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4화 (75/77)

외전 5장 꿈과 현실이 만나는 곳

그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던 부토니에는 계획과 다르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완성되었다.

디자인 초안을 잡았던 세공사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다쳐서 한동안 손에서 일을 놓아야만 했다. 보석상에서는 사정을 설명하며 급하시다면 다른 세공사에게 도안을 넘겨 제작하겠다는 양해 편지를 보내왔다.

루시아는 잠시 고민했으나 왠지 다른 세공사가 만든다는 점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더 기다리더라도 최초에 도안을 그린 세공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거의 잊어버릴 즈음에 완성된 부토니에가 저택으로 배송되었다. 루시아는 고급스러운 벨벳에 감싼 브로치를 테이블에 꺼내놓고 격동하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귀한 보물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맞아. 이거야.’

루시아는 세공사에게 이러저러하게 제작해 달라는 추가 요구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직 맡겨두고 기다렸다. 즉, 세공사의 완전한 창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루시아가 꿈속에서 오랜 세월 간직하며 보고 또 봐서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손에 쥐고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치 꿈과 현실을 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원래 그이의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도대체 어떤 경로로 그녀의 보석함 속에 이것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는 구석이 없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그와 어떤 인연도 없었다. 정말 옷깃 한 번 스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마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꿈속에서의 그는 손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곁으로 제롬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님. 두 분 도련님께서 귀가하셨습니다.”

“아이들만 들어왔나요?”

루시아는 브로치를 다시 벨벳으로 잘 싸서 상자에 담았다.

“예. 두 분이 마차에서 내리시는 모습만 뵈었습니다.”

“오늘 늦으신다는 말씀은 없으셨는데…….”

루시아는 상자를 하녀에게 주며 침실에 가져다 두라고 일러놓고 응접실을 나갔다.

막 저택으로 들어서던 데미안은 2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소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는 누이가 달려오면 안아줄 생각이었다. 두 팔을 벌렸으나 누이는 데미안의 기대를 저버렸다.

에반제린은 데미안과 몇 걸음의 거리를 두고 딱 멈추어 서서 데미안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오라버니가 쥬드를 오지 못하게 했어?!”

에반제린의 뽀얀 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귀가한 오라버니를 마중하는 즐거움이 가득한 귀여운 표정이 아니라 잔뜩 뿔이 나서 씩씩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어린 누이의 낯선 표정에 멈칫한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해서 에반제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듣지 못했다.

“이브.”

“오라버니가 쥬드를 오지 못하게 했다며! 정말로 오라버니가 그랬어?”

데미안은 방방 뛰는 누이를 보면서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를 찾아보았다.

쥬드. 이제는 허물없이 어울려 놀기에는 아무래도 녀석이 나이가 많이 든 것 같아서 녀석의 출입을 통제하시라고 부모님께 건의했었다. 아버지는 데미안의 뜻에 동의했고, 아버지가 그러기로 하셨다면 어머니는 대개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데미안이 직접 쥬드의 출입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아버지께 그래야 한다고 말씀드렸어.”

화를 내면서도 오라버니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던 에반제린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었다.

“왜? 왜 쥬드와 놀면 안 돼?”

“이브. 너도 쥬드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언제까지나 같이 어울려 놀 수는 없어.”

“왜 오라버니가 내 친구를 우리 집에 못 오게 해? 나는 오라버니의 친구들을 오지 말라고 한 적 없잖아. 크리스 오라버니도, 브루노 오라버니도 나는 다 좋아했는데 오라버니는 왜 쥬드를 미워해?”

브루노는 드디어 에반제린이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었음에도 기뻐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유감이었다. 살벌한 기세 싸움을 하는 두 오누이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슬금슬금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과 동급으로 묶여서 에반제린의 미움을 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쥬드를 미워해서가 아니야, 이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이렇게 무조건 화내면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잖아.”

“이야기 안 해! 오라버니 미워!”

“에반제린.”

단호한 목소리가 소녀의 성난 외침을 자르고 들어왔다. 에반제린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가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소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어머니는 언제나 야단을 칠 때는 이브라는 애칭 대신 에반제린이라고 불렀다.

“오라버니에게 이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니.”

