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6화 (77/77)

외전 7장 모든 이야기의 시작

그는 마도 제국의 혹스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혹스는 대대로 위대한 마법사를 배출한, 우수한 혈통을 자랑하는 대가문이었다. 타고난 마법적인 능력이 권력의 척도가 되는 세상에서 혹스는 질서를 관장하는 위치에 서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혹스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변종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형편없는 마력을 지녔으며 나이가 들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부모와 형제 모두 일류 마법사의 길을 걷는 중에도 그는 작은 불꽃을 일으키는 마법조차 하지 못하고 뒤떨어졌다.

그의 부모 형제는 모두 그를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부모는 방치했고 형제는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았다. 형제들의 악질적인 장난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도를 넘어서 그는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크게 다쳤다.

며칠의 혼수상태 끝에 깨어난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추방이었다. 형제가 형제를 죽였다는 괜한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은 그의 부모는 다시 같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아예 화근을 치워 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가문의 외진 별장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버림받았으나 차라리 더 평온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가문의 사람들도 거의 찾지 않는 낡은 별장은 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그를 벌레 보듯 하지 않았다.

귀족이라고는 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근방의 마을 수인(獸人)들은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을 지닌 귀족의 등장을 두려워했으나 그가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자 점점 두려움을 잊었다.

그는 비록 마력이 보잘것없어도 지닌 지식은 깊어서 많은 어려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수인들은 귀족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혜로운 귀족 도련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을 쓸 수 없었으나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 그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날이 저물고 해가 뜨는 줄도 모르고 심취해 있곤 했다. 그의 미천한 마력과는 별개로 그의 지식은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만든 진리를 탐구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서 그의 생각은 나무뿌리처럼 갈라지고 뻗어나갔다.

“도련님!”

그는 사나운 외침에 흠칫 깨어났다. 아슬아슬 뭔가를 붙잡을 수 있었는데 정말 아까웠다. 그는 푸짐한 풍채의 중년 여인에게 인상을 썼다.

“마사!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적당히 하셔야 안 하지요. 어제저녁부터 내내 그러고 계시고, 벌써 오늘 해가 중천이에요! 뭘 하시든 밥은 먹어야죠!”

마사는 오히려 빽 소리쳤다.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사를 보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마사는 그를 제대로 먹이는 일에 집착해서 두 끼 이상을 거르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다.

‘안 먹어도 안 죽는다고.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비록 마력은 형편없어도 타고난 혈통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인지 대엿새 정도는 굶어도 끄떡없었다. 그러나 마사는 어릴 때부터 보살핀 도련님을 무척 약하다고 생각해서 열다섯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알았다고. 먹을게.”

그는 투덜거리면서 일어났다. 방해받았지만 마사에게 화낼 수가 없었다. 부모 형제 모두에게 버림받은 그에게 마사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마사가 수인이라서 천하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다.

“도련님은 왜 안 오시는 거야.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구먼.”

마사는 투덜거리면서 도련님 찾기에 나섰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도련님의 나쁜 버릇은 도통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너 살 아이처럼 쫓아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해야 겨우 한 끼를 먹일 수 있으니. 마사는 도련님을 제대로 먹이는 일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마사는 도련님이 있음직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도련님이 자주 찾는 곳은 거의 몇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자신의 서재, 날이 따듯한 시기에는 뒤뜰을 빙빙 돌며 걷거나 가끔은 좀 멀리까지 나가서 별장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의 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방에도 없고 뜰에도 없으니까 마지막 한 군데만 남았다. 언덕을 오르는 중에 마침 지나가던 마을 사람과 마주쳤다.

“도련님은 저 위에 앉아 계시던데.”

마사가 누구를 찾는지 알아서 바로 도련님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마사는 걸음을 더 서둘러서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기대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도련님을 발견했다. 자는 중은 아닐 것이다. 도련님은 항상 저런 자세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도련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큰소리로 불러 생각을 깨우려던 마사는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발견한 도련님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멈추어 섰다. 무슨 좋은 일을 떠올리는지 도련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도련님의 즐거운 기분을 방해하기가 미안해서 마사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약간의 심술을 섞어 풀썩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는데도 도련님은 듣지 못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하긴,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불러야 겨우 들은 척하는 도련님이 이런 소리 정도를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많이 자라셨구나.’

마사는 새삼스럽게 다 자란 도련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벌써 열여덟 살이 된 도련님의 얼굴에 어린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수인이라고 불리는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들 중에는 찾을 수 없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사는 도련님의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리고 도련님이 그 무서운 귀족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다. 도련님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선량한 분이었다.

