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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섹슈얼-9화 (9/144)

-9-

되도록 가까이 있는 것을 피하고 싶어도 그의 위치상 불가능했다.

두 시간 전에 먹었던 약이 기능을 상실한 듯 숨이 턱 막혀왔다. 창문조차 열지 못하는 전세기 안에 클레이 디어의 페로몬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밀리안은 클레이 디어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며 재킷의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약을 꺼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좌석에 비치된 물 한 통을 단숨에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비행기 내부를 순찰하던 에릭 드와이스가 인 이어를 귀에서 빼내며 밀리안에게 다가왔다.

“밀리안, 혹시 지병이라도?”

“네? 아닙니다. 잠시 머리가 아파서…….”

약을 먹는 모습을 본 듯 진중한 에릭의 눈에 의아함이 비쳤다. 밀리안은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미간을 손으로 살짝 문질렀다. 머리가 아팠던 것도 사실이었던 터라 에릭은 그대로 믿은 것 같다.

“아까도 먹지 않았나?”

“……이상하게 약이 잘 안 드네요.”

봤구나. 밀리안은 조금 더 행동을 주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약에 너무 의지하면 내성이 생겨서 안 좋아.”

“그래야 하는데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요.”

“그렇긴 하지.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일정에 없는 출장이니 힘들겠군.”

에릭이 그의 옆좌석에 앉으며 눈을 감고 있는 클레이 디어를 곁눈질했다. 밀리안이 입만 끌어 올려 열없이 웃었다. 하필 이때 해외 출장이 잡혀서는.

중국에 짓고 있는 공장이 공안정부의 압력에 무산될 위기에 놓여서 급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터진 일이어서 밀리안은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바로 공항으로 달려와야 했다.

회사에서 중요한 사업으로 지정해 놓은 곳이라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도착해있던 사장의 얼굴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해결 방안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문제는 항상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마다 클레이 디어는 분명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그 안에서 이득을 취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전세기의 넓은 좌석이 왜 이렇게 불편하기만 한 지. 밀리안은 편하게 등을 기대지도 못한 채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 허리를 구부렸다.

“자세가 나빠. 운동은 하고 있는 건가?”

“요즘 시간이 안 돼서…….”

“그래도 체력을 유지하려면 운동은 해야지. 허리도 펴고. 두통이 계속 오는 원인 중에는 운동 부족도 있을걸?”

“읏!”

강제로 그의 등을 세우는 에릭의 손에 밀리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갔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클레이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갸름하게 뜬 눈에 밀리안의 몸 여기저기를 두드리는 에릭 드와이스가 보였다.

‘간도 크게 내 앞에서 섹스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하긴 애지중지하는 아내가 있는 에릭이 그럴 리도 없고, 아무리 봐도 밀리안은 게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꽤 야한 소리였다. 그 밀리안 디모시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 에, 에릭, 아프, 아픕니다. 살살.”

“참아. 이것도 아프다고 하면 어쩌려고.”

“흐으…….”

직접 보지 않는다면 누가 들어도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라고 당연히 오해할 만큼 대화가 이상했다. 클레이는 싱겁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입을 벌리고 소리를 흘리고 있는 밀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제법 그럴싸하네…….’

며칠 전 피로함을 물씬 담은 얼굴이 섹시하다고 잠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애써 통증을 참으려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새어나간 소리에 귀가 붉어진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훨씬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욕구불만이라고 해도 밀리안 디모시를 상대로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라니. 차라리 그 은밀하고 소름이 끼치도록 간지러웠던 페로몬을 상상하며 욕정에 불탔던 것이 더 그럴싸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긴 마찬가지였지만.

클레이는 치졸한 짓을 벌일 뻔했던 며칠 전이 떠오르자, 제법 들을만하다고 생각했던 밀리안의 신음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헉!”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데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소리까지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클레이가 일갈하자 본격적으로 밀리안의 등을 펴고 있던 에릭의 몸이 멈췄다. 그제야 비행기 안이 조용해졌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마.”

“죄송합니다, 사장님.”

“…….”

그때 에릭에 의해 위로 뒤집힌 밀리안의 재킷 주머니에서 하얀색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아!”

“밀리안?”

비행기 바닥을 도로록 굴러가는 약통에 밀리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움직이지 말라고 제지하는 에릭을 밀고 이미 한참 뒤까지 굴러간 약통을 황급히 주웠다. 아래로 떨어진 충격 탓인지 플라스틱 뚜껑이 살짝 벌어져 있었지만, 약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바닥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이미 경고를 했음에도 다시 소란을 피운 밀리안의 행동에 클레이가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조용히 하라던 내 말, 안 들렸어?”

