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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오메가를 만나도 흥분이 되지 않는다. 섹스로 쌓인 걸 풀어내지 못하니 육체에 노폐물이 쌓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꽤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것도.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자신의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전화는 수신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됐다.
“대니얼.”
[클레이? 무슨 일이야? 오늘 신나게 노는 날 아니었어? 설마 너무 과하게 놀아서 뭐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클레이 디어의 일과는 파파라치에 의해 낱낱이 공개되는 편이었다. 특히 오늘은 오메가 한 명만 호텔로 불렀다는 얘기에 [드디어 클레이 디어가 정신을 차린 것인가?] 하는 식으로 가십이 퍼져나갔다.
클레이의 주치의이자 오랜 친구인 대니얼 크래포드는 SNS에 도배된 기사와 사진을 보며 덩달아 놀라던 중이었다.
한창 즐기고 있을 친구에게 연락할 수도 없어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에 당사자에게 연락이 왔다.
“대니얼.”
한숨을 동반한 클레이의 목소리는 고혹적이었으나 대니얼에게는 그녀가 오메가와 섹스를 하고 난 뒤에 한숨을 쉬었다는 것 자체가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안 좋은 쪽으로 굴러가는 뇌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제발 오드레아의 성기가 파열된 건 아니라고 말해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대니얼는 의사로서 능력도 있고, 나름대로 좋은 친구였지만 안타깝게도 말이 너무 많았다.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에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약이 필요해.”
[난 마약은 못.]
“대니얼, 그만 입 닥쳐. 페로몬 유화제 말하는 거야, 난.”
[……뭐라고?]
네가 그게 왜 필요해?
차마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대니얼이 더듬거렸다. 클레이는 긴 금발을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겼다. 그러게. 내가 그게 왜 필요할까.
“지금 갈 테니까 준비해 놔.”
[어? 어어. 어?! 진짜야?]
뚝.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샤워를 한 번 더 해야겠다. 클레이는 제 몸을 덮고 있는 하얀색의 가운을 벗어 던졌다.
* * *
D&J 그룹, 비서실의 메신저의 창은 끊임없이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갔다.
[사장님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지 않아요?]
[사장님 어제 호텔 가지 않았어?]
[갔죠. 제가 예약했는데.]
[그런데 왜 저래?]
꿀 같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인데 사무실 분위기는 우중충하기만 했다. 모두 사장인 클레이 디어 때문이었다.
방탕한 성향에 비해 옷 스타일만은 항상 단정하던 그녀였다. 단정하다 못해 과하게 금욕적인 옷을 입었다. 셔츠는 항상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고, 살 같을 드러내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야한 가슴을 거의 노출 시킨 의상이었다. 그나마 치마는 길었지만, 허벅지까지 과감하게 트여있어 육감적인 다리가 그대로 노출됐다.
그나마 단정한 의상 때문에 클레이 디어의 매력적인 외모에 조금이나마 적응이 됐는데 지금은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한번 시선을 주면 쓸데없이 홀릴까 봐 그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차라리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사장실을 두른 유리는 빌어먹을 정도로 투명하기만 했다.
[모르세요? 사장님과 함께 호텔에 들어간 오드레아 드뷔시가 한 시간도 안 돼서 혼자 나온 거요. 사진 이미 떴는데.]
[말도 안 돼. 사장이 섹스파트너를 그렇게 빨리 내보냈다고?]
[저도 그래서 안 믿었는데, 오늘 사장님 상태를 보면…….]
사실인 것 같다는 말은 덧붙이기 전에 벨이 울렸다.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던 손들이 일시에 멈췄다.
“네, 사장님.”
무심한 목소리가 울렸다. 메신저에 참전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밀리안 디모시가 전화를 받았다.
[기획 실장 오라고 해.]
“무슨 일로.”
[거지 같은 보고서를 올렸으니 왜 호출했는지는 기획 실장이 가장 잘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는 바로 기획실에 전화를 걸었다. 클레이 디어의 말과는 달리 기획 실장은 왜 호출을 받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어리둥절하게 알겠다고 답했다.
기획 실장이 올라와 사장실에 들어간 이후, 너무 투명해서 부담스럽던 유리 벽이 까맣게 물들었다. 드디어 블라인드가 내려간 것이다. 처참한 얼굴로 기획 실장이 나가고 뒤를 이어 줄줄이 임원들이 소환됐다. 그들 역시 꺼멓게 죽은 얼굴로 다시 나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비서들은 오전 내내 열심히 쳐대던 메신저조차 하지 않고 숨죽이고 눈치를 살폈다.
어제는 제멋대로 스케줄을 다 캔슬 시켜버리더니 오늘은 폭군처럼 굴었다. 회사의 높은 분들이 줄줄이 깨져나가니 비서들까지 함께 깨진 기분이었다. 무거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 갑자기 사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야?”
“네?”
뜬금없는 사장의 말에 비서들은 눈만 깜박였다.
“누가 오메가를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왔어?”
