 않았을 테니까. 밀리안이 알았다면 무례하다고 정색했을 생각을 하며 클레이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애교가 있으면 좋을 텐데. 클레이의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만큼 나른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 같았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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