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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었다. 대체 뭐지? 상황파악이 안 돼 눈만 깜박이는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베타에게 무릎을 내어준 건 처음이야.”
여자는 은밀한 무언가를 내포하듯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네?”
“첫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마운데 이제 슬슬 일어나주지 않겠어?”
여자의 말과 함께 머리가 흔들렸다. 그제야 자신이 클레이 디어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밀리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말도 안 돼. 미치지 않고서야…….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정신없이 말을 하고 있음에도 밀리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밀리안을 말없이 보던 여자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풋.”
아하하. 여자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뭐가 웃긴 거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밀리안은 눈만 깜박였다.
“그런 얼굴을 할 줄은 알았지만, 정말 예상을 빗나가질 않네.”
뭔가 놀림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여자의 기분은 크게 상한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밀리안은 침중한 얼굴로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당신이 이렇게 곯아떨어질 정도로 무리를 시킨 것은 나니까.”
“…….”
클레이 디어는 옆에 놓인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간혹 제멋대로 굴 때가 있긴 하지만, 일 할 때만큼은 철저하게 일에만 집중한다. 아직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저와는 달리 여자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슬슬 도착하겠군.”
그러고 보니 현지공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네 시간은 족히 이동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벌써 도착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잤다는 건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는데 차가 잠시 멈췄다가 안으로 진입한 곳은 호텔이었다.
“일정이 바뀌었습니까?”
“아니. 공장이라면 이미 다녀왔지.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알아?”
“네?”
“잘 자더라, 정말.”
클레이 디어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깨지 않고 잘 수가 있냐며 신기해했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다녀왔다는 것은 왕복 여덟 시간이나 잠들었다는 여자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밀리안은 손목시계를 먼저 확인한 뒤, 그도 부족해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AM 05:17
날짜가 바뀐 다음 날 새벽이었다. 밀리안은 여자의 무릎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보다 더 새파랗게 질렸다. 약효가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오래 잠들었다고? 네 시간을 잤어도 너무 많이 잔 것인데, 그도 모자라 여덟 시간을 넘게 잤다니.
설마 들킨 것은 아니겠지? 혹시라도 약효가 떨어져 오메가의 냄새라도 났다면…….
하지만 클레이 디어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모르는 거다. 괜찮아 아직은……. 그렇게 안도하고 있을 때, 여자는 깜박했다는 듯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밀리안의 몸이 움찔 튀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고 왜 안 해?”
“네?”
“여덟 시간이나 재워주고, 무릎까지 베게 해줬는데 고맙다는 말을 할 생각을 안 하네?”
“……감사합니다.”
굳이 무릎을 베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잠을 깨워주는 편이 더 고마운 처사였지만, 밀리안은 현명하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억지로 토해내게 한 감사 인사 따위가 썩 마음에 찬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로 생색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클레이는 잠시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슬슬 꺼내려 시동을 걸었다.
“이런 사장이 또 어디에 있겠어. 안 그래?”
“……네.”
밀리안이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그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오른 것을 보며 클레이의 얼굴이 더 환하게 피었다.
“그러니 슬슬 계약 다시 하지?”
“뭘, 말입니까?”
“승진하라니까.”
“아니요, 죄송합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단 일 초도 생각하지 않는 칼 같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호텔 정문 앞에 선 세단이 정차했다. 밀리안이 내리려고 문을 여는데 클레이가 버튼을 눌러 문을 잠갔다. 달칵, 허무한 소리만 울리고 정작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내리려고 해.”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그녀의 심기가 가파른 속도로 내려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이미 거절했지 않습니까?”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 보지?”
“그럼 고민해 보겠습니다.”
“…….”
‘대답은 똑같겠지만.’
밀리안의 생각을 클레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두 번이나 이런 제의를 해 본 적도 처음이고, 거절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여러모로 첫 경험을 많이 한다. 이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남자로 인해.
이 자체로 기분이 상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밀리안 디모시에게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 년간의 시간 동안 나름의 정이 쌓인 걸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가 파르르 떨며 당황하는 모습도,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도 사실 재밌었다.
“하나 마나 한 고민을 하시겠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조금 전까진 내 무릎에 기대서 잘 자더니 갑자기 왜 내외하실까?”
“그건.”
밀리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 무릎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오픈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문이 열렸다. 이미 밖에서 경호원들이 그들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치듯 먼저 내려버린 밀리안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클레이도 내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발치에 하얀색 작은 통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뭐지?’
자신의 것일 리가 없으니 아마도 밀리안의 것이리라. 아까 잠들었을 때 떨어트린 것 같다. 뚜껑을 따보니 하얀색 알약이 반쯤 차 있었다. 약통 겉면은 아무런 글자가 안 쓰인 휴대용이었다.
‘흐음.’
저 고지식한 남자가 그런 약을 먹을 리가 없지. 그래도 혹시 몰라 잠시 근래 유행하고 있다는 약물을 떠올려 봤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환각성 약물 중 이런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항상 약을 상비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건가. 하긴. 운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마른 몸이었다.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머릿결도 거칠었다.