루시아는 비교적 에반제린을 자유롭게 키우는 편이었다. 여느 귀족가의 아가씨처럼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강요하거나 얌전하게 입을 가리며 호호 웃는 연습을 시키지 않았다.

대신 예절 교육만큼은 철저히 시켰다. 고용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참 나이가 많은 오라버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생떼를 부리는 짓은 그녀의 교육 철학에 완전히 어긋났다.

“오라버니에게 사과하고 네 방으로 올라가거라.”

에반제린은 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지만, 야단칠 때는 엄격했다. 야단을 맞을 때는 대부분 에반제린은 제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니었다. 오라버니에게 버릇없이 군 행동보다 오라버니가 한 일이 훨씬 더 잘못되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딸을 보며 루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반제린.”

“…….”

루시아가 한 번 더 ‘에반제린.’ 하고 노기가 깃든 목소리로 부르자 에반제린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딸의 말대답에 루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물끄러미 딸을 바라보았다.

“이브.”

데미안이 굳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데미안은 누이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건, 무슨 소리를 하건 개의치 않았으나 어머니께 버릇없이 구는 일만큼은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다.

“어머니께 무슨 말버릇이냐.”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에반제린은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소녀의 노란 눈동자에 가득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브루노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의 눈물을 닦아줄 것처럼 손을 뻗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아무리 가족처럼 지내고는 있다지만, 근본적으로는 가족의 테두리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상황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에반제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제 고집을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입을 꽉 다물고 두 눈에서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루시아는 딸의 반항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애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잘못을 흐지부지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곤란해하는 어머니와 울고 있는 에반제린을 번갈아 보면서 데미안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에반제린을 감싸주고 달래는 일은 데미안의 몫이었으나 지금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먼저 이브와 이야기를 해서 충분히 이해시킨 다음에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데미안은 결과적으로 에반제린에게 상처를 준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에반제린은 울고 있고, 루시아와 데미안은 이 상황을 어찌 풀어야 하는지 난감하게 고민 중이었다. 하인이 분위기를 살피며 쭈뼛거리다가 소식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루시아는 들어오는 남편을 보면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물러날 수도 없고 딸을 더 몰아붙여서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야.”

휴고는 들어오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눈가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울고 있는 딸을 발견했다. 제 어머니를 닮은 호박색 눈동자에 가득 눈물이 담겨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휴고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몸을 숙이고 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에반제린은 흘끔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한 번씩 돌아보고 천천히 아버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아버지에게 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에반제린은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서 꽉 목을 안았다.

“으아아앙!!”

휴고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등을 부드럽게 쓸면서 토닥토닥 두드렸다. 에반제린을 안고 일어나며 눈이 마주친 아내에게 내게 맡겨두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그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작은 몸 어디에 그렇게 쏟아낼 눈물이 있는지 딸이 고개를 묻고 있는 목덜미가 금방 축축해졌다. 그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두드려주면서 딸이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이의 울음이 훌쩍거리는 소리로 바뀔 즈음에 휴고는 안고 있던 딸에게 물었다.

“물 줄까?”

에반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는 딸을 안고 일어나서 테이블로 다가가 물을 따라 딸의 입가에 대주었다. 울음 끝이 남은 에반제린이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상체를 들썩거리면서 물을 마셨다.

휴고는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아서 자신의 무릎에 앉아 뚱하게 부어있는 딸에게 말했다.

“이브.”

“…….”

“무슨 일인지 말하기 싫어?”

에반제린이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쥬드를 못 오게 했어요.”

“데미안이 쥬드를 쫓아냈어?”

“쥬드가 안 왔어요. 근데 오라버니가 못 오게 했대요.”

휴고는 짤막한 설명만으로도 저간의 사정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부족한 어휘로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어린 딸을 키우며 늘어난 재주였다.

사내아이들이 더는 공작저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고 아내에게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같이 놀던 아이들을 갑자기 못 오게 할 수는 없어요. 이브가 친구를 억지로 잃게 되면 상처받을 거예요. 제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브를 이해시켜 볼게요.’

아내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그럼 알아서 하라고 맡겨두었다. 아내가 에반제린에게 말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쥬드를 오지 못하게 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쥬드가 정말 출입금지를 당했다면 그 일은 데미안과 관련이 없었다. 휴고는 이브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브. 쥬드가 오지 않은 이유를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니?”