‘가여운 분.’

마사는 제 자식이자 형제를 미련 없이 버리는 귀족의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약하면 더 마음이 쓰이고 감싸고 싶은 마음이 부모로서 마땅한 마음이 아닌가.

‘그래도 참 잘 자라셨지.’

마사는 헌칠하게 잘 자라신 도련님을 볼 때마다 흡족했다. 분수를 모르는 마을 처녀들이 도련님을 곁눈질하고 있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이런 촌구석의 철모르는 계집애들이 넘볼 분이 아니었다. 도련님은 아주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아들딸 쑥쑥 낳고 행복해지셔야 한다.

도련님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사의 얼굴에 점점 지루함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배도 고팠다. 결국, 마사는 참지 못하고 도련님을 불렀다.

“도련님.”

한두 번 불러서는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마사는 빽 소리쳤다.

“도련님!”

그는 흠칫 깨어나듯 눈을 떴다.

“마사. 벌써 점심이야?”

“벌써라뇨. 때가 지난 지가 한참이라고요. 도련님을 기다리느라 제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아세요?”

“먼저 먹으라니까.”

“밥을 혼자 무슨 재미로 먹어요.”

“…밥을 재미로 먹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한마디 하면 두세 마디로 대꾸하는 마사의 잔소리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저 무조건 알았다고 대답하는 편이 이롭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진리의 공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한하게 확장했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지식을 쌓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었으며 선각자들이 추구한 진리로 채우고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어딘가를 탐구했다.

자려고 누웠다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침대에 앉아서 그는 사색에 빠져들었다. 날이 저물고 해가 떠오르는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둥둥 떠있는 기분으로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그가 탄식하며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황금색의 빛이 일렁거렸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의 주변으로 희미하게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가 신기해서 그는 유심히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뒤집었다 하면서 살폈다. 손에서 나오던 빛이 점점 그의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빛의 기운이 점점 강하게 뿜어져 나와 마치 그를 삼키듯 감싸 안았다.

펑! 실제로 소음이 나지는 않았으나 그는 터지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황금빛의 기둥이 천장을 뚫고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위대한 대마법사의 각성이었다.

눈을 뜨자 낯선 사람들이 그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에 모여있었다.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부스스 일어나는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일어났구나. 기분은 어떠니?”

그는 인상을 쓰며 낯익지만 낯선 여자가 누군지 고민했다. 그가 대꾸조차 없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여인이 무안한 듯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인사해 주지 않는 거니?”

어머니? 그는 겨우 기억해 냈다. 이 여자가 내 어머니였나?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내 배로 저런 쓸모없는 것을 낳았다니,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보며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이제 막 일어난 아이를 너무 재촉하지 마시오.”

곁에서 말을 보태는 남자의 정체는 어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 덕분에 빠르게 기억났다. 아버지였다. 그를 보며 쯧, 차갑게 혀를 차기만 했던 아버지가 대단히 걱정해 주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너같이 마력이 뒤늦게 발현하는 선례가 없었단다. 모두 네 빛의 기둥을 봤지. 정말 아름다웠어. 아들아. 정말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아. 그는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제 손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세상 전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기운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쓸모없어서 버려진 자식은 진흙에 덮인 찬란한 보석이었다. 그를 가두었던 틀을 벗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들은 버린 자식을 찾으러 왔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을 흐뭇하게 보던 부모는 그의 웃음소리에 담긴 광기를 눈치채고 서서히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심각하게 시선을 주고받을 즈음에야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여기는 어디, 아니, 마사는 어디 있습니까?”

마사? 그게 누구? 아무도 그가 누구를 찾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이미 까맣게 잊은 사실이지만, 마사는 수인이었다. ‘짐승’이라는 뜻을 담은 명칭이 붙은 천한 것. 아마 수인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저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쩐지 불안했다.

“내 시중을 들던 수인 말입니다. 나이 든 여자.”

“너는 더는 수인의 시중을 받지 않아도 된다.”

“아무렴. 천한 것들을 주변에 둘 수 없지.”

“마사는! 어디 있느냐고!”

“널 데려가지 못한다고 감히 앞을 막아서던 천한 것을 말하는 거라면 합당한 벌을 받았다.”

대답은 어떤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그 남자를 기억했다. 그의 형, 어릴 때 그를 악독하게 괴롭혀서 죽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당사자였다. 남자는 삐딱하게 입술 끝을 올리며 이죽거렸다.

