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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안 디모시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서 나와 곧장 아버지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밀리안의 발이 유리문 넘어 보이는 광경에 우뚝 멎었다.
인자한 인상의 의사가 휠체어에 앉은 아이를 향해 무릎까지 꿇은 채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아이는 계속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주머니에서 분홍색 포장지로 감싼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처음에는 먹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티던 아이가 입 안으로 쏙 들어온 사탕의 달콤함에 눈을 크게 떴다.
얼굴 가득 눈물과 콧물을 묻히고, 이대로 사탕에 지면 안 된다는 오기 때문인지 계속 씩씩거리면서도 열심히 사탕을 빨았다.
의사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던 부모가 겨우 웃음을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간호사,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도 웃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밀리안 디모시를 빼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친아들인 자신은 차갑게 내치고 타인에게 다정한 아버지는 소름이 끼쳤다. 그럼에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럽고, 또 슬퍼서.
그토록 상처받고도 결코 그에게 애정의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을 상대에게 구차한 미련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바보같이…….
아이의 울음이 완전히 그치자 아이의 부모님이 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하고 휠체어를 끌어 문 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던 의사의 시선이 밀리안에게 닿았다. 그를 보자마자 잠시 굳는 듯하더니 냉정하게 뒤를 돌아 진료실 쪽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모습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시렸다. 상처받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밀리안은 표정을 숨기는 법부터 배우게 되었다. 십여 년을 그렇게 살아와서 이제는 아예 제 얼굴이 되어버린 가면을 유지하는 게 익숙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비참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자동으로 열린 문으로 휠체어를 탄 아이와 부모가 밀리안 디모시를 스쳐 지나갔다. 휠체어를 밀고 있던 여자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이 준 사탕 맛있니?”
“맛없어.”
“그럼 엄마 줄래?”
“싫어! 내 거야!”
“맛없다며? 맛없는 사탕은 엄마가 먹어버려야지!”
“안 줘! 내 거야! 선생님이 나 준 거란 말이야!”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응.”
선생님, 좋아. 상냥해.
아무리 떼를 쓰고 제멋대로 굴어도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어른은 선생님뿐이라며, 힘든 치료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의 부모는 잠시 말이 없더니 정말 그렇다며,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점점 멀어지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밀리안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접수처에 먼저 접수를 하고 의자에서 기다렸다. 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호명이 되어 진료실에 들어가고 병원을 나갔다. 심지어 그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마저 그보다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환자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밀리안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아버지의 진료실로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인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졌다. 그건 아버지와의 심리적인 거리 탓일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냉정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아버지가 앉은 책상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설마 벌써 약이 떨어졌다는 건 아니겠지?”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시선이 닿았다. 아주 짧은 마주침이었는데, 밀리안은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을 맛봤다.
“채혈부터 하자.”
살을 찌르고 들어오는 주사기의 바늘을 통해 피가 점점 빠져나갔다. 투명한 주사기에 붉은 피가 고였다.
밀리안은 채혈을 할 때마다 안도감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오메가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붉은 피인데, 그 역시 사람인데 왜 자신은 사람을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걸까.
이런 생각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채혈이 끝나고 체온과 혈압, 맥을 모두 재고 나서 아버지는 꼼꼼하게 나온 수치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지난번에 지어준 약이 두 달 치였다. 이것도 네 변화에 맞춰 양을 변경한 건데도 고작 한 달밖에 버티지 못했어.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아버지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밀리안은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회사는 그만둬라.”
“싫습니다.”
“그럼?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몸을 하고 계속 다니겠다고?”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말이 꼭 걱정처럼 들렸다. 밀리안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성이 생기고 있어. 속도가 너무 빨라. 곧 약으로 버티지 못하게 될 거다. 그럼 모두가 네가 오메가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겠다는 뜻이냐? 내 얼굴에 먹칠해도 정도가 있지.”
“…….”
“차라리 해외로 나가. 생활비는 줄 테니 되도록 밖에는 나가지 말고…….”
그래. 그럼 그렇지. 걱정했을 리가. 기대한 자신이 우습다.
“선생님. 약, 부탁드립니다.”
“너…….”
“늦었습니다. 퇴근하셔서 집에 돌아가셔야죠.”
가족이 기다리겠습니다.
완벽한 타인처럼, 완전히 그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무심히 말하는 밀리안 디모시를 의사는 평소보다 오래 쳐다봤다.
밀리안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아버지의 혐오를 묵묵히 흘려버리려 노력했다.