“…아니요.”

“네 오라버니가 한 일이 아니야.”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가 했다고 그랬어요.”

“그럼 데미안도 잘못 알고 있구나. 쥬드를 오지 못하게 하는 일은 데미안이 할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만 할 수 있지. 나는 쥬드를 오지 못하게 한 적이 없고, 네 어머니도 그런 적이 없어.”

“…….”

“쥬드가 오지 않아서 속상해서 울었니?”

“…오라버니한테… 막 소리 질렀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화가 나셔서…….”

휴고는 에반제린이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자 단지 어머니에게 야단맞아서 울었다는 것 외에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께 대들었어요.”

저런. 그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딸 다음 차례로 아내의 속도 달래 줘야겠다.

“이브. 어머니께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하다고 잘못을 빌고, 오라버니에게도 가서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라. 알겠지?”

“…네.”

루시아는 남편이 딸을 안고 응접실로 들어가서 울음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훈육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던 딸이 맞서서 자신의 의견을 내는 나이가 되었음을 알았다. 대견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이었다.

“제 탓입니다. 어머니. 쥬드와 놀지 못하게 되어서 화가 난 것 같아요.”

“쥬드? 쥬드가 왜?”

“쥬드가 이제 오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것 아니었나요?”

“아니야. 같이 놀던 친구를 갑자기 떨어뜨리면 두 아이 모두에게 상처가 될 테니까 시간을 두고 두 아이를 이해시키려고 했어. 평소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연락 없이 쥬드가 오지 않았거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후작가에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지. 이브가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구나.”

루시아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가 들은 소식의 출처라고 해봤자 뻔했다. 가까이 시중을 드는 고용인일 것이다. 어린아이 앞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하라고 일러 두었건만. 아무래도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시키고 이번에 말을 옮긴 자가 누군지 알아내서 따끔하게 야단쳐야겠다.

“괜히 잘못 없는 네가 이브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어.”

“아닙니다. 이브의 말이 맞아요. 제가 이브의 친구를 집에 오지 못하게 할 자격은 없지요.”

“네가 아니면 누가 자격이 있겠니. 이브를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올라가 쉬렴. 내가 나중에 이브를 보내서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그러실 필요까지는…….”

“잘못은 잘못이야. 데미안. 너무 이브를 받아주기만 하면 안 돼. 너나 네 아버지나 그저 예쁘다, 예쁘다고만 하니. 저러다 제멋대로 자랄까 봐 걱정이란다.”

데미안은 한숨 섞인 어머니의 걱정에 동감하지 않았다. 이브는 누구보다도 사려 깊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숙녀로 자랄 것이다.

‘어머니를 닮은 어머니의 딸이니까요.’

데미안은 방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일지 빤해서 데미안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에반제린이 틈새로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딴에는 조심히 내부를 살필 작정이었겠지만, 열린 문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에반제린은 움찔 놀랐다가 멋쩍게 히죽 웃고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울음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소녀의 눈가는 붉었다. 아까 울던 누이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서 데미안은 가슴 안쪽이 따끔거리면서 아팠다.

“미안해.”

사과하러 들어온 에반제린은 오히려 데미안의 사과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오라버니가 왜? 에반제린은 그런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데미안을 빤히 보았다.

“쥬드를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린 일은 미안하다. 이브.”

“…하지만 오늘 쥬드가 오지 않은 건 오라버니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어.”

“그래. 그래도 네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만 주장했으니까. 다음부터는 꼭 너와 먼저 얘기할게.”

“…응. 나도 소리 질러서 미안. 잘못했어.”

오누이의 화해는 금방 이루어졌다.

에반제린은 기분 좋게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가끔은 엄한 어머니지만, 에반제린은 어머니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어머니께 책을 읽어달라고 말할 작정으로 손에는 책을 한 권 쥐고 있었다.

응접실 안으로 금방 뛰어들어갈 것 같던 에반제린은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면서 우뚝 멈추었다. 소파에 부모님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몹시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건네자 아버지가 웃으면서 어머니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미 여러 번 봤던 광경이라 그리 낯설지 않은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브루노는 1층으로 내려오다가 계단 구석에 앉아있는 에반제린의 앙증맞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소녀가 작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모습이 진지했다. 혹시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걱정되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자 슬쩍 돌아보는 이브의 표정은 괜찮아 보였다.