“그런 천한 것과 함께 살아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구나. 버릇없이 부모님께 언성을 높이다니.”

“합당한 벌이라면. …죽였다는 뜻입니까?”

남자는 인상을 썼다.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죽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벌을 내렸을 뿐이다. 수인은 원래 형편없이 약하지.”

머릿속에서 뭔가가 탁,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뜨거운 분노를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뜬 그의 눈동자에 황금색의 빛이 일렁거렸다.

몸속에서 거대한 힘이 끓어 넘치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경악으로 얼룩지는 모습을 무심히 보면서 그는 자신의 온전한 힘을 모두 해방했다.

“가문의 이름, 혹스를 박탈하고 영구추방을 명한다.”

부모와 형제를 포함한 십여 명 가까운 사람을 죽인 그에게 가장 중한 형벌이 내려졌다.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혼자의 몸으로 황량한 땅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가혹한 벌이었다.

그의 목에는 구속구가 매달렸다. 벌을 받는 기간에는 절대 벗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는 죄질이 무거워 평생형을 받았으므로 평생 벗을 수 없고, 더불어 구속구에는 영구추방 마법이 추가되었다. 이 구속구를 차고 있는 죄인은 마도 제국의 힘이 미치는 국경에 촘촘하게 깔린 결계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처벌을 받아들였다. 죄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태어나고 자란 가문과 나라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단지 타고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이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수인, 신을 자처하며 어떤 중한 죄를 지어도 절대 목숨을 거두는 벌은 내리지 않는, 자기들에게만 무한하게 관대한 제국인들.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리 강대한 마력을 지녔어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시중을 받는 제국인은 추방형을 받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마도 제국의 국경 밖은 짐승만 살아가는 거친 황무지였다.

그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려서부터 수인과 어울리며 얻어들은 지식은 그의 생존을 도와주었다. 그는 먹을 수 있는 몇 가지의 잡풀을 구별할 줄 알았고, 쥐덫을 만들어서 들쥐를 잡아 식량으로 삼았다.

그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걸으면서 끊임없이 사색하고 탐구했다. 비바람에 노출된 그의 피부는 거칠어지고 몸은 말랐으나 그의 눈빛은 더 깊어졌다.

그는 우연히 다 무너져가는 건축물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돌로 만든 신전이었다. 그는 이곳을 거처로 삼기로 했다. 튼튼히 지어졌는지 제법 기본 구조가 남아있었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 모양의 구속구는 그의 능력을 제약하는 물건은 아니라서 날이 갈수록 그의 마력은 강대해졌다. 그는 마법을 이용해 돌로 만든 인형을 부려 신전을 저택으로 개조했다. 그가 만든 인형은 점점 더 세밀한 명령을 받아 행할 수 있게 되어 청소하고 요리하는 등의 기본적인 시중을 들었다.

최소한의 생존 문제를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자 그는 모든 시간을 마법 연구에 쏟았다. 책이나 실험재료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이미 무한한 지식은 그의 머릿속에 있었고, 주변의 모든 것은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모르고 세상을 등져 살아가다가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쩌다 무심히 확인한 제 얼굴이 고작 스물 중반 정도로 아주 젊었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으나 지나간 세월이 10년은 훌쩍 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세월이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의 흐름마저 그의 왕성한 학구열을 방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벽을 깨뜨렸다. 새로운 엄청난 힘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곳은 새하얀, 혹은 새카만 공간이었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게 멀리 뻗은 황금색의 길 위에 서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 길을 거닐며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많은 시간의 파편들을 보았다. 며칠, 몇 달, 수십 년의 시간이 그의 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엄청나게 광대한 사건들이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그는 마도 제국이 사라지고 세상의 마력이 흩어지는 미래를 보았다. 제국인이 그토록 천시하던 수인에게 모두 짓밟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수인이 세운 나라가 세상을 지배하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목에 걸린 구속구는 이제 더는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면 벗을 수 있고, 언제든 제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은둔자의 삶을 자처했다.

삶에 미련은 없었으나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진리의 끝을 보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말의 날을 대비했다. 저택을 둘러싼 일정 부근에 결계를 쳐서 마력을 모았다. 결계가 공기 중에서 빨아들인 힘은 먼 훗날 세상의 마력이 흩어져도 오랜 기간 저택과 그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 * *

그는 이른 아침의 목욕을 즐겨 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욕조 가득한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결계를 건드린 침입자의 흔적을 감지한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쯧, 짧게 혀를 찼다. 겁 모르는 맹랑한 계집아이가 틀림없었다.