* * *
꽉 닫힌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넥타이를 풀러 냈다. 목을 조르듯 꽉 조여진 넥타이가 풀려나가자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바로 옆집의 소음마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오래된 낡은 맨션이었지만, 이곳만이 자신의 안식처였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항상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을 버렸다. 그에게 받은 경멸과 혐오가 옷에까지 덕지덕지 붙은 기분이 들어 다시 입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샤워하고 나와 그는 바로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 한 톨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강박적으로 청소를 하고 나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다시 씻었다. 차가운 물은 수압마저 약했다.
밀리안은 약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한참을 서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지만, 제대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테두리에 금이 간 오래된 거울은 본연의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튕겨냈다. 물기에 젖은 손으로 차가운 거울의 표면을 훑었지만, 여전했다. 딱 자신의 처지와 어울렸다. 이렇게 오래 물을 맞고 있다고 오메가의 본질이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 오래된 의식은 이제 습관이 되어버렸다.
욕실을 나오니 옆집에서 다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깝게 들려, 꼭 같은 집에서 싸우는 것 같다.
잠시 소리가 나는 방향을 가만히 보던 밀리안은 목에 젖은 수건을 두른 채 창가로 향했다. 녹이 슨 창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언제고 망가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태로운 창문은 벌써 오 년째 멀쩡했다. 그조차도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더 좋은 집으로 가려면 갈 수 있었다. 클레이 디어가 주는 연봉은 꽤 센 편이었기에, 비싼 약값과 집값을 대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 낡고 허름하면서도 오래 뿌리박고 버티고 있는 낡은 맨션은 꼭 자신을 닮아서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위성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하늘을 바라봤다. 저 새까만 바다에 빠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라고?
알고 있다. 사실 클레이 디어같은 알파가 있는 사무실에 매일 출근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그 탓에 약을 먹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만둘 수 없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곳이 회사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깎이고 깎인 자존감이 회사에 다니면서 조금이나 올라갔다.
게다가 이 정도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그를 베타로 있게 해줄 수 있는 약은 비쌌다. 아버지에게 약값을 지불하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자신을 내친 아버지에게 신세를 졌던 것은 철이 없었을 때, 머저리처럼 애정을 구걸하며 희망을 놓지 못하던 그때만으로 족하다.
약을 아버지에게서 구하고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금전적인 관계만이라도 철저하게 분리하고 싶은 오기였다.
그 오기 때문에 몸이 더 빨리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그를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끈이라서.
그 끈마저 끊어지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 * *
섹스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여전히 섹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쭉 뻗은 탄탄한 몸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였다면 들끓었을 성욕이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상대가 아무리 제 아래에서 무릎 꿇고 봉사를 해줘도 마찬가지였다. 의미 없는 행위를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한 클레이는 샤워를 하고 나와 불안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디어, 요즘 이상해요.”
“응, 그러게. 그러니 이만 돌아가 줘.”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거든.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살짝 숙인 상체로 인해 탐스러운 가슴이 가운 사이로 출렁이며 도드라졌다. 남자의 시선이 잠시 클레이의 가슴에 머물렀다. 그러다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혹시, 내가 싫어진 건 아니죠?”
남자의 불안은 자신이 클레이 디어의 섹스파트너에서 제외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베푸는 풍족한 지원도, 살짝 가학적이지만 황홀하기까지 한 섹스도 놓치기 싫었다.
물론 클레이 디어의 섹스파트너가 자신 외에도 많다는 걸 알지만 그는 오늘 그녀가 자신만 불렀다는 것에 살짝 기대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박살 나긴 했지만.
미지근한 섹스가 중단되고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계속 초조했다.
아직, 아직은…….
떨리는 물음에 클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관능적인 입술은 그의 기대를 부쉈다.
“당분간 지원은 계속될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디어, 설마 절 잘라내는 거예요?”
“응. 그동안 즐거웠어.”
다정한 연인에서 냉정한 타인으로 돌아간 것처럼 클레이 디어의 미소는 의례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고작 의례적인 미소조차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긴 했지만 남자는 제게 통보된 단절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디어, 저는!”
“미안한데, 나가주지 않겠어?”
“디어…….”
“현명하게 굴어야지.”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완벽한 단절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구질구질하게 굴다가 완벽하게 나락으로 떨어졌던 케이 드렉스의 꼴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텔 룸을 나섰다.
의례적인 미소조차 지을 필요가 없어지자 클레이 디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