“이브.”

에반제린은 흘끔 브루노를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서 마치 세상을 다 산 노인처럼 푹 한숨을 쉬었다.

브루노는 웃음이 나오지 않게 입술을 꾹 물었다. 심각한 소녀의 모습은 꽉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데미안한테 아직 화났어? 내가 혼내줄까?”

“아니야. 데미안 오라버니하고 화해했어.”

“그럼 왜?”

“예쁜 오라버니.”

“…응.”

“나를 제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브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왜 없어. 부모님도, 데미안도 모두 이브를 많이 사랑하잖아.”

“아니야. 나도 알아. 아버지는 어머니를 제일 좋아해. 데미안 오라버니도 어머니를 더 좋아해.”

“…….”

허를 찔리는 기분으로 브루노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에반제린의 푸념에 아니라고 답해 주지 못했다.

타란가의 두 부자는 타란가의 안주인에게 아주 꽉 잡혀있었다. 에반제린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에반제린을 향한 내리사랑과 다른 형태로 공작부인을 향한 두 부자의 애정은 절대적이었다. 브루노가 느끼는 점을 에반제린이라고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라버니도 나보다 어머니가 더 좋지?”

“이브.”

브루노는 난감했다. 어떻게 설명하면 에반제린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누구를 누구보다 더 좋아한다고 비교할 수 없는 문제란다. 이브는 어머니와 아버지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한참 말이 없던 에반제린이 중얼거렸다.

“…쥬드는 안 그래.”

“쥬드가 뭘?”

“쥬드는 내가 더 좋대. 쥬드의 어머니보다도, 우리 어머니보다도 내가 더 좋다고 그랬어.”

브루노의 입 끝이 비뚜로 올라갔다. 그 꼬맹이 녀석이.

“그래서 쥬드가 좋아?”

“응.”

하, 브루노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친구 크리스의 동생 쥬드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떠올렸다.

‘애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되겠는데.’

은근슬쩍 이브에게 결혼하자고 하지를 않나. 철없는 어린 녀석이 뭔지 모르고 뱉은 말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교활한 속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크리스의 동생이라도 금쪽같은 누이를 날름 먹어버리게 둘 수는 없었다. 브루노는 쥬드를 향한 전의를 불태웠다.

“내가 이브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줄게.”

브루노는 눈이 동그랗게 커진 누이를 보며 사르르 웃었다. 브루노를 훔쳐보기에 바쁜 숙녀들이 봤다면 황홀해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달콤한 미소였다.

“쥬드는 좋고 나는 싫어?”

에반제린이 재빠르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리고 발그레 물든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귀여운 녀석, 브루노는 에반제린의 작은 머리통을 한 번 쓸어주고 옆에 놓인 책을 들고 일어났다.

“올라가자. 책 읽어줄게.”

“응!”

에반제린은 신나서 브루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근데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참 예쁜 것 같아. 패트리샤보다 예뻐.”

브루노의 매력적인 미소에 빠져들기에는 에반제린이 아직 어렸다. 그래서 자신의 감상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했다. 패트리샤는 에반제린이 애지중지하는 어여쁜 공주님 인형이었다.

“…….”

칭찬이라는 것은 알지만, 마냥 기분 좋을 수는 없는 미묘한 기분으로 브루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에반제린이 ‘예쁜’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기를,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랐다.

“품 안의 자식이래요.”

휴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어 품 안으로 그녀를 바짝 당겼다.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그녀의 등 뒤를 어루만지며 쓸어내렸다.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어? 이브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잖아.”

“이브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에요. 그냥……. 제 마음이 허전해요. 벌써 다 컸나 싶고.”

“어린아이의 투정이야. 왜 이렇게 심각해.”

“이브를 어리게만 생각했나 봐요.”

“아직 어려.”

“아니에요. 다 큰 것 같아요. 당신이 오래전에 그러셨죠. 자식은 키워봤자 나중에는 제 살 길만 찾는다고.”

휴고는 아내의 투정을 들으며 낮게 웃었다. 오늘은 그가 두 모녀를 달래고 어르는 날인가 보다.