어느 날, 외부의 침입을 철저히 가로막는 결계를 뚫고 어린 계집아이가 그의 저택까지 들어왔다. 결계가 그 아이에게만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내려고 무던히 애썼으나 촘촘한 막 어딘가의 미세한 구멍과 같은 변수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계집아이였다. 딱히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라서 내버려 두었더니 그 후로 마지 제집처럼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느긋하게 목욕을 마저 마치고 나왔다. 식당에서 발발거리며 움직이는 기운이 그의 감각에 잡혔다. 그는 옷을 차려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카이르 님!”

활짝 미소 짓는 여자를 보며 그는 멈칫했다.

“아직 아침 안 드셨지요? 제가 몇 가지 드실 만한 요리를 가져왔어요.”

재잘거리는 여자를 그는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꼬마 계집애가 언제 이렇게 컸지?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화사한 색깔의 고운 옷을 차려입은 꼬마는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었다.

에반제린은 그가 우두커니 서서 말없이 보기만 하자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화나셨어요? 제가 멋대로 여기저기 건드려서……?”

카이르는 에반제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흥, 코웃음을 쳤다.

“하루 이틀 일이냐.”

그가 식사를 차려둔 자리에 앉아서 포크를 집어 들자 에반제린은 헤헤 웃으며 얼른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빈 잔에 물을 따르며 식사 시중을 자처했다.

“내 것뿐이냐? 꼬마 너는?”

“저는 먹었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저 꼬마 아니에요. 저도 이름이 있단 말이에요. 에반제린.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가 대꾸도 없이 식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뚱하게 보던 에반제린은 황홀함이 담긴 뿌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저 혼인해요.”

카이르는 불쑥 한마디 던져놓고 입을 꼭 다문 에반제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말괄량이 계집아이가 뛰는 대신 걷기 시작하고 크게 웃는 대신 입을 살짝 가리며 미소 짓던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남편 될 사람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저는 집을 떠나 시집으로 가서 살아야 한대요. 여기서 아주 멀대요.”

“…그래.”

“저는 다시는 카이르 님을 만나러 오지 못할 거예요.”

“…그렇군.”

애원하듯 바라보는 에반제린의 호박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저 여기서 살까요?”

“…….”

“저 제법 쓸 만해요. 요리도 곧잘 하고 빨래건 청소건 다 잘할 수 있어요. 제가 여기 있으면 카이르 님은 손가락도 까딱하실 필요가 없을 거예요. 아니지. 절 부를 때는 최소한 손짓을 하셔야겠네요.”

카이르는 꼬마가 언제부턴가 여자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알았지만, 모르는 척해왔다. 아는 척해서 되돌려줄 수 없는 마음이니까. 솔직한 속내를 말하자면, 에반제린의 비밀스러운 마음을 알고 있다고 드러내면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잘라내야 할 테고 그러면 다시는 오지 않을까 봐, 그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꼬마.”

카이르가 난감한 한숨을 내쉬자 에반제린은 오히려 생긋 웃었다.

“이상한 말을 해서 놀라셨죠? 다시는 못 뵐 생각하니까 서운해서요.”

“…….”

에반제린은 몸을 휙 돌려 뛸 듯이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잠시 서있다가 말했다.

“아세요? 한 번도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시지 않았어요.”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마치 울음을 꾹 참는 것처럼. 카이르는 항상 자신을 보며 웃기만 했던 꼬마가 울음을 참는 얼굴이 어떤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에반제린은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카이르는 가슴이 허전해서 굳게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보고 서있었다. 금방이라도 저 문이 다시 열리고 에반제린이 ‘카이르 님.’ 하고 부르며 발랄하게 뛰어들어 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에반제린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몹시 지치고 야윈 행색으로, 산달이 가까워진 부른 배를 안고.

“죄송해요. 카이르 님. 여기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그러나 에반제린은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고 웃었다.

자신의 딸을 정략 결혼시켜서 권력의 기반으로 삼은 에반제린의 친부는 군사를 이끌고 사돈의 가문을 풍비박산 냈다. 비정한 아비는 딸의 안위도, 딸의 배 속에서 자라는 어린 생명도 상관하지 않았다. 에반제린의 친부에게 딸자식은 정쟁으로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에반제린은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에반제린이 홑몸이기만 해도 그녀의 아비는 그래도 자식이니까 살려는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밴 딸은 분란의 씨앗일 뿐이었다. 아주 집요한 추적자가 에반제린의 뒤를 쫓았다.