“……죄송합니다. 제 물건이 떨어져서 그만.”

“빨리 자리에 앉아.”

“네.”

밀리안은 손에 쥔 약통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겉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약의 정체를 알까 두려웠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로 돌아온 밀리안은 자신을 보는 에릭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클레이 디어나 인 이어를 다시 귀에 꽂고 다시 기내를 순찰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에릭도 모두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음에도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리안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통을 꽉 쥐었다. 이걸 잃어버리면 안 된다. 절대로.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어가던 에릭 드와이스의 시선에 아주 작은 하얀색 알갱이가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조금 전 밀리안의 약통에서 떨어진 약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가운데에 선이 그어진 알약은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사색이 되어 떨어진 약을 잡기 위해 뛰어가던 밀리안의 얼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진통제 따위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흔한 약이기에 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물론 체질상 의사에게 반드시 처방을 받아야만 하는 약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진통제에 저런 반응까지 보일 정도일까. 밀리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든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다.

에릭 드와이스는 검은색 재킷 안쪽 주머니에 작은 알약을 집어넣고 일어나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언제 약효가 떨어질지 몰라 계속 긴장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던 밀리안과는 달리 비행하는 내내 푹 잔 클레이 디어는 입국심사를 마치기 무섭게 현지지사로 향했다.

마라톤처럼 이어지는 회의와 회의. 연달아 이어진 회사가 총 열두 시간이 넘어가자 오랜 비행으로 체력이 깎였어야 할 클레이 디어가 회의실 안에서 가장 멀쩡해 보였다. 자신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지고 있는데 클레이 디어는 체력의 한계가 없다는 듯 냉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클레이 디어의 외모에 넋이 나가고 이후로는 그녀의 요란한 사생활에 대해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질문과 그 뒤로 이어지는 적절한 해결 방안에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듯했다.

항상 그래왔던 과정이었다. 여자는 제 앞에 놓인 편견이나 장애물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걷어찼다. 그리고 저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미친 듯이 끌어당겼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혹시라도 오메가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항상 전전긍긍하는 자신과는 전혀 달라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장장 열두 시간이 넘는 길고 긴 회의가 끝이 나기 무섭게 클레이 디어는 호텔로 가지 않고 바로 공장으로 향했다. 잠시 준공이 멈추긴 했지만, 완공 직전이어서 기왕 온 김에 시찰을 가겠다는 의지에 현지 지부장을 비롯한 이사진들까지 클레이 디어의 차 뒤꽁무니를 쫓아오고 있었다.

“밀리안, 개발 진척도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맞추고 말하던 클레이는 제 어깨를 툭 치는 무게감에 고개를 들고 실소를 흘렸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감히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잠든 지도 모르겠지. 내일까지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려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사치인 터라 조금 과하게 몰아쳤던 모양이었다. 이 딱딱한 남자가 일하는 도중 기절하듯 잠이 든 걸 보면. 하긴, 이 정도까지 군말 없이 따라온 게 더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베타치고는 나쁘지 않은 체력이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그의 키와 체격에 비해 꽤 작았다. 잠시 밀리안의 정수리 부근을 보던 클레이는 제 어깨에 가해진 무게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주 제대로 잠이 든 것 같다.

깨울까, 그냥 머리만 치울까. 잠시 고민을 하던 찰나, 고요한 차 안에 아주 작은 숨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남자의 숨소리를 따라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육체는 피로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클레이는 충동적으로 태블릿 화면을 껐다. 그리고 차 시트에 등을 댄 채 눈을 감았다.

그러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밀리안 디모시였다. 이 딱딱한 남자를 옆에 두고 편안하다는 감정을 느끼다니. 그가 오메가도 아닌데 무슨 황당한 생각인지.

“으음.”

“…….”

웃는 도중 몸이 흔들렸는지 남자가 불만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제 어깨에 머리를 비빈다. 클레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잠투정을 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 심산이었는데 남자의 머리는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그녀의 허벅지로 툭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대체…….”

애교가 많은 오메가들이 제게 아양을 떨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밀리안 디모시가 오메가도 아닐뿐더러,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제가 더 놀라자빠질 테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네.’

과연 눈을 뜨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클레이는 심술궂게 웃었다. 분명 사색이 되어 제가 왜 그랬지, 자괴감에 빠진 얼굴을 할 게 뻔했다. 남자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클레이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허벅지를 짓누른 머리의 무게감은 그리 과하지 않아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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