“그렇다고 했잖아. 애들은 알아서 크게 내버려둬. 난 당신만 있으면 돼.”

“…….”

오히려 그가 저렇게 말하니까 루시아는 떨떠름했다.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듯이 아이들이 없는 삶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도 그렇다고는 빈말이라도 안 해주는군.”

“…휴. 음…….”

“됐어. 이래서 더 사랑하는 쪽이 손해라니까.”

“도대체 그 이상한 자신감은 뭐죠? 당신이 제 마음을 들여다봤어요?”

“원래 부족한 쪽이 느끼는 법이야.”

루시아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몸을 일으켰다.

“부족했어요?”

휴고는 어둠 속이지만 굳어진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왜 또 심각해.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사랑해요. 당신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알아. 그냥 어쩔 수 없는 문제야. 나는 아이들과 당신 중에 우선순위가 확실하고, 당신은 그걸 구별하기가 어렵고. 내 마음과 똑같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아이들 문제로 너무 속 끓이지 말라고 하는 말이야. 오매불망 당신만 보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너무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마.”

“…당신 말솜씨는 갈수록 늘어요.”

루시아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는 어머니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줄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가 주는 넘치는 사랑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 루시아는 눈동자를 돌리며 열심히 꿈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척 기분 좋은 꿈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아쉬움을 느끼며 잠시 미적거리다가 일어났다. 체온으로 덥혀놓은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차가운 실내 공기가 훅 온몸을 덮었다.

침대 아래로 디딘 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이 차가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발로 더듬어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슬리퍼의 안쪽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솜털이 들어있어서 금방 부들부들해졌다.

그녀는 어젯밤에 미리 떠놓은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으으으.’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마쳤다.

루시아는 거울 속에 흐릿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거울은 무척 고가품이라서 아쉬운 대로 장만한 거울은 꺼멓게 색이 죽어있었다.

이 거울도 장점은 있었다. 얼굴의 잡티나 주름이 보이지 않아서 비치는 사람이 예뻐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대충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흐릿한 거울이 거슬렸다.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가 바싹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잘 보이지 않던 미세한 주름이 눈에 띄었다.

‘세월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내 나이가 벌써…….’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나이를 이미 오래전에 훌쩍 뛰어넘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자신을 낳아 기를 당시의 어머니는 참 어렸다. 그 어린 나이에 홀로 딸을 낳아 기르면서 얼마나 밤에 남몰래 눈물을 쏟았을까. 보란 듯이 잘살지 못해서 어머니께 죄스러울 뿐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넋을 놓고 멍하게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옷을 걸쳤다. 침실을 나오자 맞은편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원래 잡스러운 물건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창고로 쓰던 방에 얼마 전부터 손님이 머물고 있었다.

루시아는 슬그머니 다가가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비어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손님은 항상 루시아보다 일찍 일어나서 자신이 일어났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처럼 방문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오래 머물 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쩌다 보니 달포가 넘도록 갑자기 찾아든 손님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신기하지. 왜 불편하지 않을까.’

오랜 세월을 혼자 살던 공간에 이방인이 끼어들었는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와 함께 산 것처럼 위화감이 없었다.

아마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외진 촌구석에 사는 무지렁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해질 무렵에 쾅쾅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가 눈앞에 서있는 그를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룻밤 잠자리를 빌리자고 말하는 그의 요구에 바보처럼 빠르게 고개만 끄덕였었다.

‘꿈도 꾸지 마. 곧 떠날 분이야.’

루시아는 스스로 다그쳤다. 그녀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길 떠나면 나같이 늙은 농가의 아낙 따위는 금방 잊겠지.’

스쳐 지나간 여자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알면서도 그녀는 요즘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마음속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자꾸 그녀를 들뜨게 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재료를 다듬고 불을 피웠다. 찰랑찰랑 넘칠 듯이 가득 물이 담겨있는 물독에서 습관적으로 물을 퍼내다가 멈칫했다.

어제 반쯤 차있던 물독은 오늘도 어김없이 가득 차있었다. 한 번도 부탁한 적 없으나 그는 매일 아침 물을 길어 독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틈틈이 장작을 팼다. 그가 만들어둔 장작이 창고에 가득해서 올 겨우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아는 문득 웃음이 났다. 귀한 분이 어쩌면 이렇게 궂은일을 척척 잘하는지 모르겠다.