충성스럽게 그녀를 보호하던 호위를 하나씩 희생해 가며 에반제린은 죽음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살기 위해서 도망치면서도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자 하는지 그저 허망했다. 죽음을 떠올리자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최종 목적지를 결정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마귀의 숲이라고 불렀다. 들어갔다가 살아 나오는 사람이 없는 그곳을 오직 에반제린만 드나들 수 있었다.

에반제린은 다시 만난 그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와 배 속의 아기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당신을 찾아왔노라고, 뻔뻔한 핑계를 댔다. 차라리 그가 차갑게 돌아서서 외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에반제린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에반제린은 카이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대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차마 꺼내지 못하는 속마음은 꽁꽁 감추었다. 다른 사내의 애를 낳은 주제에 그런 뻔뻔한 고백은 할 수 없었다. 그에게 기대어 사는 상황만으로도 갚지 못할 빚을 지고 있었다.

“바덴.”

카이르는 아득히 먼 과거, 세상이 뒤바뀌기 이전에 역사서에 등장했던 위대한 군주의 이름을 아기에게 주었다. 그리고 바덴의 대부가 되었다.

아이는 쑥쑥 자랐다. 앉고 기고 서더니 곧 뛰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글을 배웠다. 카이르는 아이에게 자신이 지닌 지식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영민한 아이는 카이르의 가르침을 흡수하며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났다.

아이가 열여섯 살의 생일이 될 무렵에, 시집 가문의 사람들이 에반제린을 찾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마귀의 숲까지 찾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시아버지는 살아있었다. 목숨을 부지했지만,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서 제대로 운신하지 못했다. 시아버지는 죽은 아들의 유일한 혈육을 찾고 있었다.

마귀의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결계에 막혀 끝없이 헤매다가 탈진해 쓰러져서 굶어 죽었다. 카이르는 대개 멋대로 들어온 자들이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지만, 그들이 에반제린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결계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아아! 마님. 무사하셨군요. 도련님이 이렇게 장성하시다니!”

주군의 명을 받아서 마님과 도련님을 찾아다닌 가신들은 바덴을 보며 감격했다. 이제 막 소년기를 벗어나는 바덴은 죽은 친부는 물론이고 조부를 빼닮아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마님, 저희와 가시지요. 고생하며 도련님을 이렇게 키우신 노고를 보답받으셔야지요. 도련님은 장차 주군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 대가문의 주인이 되실 겁니다.”

에반제린은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말을 건네면서 속으로는 웃을 수 없었다. 왜 이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셨나요. 그를 잠시 원망하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낯짝도 두껍지. 정말 넌 염치도 없구나.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께 의탁해서 살았니. 언제까지 그분께 폐를 끼칠 거야.’

카이르는 에반제린의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찾아 헤매며 며칠 동안 저택을 샅샅이 뒤지다가 지친 에반제린은 아무도 없는 빈 허공에 대고 외쳤다.

“떠날게요. 카이르 님. 마지막 인사는 하게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카이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이르는 사람들과 떠나는 에반제린과 바덴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 우려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잡고 놓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시간이 달라, 에반제린.’

다른 흐름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수백 년을 살아도 멈춘 시간 속에서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 테지만, 그녀는 늙어서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카이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너무 끔찍했다. 도무지 그녀의 죽음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어머니.”

침대에 기대앉아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에반제린이 고개를 돌렸다. 아들 부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 들어왔니?”

“무슨 생각을 하시느라고 들어오는 줄도 모르십니까?”

“원래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단다. 바쁠 텐데 아침 인사는 굳이 올 필요 없다.”

“아닙니다. 집에 있을 때라도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리고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어머니.”

바덴은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저택이 매물로 나와서 구매했다. 어머니의 친정 가문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어머니가 가끔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느꼈다. 어머니를 위한 선물로 마련했다.

“그 집을……?”

창백한 어머니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바덴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기뻐했다.

“예. 많이 낡아서 수리를 맡겼습니다. 수리를 마치면 가 보시겠습니까?”

“그래, 그러자꾸나.”

어머니의 방을 나오며 바덴은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고향으로 가시면 우리도 당분간 따라가서 살았으면 하오.”

“예. 준비하겠습니다.”

바덴은 어렴풋이 어머니가 단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대부.’