“……저는 아닌데요.”
“저도.”
웬 오메가? 다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확인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클레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들을 유심히 보며 표정을 살폈다. 분명 오메가의 냄새였다. 그리고 어제도 맡았던 냄새. 그 전날도, 몇 번이나 똑같은 냄새를 맡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 못 맡은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가 되니 착각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계속 자극받은 신경이 기민하게 곤두서서 냄새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비서들을 스치고 지나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밀리안 디모시에게 멈췄다. 저 남자는 분명히 아니다. 오메가를 여기에 데려오기는커녕 여자를 단 한 번도 사귄 적 없을 것 같은 무뚝뚝한 남자가 그럴 리가 없지.
클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분명 지난번에도 스치듯 맡았던 냄새였다. 지금까지 잔향이 남을 정도라면 어제 오메가를 데려와서 섹스했다는 뜻이리라.
평소의 그녀라면 그냥 피식 웃고 말 해프닝 정도로 넘겼겠지만, 하필 제대로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걸린 게 문제였다. 쌓인 페로몬을 섹스가 아닌 약으로 배출하는 것은 불쾌한 감각이었다. 이따위 걸 먹으며 생활하는 인간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때 고요한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밀리안 디모시였다.
“사장님.”
“뭐지?”
“의심이 가시면 CCTV를 검토하시겠습니까?”
“뭐라고?”
“저희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의견입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야.”
특히 너는 완전히 믿지. 클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웃으니 분위기는 조금 완화됐다. 하지만 그 완벽한 신뢰를 받은 밀리안은 썩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괜한 말로 분위기 흐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건방져.”
“죄송합니다.”
밀리안이 뻣뻣하게 사과했다. 진심이 아닌 티가 너무 선명해서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뻣뻣한 게 재미없긴 해도 제 곁에서 가장 오래 버틴 비서다웠다.
예민하게 달궈진 신경이 무뎌지자 계속 거슬렸던 오메가의 향기도 사라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이곳에 남은 것은 신경질적으로 퍼붓던 자신의 페로몬뿐이었다.
정말 착각이었나.
하도 깔짝거리고 은은하게 풍겨와서 피부가 곤두설 정도였다.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그녀를 건드렸다. 근래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에는 페로몬 유화제의 영향도 있지만, 더 크게 작용했던 요인은 정체불명의 오메가의 잔향이었다.
그게 정말 착각이었다고?
클레이는 자신의 주치의와 집사의 조언대로 검진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말이 없자 밀리안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사장님?”
“…….”
“사장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뭐라고 했지?”
클레이가 완벽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밀리안을 바라봤다. 밀리안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그녀의 건강을 재차 물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란 말이지?
클레이는 이 건방진 부하직원을 향해 뭐라 한소리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괜찮. ……아니, 맞아. 안 좋은 것 같아.”
확실히 몸이 이상하긴 한 것 같다. 클레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무래도 처방받은 유화제가 몸에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클레이의 시선이 단정하게 허리를 세우고 자신을 보고 있는 밀리안에게 닿았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비서의 현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남자였다. 다소 과하게 솔직한 입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밀리안. 승진할래?”
“네?”
“비서실장, 되고 싶은 생각 없어?”
“……승진하면 지금과 뭐가 달라집니까?”
“연봉이 많이 오르고, 지금보다 일이 더 많아지겠지.”
지금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 주고 있지만, 절 따라다니기 시작하면 지금의 연봉은 아주 우스울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밀리안은 연봉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 뒤에 말한 일에 더 집중했다.
“일이라면…….”
“내 개인적인 일까지 처리해야 하는 정도? 연봉은 확실히 보장해 준다니까.”
대신 계약 기간이 좀 길겠지.
충동적인 제안이었지만, 제 곁에서 오 년을 견딘 밀리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게다가 건방질 정도로 그녀를 향해 바른말을 해대는 것마저 플러스 요소였다. 대부분은 그녀가 풍기는 알파 기운에 눌려 제대로 입도 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밀리안은 꽤 좋은 인재였다.
클레이는 그가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한 얼굴로 그녀의 제안을 잘라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대체 왜?”
“퇴사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싫어?”
“네.”
얼마나 질색을 하는지 밀리안의 얼굴은 조금 창백하기까지 했다. 나름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칼같이 잘리니 오기가 생긴다.
“한번 체험이라도 해보고 결정하는 게 어때?”
“아뇨. 지금도 벅찹니다.”
“내가 나쁜 고용주던가?”
“솔직히 좋은 고용주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솔직한데?”
“불쾌하시다면.”
“됐어. 고작 그거에 기분 나쁠 리가 없잖아.”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클레이는 저 뻣뻣한 인간의 목을 잡고 탈탈 흔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뭐라고만 하면 그걸 핑계 삼아 사직서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가 완전히 전복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지금 당장 아쉬운 건 자신이니 부하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뭐, 기회가 또 없는 건 아니니까.
클레이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오기를 숨기고 좋은 상사인 척 관대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