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5화 (76/77)

외전 6장 또 다른 미래 ― 데미안

“널 공작가 후계로 선언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했다. 나머지는 네가 할 탓이다. 졸업만 해. 그럼 이 자리는 네 거다.”

여섯 살의 데미안은 아버지의 약속만 믿고 학술원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단기 목표인 졸업을 향해서 맹렬하게 달려갔다. 주변의 무엇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기 위해서.

데미안이 열세 살이 되던 해에 타란 공작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특별한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한 데미안은 그저 기억만 해두었다. 몇 개월 후에 데미안이 혼적에 등록되었다는 짤막한 소식과 공작부인이 된 새어머니의 초상화를 받았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그림 속의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작 전하의 눈이 생각보다 낮구나.’

데미안의 기준으로는 절대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여자였다.

‘어머니…인가.’

혼적에 올랐으니 공작부인은 이제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공작부인을 직접 만나더라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공작부인도 그런 호칭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아직 자식도 낳지 않은 공작부인의 혼적이 천한 사생아 따위에게 더럽혀지다니. 공작부인이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고 있을지 눈에 보였다.

새 가족이 생겼으나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학술원을 졸업한 후에야 만날 사람이었다. 만난다 해도 공작부인이 데미안을 해코지하지 않고 그저 무시만 해주어도 다행이었다. 데미안은 공작의 결혼에 대해 더 깊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데미안은 오직 공부만 들이 팠다. 언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평소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어릴 때는 괜히 건드리던 녀석들도 제법 나이가 들자 뛰어난 성적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데미안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언제나 혼자였다. 성적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혼자여도 외로움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둘러싼 고독의 벽이 높아지고 두꺼워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본디 잘 웃지 않았던 소년은 점점 웃음을 짓는 방법조차도 잊어버렸다.

드디어 모든 학업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손에 쥐었을 때, 데미안은 성취감보다 허무함을 느꼈다. 10년 넘도록 매달린 결과는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졸업하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생각은 헛된 기대였다.

‘난… 뭘 위해서 공작이 되고 싶었을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던 소년은 청년이 되어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어.’

잘하는구나, 칭찬받고 싶었다. 그러나 여섯 살의 데미안을 학술원에 보낸 아버지는 졸업하는 날까지 짧은 서신 몇 줄조차도 보내지 않았다.

‘내가 아니어도 되었던 거야.’

공작이 데미안을 후계로 택한 이유는 데미안이라서가 아니라 데미안이 그저 유일한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소공자라는 자리는 데미안이 아니라 공작부인이 언젠가 낳을 아들이 가져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열일곱 살의 겨울에 데미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휘두르는 칼날이 탁, 하는 둔탁한 소음을 내며 하나의 생명을 거뒀다. 얼굴로 튀는 핏방울이 유난히 뜨겁다고 생각하면서 데미안은 공중으로 날아가는 목을 응시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니다. 야만족을 섬멸할 때는 그런 마음가짐을 하라고 배웠다.

“이곳은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도련님.”

“수고했다.”

잡다한 뒤처리를 맡을 기사의 수고를 격려하며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넓게 눈으로 담았다. 신체 일부분이 없는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시신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장작을 쌓아서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스무 살이 될 무렵부터 야만족 토벌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그때부터 로암에서 머물렀다. 왕의 최측근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공작은 수도를 떠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부자는 각자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잠깐.”

데미안이 두 구의 시체를 옮기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보기에도 제법 체격의 차이가 큰 두 명의 시체가 어쩐지 신경 쓰였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본 두 구의 시체는 체격뿐만이 아니라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중년 남자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음 직한 어린 청년이었다. 그리고 매우 닮은 얼굴 생김새가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서로 지키다가 죽은 그들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핏자국과 섞여 말라붙어 있었다.

“도련님. 따로 명하실 일이라도?”

데미안이 말없이 한참 시체를 보며 서있자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다. 뒤를 맡기겠다. 나는 먼저 돌아가지.”

돌아서서 성큼성큼 매어둔 말을 향해 걷는 데미안의 뒤를 기사가 황급히 뒤쫓았다.

“도련님. 따로 움직이면 위험하십니다. 여긴 야만족의 땅 한복판이라 자칫…….”

“근방에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사의 만류에도 데미안은 말 위에 훌쩍 올랐다.

“구역질이 나. 오늘따라 피비린내가 역해.”

데미안은 그대로 말고삐를 쥐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순식간에 저만치 달려가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보다가 기사는 재빠르게 근처의 기사를 한 명 더 불러서 도련님의 뒤를 따랐다.

기사 둘과 한참을 달리다가 데미안은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속도를 늦추다가 멈추었다. 기사들도 덩달아 말을 세우고 데미안 곁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포위됐군.”

“예?”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았다. 주변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타고난 예민한 감각 덕분에 데미안은 넓게 주변을 좁혀 모여드는 무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리 떼가 사냥감 몰이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자들의 억눌린 살기가 공기의 흐름으로 느껴졌다.

‘수십……. 아니, 더 되려나?’

이쪽의 전력은 고작 세 명.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라고 해도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그다지 길지 않은 일생의 끝을 예감하는 데미안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이 다가오면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다고 들었는데. 데미안은 한참 하늘을 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데미안 타란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를 받은 타란 공작이 로암으로 달려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아들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소공자의 장례를 마친 타란 공작은 가문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야만족 토벌 전쟁을 선포했다. 누구도 아들의 목숨값을 받으려는 타란 공작의 출정을 만류하지 못했다.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북부 야만족 토벌은 1년 만에 끝났다. 셀 수 없이 많은 야만족이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몰살당했다. 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강이 되어 흘렀다. 시체를 태우는 역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야만족의 땅 전역을 뒤덮었다. 그리고 넓은 야만족의 땅은 주인 없는 영토가 되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널찍한 빈 땅을 두고 각국에서 군침을 흘렸다. 부강한 나라로 거듭날 수 있으려면 넓은 영토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 훗날, 2차 대륙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대한 전쟁의 전초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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