어머니는 계속 그분을 그리워하고 계셨다. 어릴 때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가끔 어머니가 먼 곳을 응시하며 아련한 눈을 하실 때가 있었다. 그 시선 너머에 계신 분이 누구일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카이르는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는 원래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한한 세계가 창조되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근래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늘었다. 에반제린과 바덴을 떠나보낸 이후부터였다.

그가 갑자기 움찔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결계를 건드린 침입자의 기척이 익숙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달려 나갔다.

“대부.”

어린 청년은 장성한 사내가 되었다. 에반제린의 피를 이어받은 바덴도 제 어머니처럼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카이르는 바덴과 바덴이 안아 들고 있는 가녀린 체구의 여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여전하시군요.”

“…바덴.”

“어머니를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카이르는 바덴의 품에 안긴 여인, 에반제린을 응시했다. 나이가 들어서 겉모습이 달라졌으나 단번에 알아보았다.

“깊이 잠드셨습니다. 아마 깨시면 노여워하실 겁니다. 어머니의 뜻을 여쭙지 않고 제가 멋대로 모시고 왔으니까요.”

“…돌아가라.”

“어머니께서 오래 못 사십니다.”

몸을 돌리려던 카이르는 움찔, 그대로 굳었다.

“어머니께서는 중독되셨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이미 손쓸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드신 독은 특이한 성분을 지녀서 독이 발작하면 하루가 넘도록 깊은 잠이 드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다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

“며칠 전에 독이 발작해서 이틀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의사는 한 번만 더 독이 발작하면 마지막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대부.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덴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서있는 대부의 무심한 표정이 무척 비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화내시겠지.’

가녀린 체구를 지닌 어머니의 기백을 당해내지 못하고 덩치 큰 사내들도 절절맸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가문을 일으킨 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마 이런 결정을 멋대로 내린 괘씸한 아들의 뺨을 주저 없이 후려칠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 저는 맞을까 봐 무서워 도망가는 겁니다.’

바덴은 제 결정이 진짜 어머니를 위하는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대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계셨으나 만나기를 오래전에 포기하셨다. 중독되어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후에는 완전히 포기하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대부, 두 분께 잔인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덴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러지 않으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차에 몰래 수면제를 탔다. 어머니께 해가 되지 않도록 의사의 조언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양을 조절했다.

바덴은 어머니를 대부의 팔에 안겨드렸다. 억지에 가까웠으나 대부는 뿌리치지 않고 몹시 소중한 보물처럼 어머니를 받아 안았다.

아마 마지막이 될 두 분 생전의 모습을 눈에 담고 돌아섰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아 부축했다. 그의 가슴에 기대어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는 수프를 받아먹다가 에반제린은 빙긋 웃었다. 그의 시중에 익숙해진 자신이 놀라웠다.

“카이르 님.”

“왜?”

“…….”

“꼬마. 불렀으면 말을 해.”

에반제린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나이 든 여자를 여전히 꼬마라고 불렀다.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는 그의 태도 때문인지 에반제린은 자기도 모르게 어릴 적의 말투를 하고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꼿꼿한 주인마님은 여기 없었다.

“아주 옛날에. 제가 아프다고 했으면 절 조금이라도 봐 주셨을까요?”

“…….”

“죄송해요. 쓸데없는 말이었어요.”

“…어쩔 수 없었겠지. 환자를 버려둘 수는 없잖아.”

에반제린은 무안한 듯 시선을 피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변함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의 젊고 아름다운 청년 그대로였다. 어둠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새카만 눈동자를 지닌 신비로운 이 사내는 어린 소녀의 풋사랑이었고, 사랑에 눈뜬 처녀의 설렘이었으며 인생을 배운 여인의 가슴을 저미는 고통이었다.

에반제린은 주름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젊고 건강한 어린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들떠 있다가도 나이를 보여주는 손을 보면 착각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에게 늙어서 볼품없어진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멋대로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놓은 아들에 대한 분노도, 오랜만에 마주한 그를 보며 샘솟는 원망도 고작 하루를 채 가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행복해서 하루하루가 꿈 같았다.

“제가 바보였네요. 아프다고, 곧 죽는다고 카이르 님 앞에 드러누울 걸.”

“꾀병은 안 통해.”

“제가 얼마나 꾀병을 잘 부리는데요. 분명히 알아채지 못하셨을 거예요.”

“지금도 꾀병이야?”

“글쎄요. 어떤 것 같아요?”

카이르는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가볍게 쓸며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어.”