“사장님. 안 내리십니까?”
“아아, 내려.”
한참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에릭 드와이스의 목소리에 클레이는 약통의 뚜껑을 닫고 차에서 내렸다.
* * *
무심결에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밀리안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약이 없다. 어디에 있지? 분명 재킷 주머니에 잘 뒀는데……. 설마 잃어버린 건가? 비행기에서도 한번 떨어트렸으니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의 가장 높은 층으로 이동하는 내내 지금까지 그가 지나왔던 곳을 다시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으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특히, 클레이 디어와 에릭 드와이스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지금이라면 특히 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빨리 가방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약을 가방에 넣고 깜박 잊었을지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 때문이었다.
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상단을 바라봤다.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느리게 느껴졌다. 만약 캐리어에도 없으면 어떡하지. 내일 오후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클레이 디어와 함께 있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이 더 문제였다.
대체 언제, 어디에서 잃어버린 거지?
비행기, 공항, 이동하는 차 안, 베이징 지사, 그리고 또 공장까지 이동했다. 잠이 들어 내리지 않았으니 공장은 제외하더라도 그가 움직인 동선은 너무 길었다.
초조하게 엘리베이터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클레이 디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밀리안, 잃어버린 거 없어?”
“네?!”
“왜 그렇게 놀라?”
클레이 디어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의뭉스러운 눈으로 저를 살피는 여자의 시선에 밀리안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자신이 뭘 떨어트렸는지 아는 거라면 빨리 달라고 닦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닳고 닳아버린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최대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클레이 디어가 제게 말을 건 동시에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경호원과 수행원들이 전부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띵-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펜트하우스 현관이 보였다. 이곳과 계단으로 연결된 위층까지 모두 하나의 집이었고, 클레이 디어는 수행원들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통째로 빌렸다.
현관 앞에 선 여자는 선뜻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얀색 약통. 그가 잃어버린 것이 맞았다.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가장 들켜선 안 되는 사람의 손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바로 그에게 넘겨줄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의 손 위에 약통을 올려놓은 상태로 그의 손까지 꽉 쥐었다. 선천적으로 체온이 낮은 그의 손에 대일 듯이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꼭 낙인을 찍어 내린 것 같은 불길이 그의 손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혹시 어디 아픈 곳이 있어? 이렇게 약을 상비해야 할 정도라면 평소에도 문제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냥, 근래 두통이 잦아서…….”
“진통제?”
“네.”
“얼마나 심하면 손을 이렇게 떨어.”
“―!”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아, 닙니다. 스트레스성 편두통입니다.”
“스트레스? 설마 그거 나 때문은 아니겠지?”
“……손부터 놔주십시오.”
아니란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약까지 먹고 있는 부하직원을 상대로 심술을 부리고 싶진 않았다. 스트레스성 편두통이라니. 클레이는 밀리안의 손 위에 약통을 놓고 천천히 손을 뺐다. 밀리안이 너무 떨고 있어서 계속 붙잡아 두고 있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툭-
하얀색 플라스틱 통이 대리석 바닥을 한번 튕기고 떨어졌다. 제대로 손 위에 올려주었는데 그걸 잡지 못하다니. 클레이는 제 다리 사이로 굴러온 약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슈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마른 남자가 제 발치에 몸을 숙여 약통을 줍고 있었다.
고작 손 한번 잡은 게 그렇게 불쾌한가? 그렇다 하더라도 꽤 과민한 반응이었다. 상대가 밀리안 디모시가 아니었더라면 수상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같이 있던 차 안에서 도망치듯 내린 것도 그렇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거슬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성 두통으로 약을 처방받아야 할 정도로 싫단 말이지.
여전히 덜덜 떠는 손으로 가벼운 플라스틱 통 하나 제대로 집지 못하는 남자를 지켜보던 클레이는 다리를 접어 몸을 내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제 무릎에서 잠이 들 때 만해도 멀쩡하더니 이 짧은 시간에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목덜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 정말 몸이 안 좋은지 숨결이 흐트러져서 흘러나온다.
클레이는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약통을 주워 남자의 재킷 주머니에 직접 집어넣었다. 움찔, 몸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뭘 했다고. 소중한 약을 친절히 손수 챙겨주었는데 너무 하잖아.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며 부러 허리를 길게 그었다. 남자의 몸이 다시 튀어 올랐다.
“흐읏!”
“당신…….”
야한 소리. 클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행기에서도 그랬지만, 남자의 신음은 꽤 야했다. 제 침대를 데웠던 남자들보다도 훨씬 야릇한 소리였다. 정말 제대로 울리면 어떤 소리를 낼지 기대가 될 정도로.
미쳤어? 이 남자는 밀리안 디모시야.
클레이는 자꾸만 움칫거리는 손을 말아쥐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빨리 들어가서 쉬도록 해.”
멍청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두고 그녀는 바로 이 층으로 올라갔다. 빨리 쉬어야 할 사람은 밀리안 디모시가 아니라 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