“네?”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그가 수프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을 돌리자 에반제린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오렌지 주스요. 아주 달콤한.”

“…아주 시큼한 오렌지는 있는데.”

에반제린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시큼한 오렌지 주스요.”

그는 에반제린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일어났다. 에반제린은 그의 체온이 갑자기 멀어지자 아쉬워서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뒷모습이 안타까워서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더 필요한 것이 있어?”

“…너무 신 주스는 싫어요.”

괜한 투정이었는데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그럼 꿀을 넣을게.’라고 대답했다. 그의 다정한 배려가 믿기지 않아서 에반제린은 그가 나간 후에 혼자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그가 그녀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셈치고, 옛날에 인연이 닿은 어린 계집애를 대하듯 그렇게 동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동정이라도 좋았다. 그가 외면하지 않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사랑해요…….”

항상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말이지만, 절대 그에게는 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어릴 때는 거절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고,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진 채 그와 재회했을 때는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다 늙어 죽어가는 처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가 가지고 올 오렌지 주스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그녀는 탄식처럼 크게 한숨을 쉬었다. 노곤하게 잠이 밀려왔다. 이 나른한 느낌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알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에 아들의 후견인으로서 가문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그녀를 향한 탐욕의 손은 끝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던가. 결국, 아마 마지막이었을 검은 손을 피하지 못했다.

‘언제 다시 독이 발작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수면초의 독이 발작하면 그게 마지막 잠이 되실 겁니다.’

의사가 내리는 사망 선고를 그녀는 담담하게 들었다. 의사를 붙들고 소리치는 아들을 보면서 에반제린은 오히려 편안했다. 허한 가슴을 끌어안고 사는 삶은 항상 채워지지 못하고 공허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독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철갑을 두른 듯 살아야 하는 삶도 이제는 지쳤다.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울 만큼 삶에 미련이 없었다.

운명의 신은 어찌 이렇게 잔혹한지. 왜 그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을까. 왜 살고 싶다는 미련을 갖게 하였나.

‘카이르 님…….’

죽음이 다가오고서야 에반제린은 죽음이 얼마나 인간에게 커다란 축복인지 깨달았다. 앞으로 더 얼마나 오래 영원의 시간을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가 왜 그렇게 그녀를 밀어내려 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세상에 혼자인 당신을 다시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끝까지 이기적인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요. 저는 당신의 곁에서 눈을 감아서……. 이렇게 행복한데…….’

에반제린은 달콤한 독처럼 다가오는 깊은 잠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카이르는 직접 오렌지를 짜서 만든 주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살짝 맛을 봤는데 꿀을 넣지 않아도 새콤달콤한 맛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주스를 침대 머리맡 협탁에 내려놓고 이불을 잘 덮어주려고 이불 밖으로 나온 팔을 들어 올렸다. 가녀린 팔이 이상하게 무거워서 그의 가슴이 섬뜩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가만히 서있다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창백한 낯빛으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에반제린.”

처음으로 불러준 이름에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 손목의 맥을 짚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잠시 후 그의 몸이 무릎을 꿇으며 침대 아래로 무너졌다.

“헉…….”

심장을 잡아 비트는 통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거칠게 호흡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까만 그의 동공에 맑은 물이 차올라 툭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까만 눈동자 속에서 금빛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눈에서 시작한 금색의 기운이 곧 그의 혈관을 타고 심장을 지나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가더니 그의 온몸에 금색의 빛이 뒤덮여 넘실거렸다.

파삭!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를 잃고 나서야 자신의 진심을 깨달았다. 마사를 잃은 고통으로 얼어붙은 그의 심장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자 녹아버렸다. 어쩌면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심장은 서서히 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새하얀, 혹은 새카만 공간에 서있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딱 한 번 이후에는 다시는 그를 초대하지 않았던 이곳이 그를 다시 불렀다.

그는 황금색의 길을 따라 거닐었다. 그의 옆으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무수한 사건과 사람이 얽힌 시간 속에서 그는 어떤 여자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그 여자는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왜 이 여자가 내 펜던트를 가지고 있을까. 그는 여자의 시간을 따라가 보았다. 여자의 인생에 등장한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바덴을 닮았다. 노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웃으면서 울었다.

‘아가. 어찌 이렇게 네 할머니를 닮았니.’

금발에 노란 눈동자의 갓난아기는 에반제린을 닮았다.

‘이름을 지어달라는 과분한 청을 받고 생각을 해봤다. 우리 바덴 가문의 초대 가주께서는 모친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모든 존경과 애정을 모친께 바친다고 유언을 남기셨지. 체구가 작은 분이 기개가 대단하셨다고 들었다. 그 이름을 아기에게 주고 싶구나.’

에반제린

아기의 이름을 들으면서 카이르는 번쩍 눈을 떴다. 금빛의 기운이 그의 주변을 휘감아 돌아가 마치 빨려 들어가듯 펜던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들도 모두 사라졌다.

카이르는 격동하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한참을 숨만 몰아쉬었다. 감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신을 믿지 않고 조롱한 그가 신은 괘씸했던 것일까, 혹은 그의 같잖은 오만함이 가련하여 자비를 베푼 것일까. 그는 기적을 보았고, 운명을 보았다. 그녀를 닮은 그녀의 후손이 아득하게 먼 훗날로 이어지는 황홀한 미래를 읽었다.

카이르는 일어나서 마치 장엄한 의식을 치르듯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몸에서 떼놓은 적이 없는 펜던트를 풀었다. 애초에는 그를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구속구였으나 그가 새로운 힘을 얻으며 마력의 핵으로 기능했던 펜던트는 그의 생명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짝 손가락을 흔들자 공기의 흐름이 바람을 만들고 바람은 칼날이 되어서 그녀의 손끝을 살짝 베고 지나갔다. 살갗에 맺히는 붉은 핏방울이 펜던트에 똑 떨어졌다.

“너의 피가 봉인이자 열쇠가 될 것이다.”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펜던트는 마치 생물처럼 부르르 떨더니 희미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움직임이 멈추고 모든 빛은 사라졌다. 매우 낡고 평범한 거무튀튀한 펜던트가 되었다.

“대부!”

마귀의 숲을 감싸고 있는 꺼림칙한 기운이 사라진 것 같다고, 근처를 지키고 있는 수하의 전언을 듣자마자 바덴은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벌컥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움찔 놀랐다.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덴이 알고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대부는 바덴이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늙지 않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그런 대부의 젊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대부는 이제 청년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확연히 나이가 든 중년의 남자였다.

“바덴.”

“저… 정말 대부…이십니까?”

“네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해라.”

“예? 어머니……? 어머니!”

바덴은 침대로 달려가 엎어져 오열했다. 카이르는 일어나 살짝 비켜서 아들이 어머니와 충분히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카이르는 어머니의 묘를 이곳에 만들겠다는 바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모셔가거라. 이곳에 네 어머니의 묘를 두었다가는 곧 누구도 살피지 못하고 버려질 테니까.”

“대부께서…….”

“봐서 알겠지만, 내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월을 비켜 젊음을 유지한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대부는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다. 오전에 봤을 때에는 나이 지긋한 중년인이었는데 몇 시간 만에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아니. 내 무덤 자리는 이곳이다.”

“그러면 제가 여기서…….”

“가거라.”

“대부.”

카이르는 펜던트를 바덴의 손에 건넸다.

“네 어머니의 영혼이 담긴 물건이다. 언제고 네 후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바덴은 아주 소중히 펜던트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대부는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히 신비한 능력을 갖춘 기인이었다. 대부가 주는 선물이라면 범상한 물건일 리가 없었다.

“네게 청이 있구나.”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내 존재에 관해서 후대에 말을 남기지 마라. 나는 어디에도 존재했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예.”

“오늘이 너와 내가 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다시는 오지 마라.”

“대부. 대부는 제게 스승이자 아버지셨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버리는 불효는 할 수 없습니다.”

“내 마지막 청이다. 내 끝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구나.”

“대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는 바덴의 표정에서 카이르는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는 이제 인정했다. 에반제린과 바덴은 건조하게 말라붙은 그의 인생에 찾아든 기적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자신은 그저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것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일한 진리였다.

그는 바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나도. 네가 내 아들이기를 바랐다. 바덴.”

바덴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바덴은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시신을 어서 수습해야 하므로 대부의 저택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약 열흘쯤 지나서 대부의 저택에 갔을 때는 거대한 저택이 다 무너져 모래가 되어있고 대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서 바덴은 무너진 잔해를 보며 하루를 꼬박 앉아있었다.

격동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수백 개로 갈라진 세력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혀 먹히며 점점 크게 뭉쳐 나라를 세웠다. 바덴은 제논의 건국 공신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았다. 바덴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가문을 새로 열었다. 바덴 가문의 시작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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