수프가 끓기 시작하자 그를 찾으러 나갔다. 그사이에 혹시 들어왔을까 해서 가장 먼저 방을 확인했으나 비어있었다. 그다음으로 확인하는 곳은 장작을 패는 뒤뜰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집 주변을 몇 바퀴 빙빙 돌았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가버린 걸까? 인사도 없이?’

그녀의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시 뒤뜰로 돌아와서 아직 장작이 되지 못한 나뭇더미를 멍하게 응시하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뭐 하는 거요?”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의 그가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몇 마리의 토끼가 덩굴을 엮어 만든 끈에 묶여 꿈틀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아……. 사냥.’

그는 오전에 종종 사냥을 다녀왔다. 그걸 새카맣게 잊고 괜히 혼자 서글퍼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끝나서요.”

“내가 늦었나 보군.”

“그럼……. 식사하러 들어오세요.”

루시아는 그에게 꾸벅 고개인사를 하고 총총걸음으로 집안에 들어갔다. 괜히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점심은 토끼 고기로 스튜를 끓여야겠다. 구이도 좀 할까.’

아침을 먹으면서 루시아는 다음 식단을 걱정했다. 혼자 있을 때는 대충 끼니만 챙기면 되었는데 객이 들면서부터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매일 고급 요리만 입에 대고 살아온 사람일 텐데 조악한 자신의 요리를 내놓기가 면구스러웠다.

루시아는 식사 중에 몰래 그를 곁눈질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저런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이 세상에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그가 먹고 있는 수프 그릇에 닿았다. 양파와 감자만 넣어 끓인 수프로 아침을 먹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곳은… 저분께 어울리지 않아.’

그를 핑계로 삼고 있으나 솔직한 마음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 일상이 되기 전에 그를 보내는 편이 나았다.

식사를 마치고 루시아는 차를 내오면서 무심히 지나가듯 말했다.

“날이 더 추워지면 움직이기 힘드실 거예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공짜로 더는 먹여주고 재워줄 수 없다는 뜻이오? 숙박비를 떼먹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시오.”

그는 이미 숙박비 이상의 일을 해주었다. 그가 해놓은 장작만으로도 올겨울을 넉넉히 땔 수 있을 정도였다. 수시로 해오는 사냥 덕에 내다 팔면 제법 돈이 될 가죽도 창고에 쌓였다. 루시아는 요즘처럼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은 적이 없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건 빛이 나는 것 같다. 그의 강인함은 진짜였다. 그는 고통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의 기억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가슴에 설렘을 남겨놓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와 어울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며 씁쓸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걱정하실 거예요.”

“그런 사람 없소.”

그는 무심하게 잘라 말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루시아는 따져 묻고 싶었다.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기다릴 아내가 있고, 아들도 있었다. 가족뿐이겠는가. 그를 수행하는 많은 사람이 그의 행방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제가 불편합니다.”

“…….”

“혼자 오래 살아와서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 버겁군요.”

루시아는 그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으나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딸각, 나무 탁자에 부딪히는 금속음이 들렸다. 루시아는 슬쩍 시선을 들었다가 흠칫했다.

‘저게 왜.’

탁자 위에 그가 올린 것은 그녀의 서랍장 깊은 곳에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은으로 사자의 형상을 뼈대로 잡아 붉은 보석을 박은 부토니에. 어쩌다 그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물건을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도저히 처분할 수 없었다.

가끔 떠오르면 꺼내보곤 했다. 마치 그녀의 어머니가 펜던트를 꺼내보았던 것처럼. 부토니에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막상 눈앞에 있는 요즘은 더 자주 꺼내서 봤다.

‘내가 저걸 방에서 가져나온 적이 있었나?’

그녀는 재빠르게 부토니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에 들린 브로치를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사납게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는군요. 제 방을 뒤지셨나요?”

“오해는 마시오. 난 떨어져있는 물건을 주웠을 뿐이니까.”

“어디서요?”

“그대의 침실 문 앞에서.”

“그랬다면 굳이 주우실 필요가 없었군요. 집주인이 집안에서 흘린 물건의 주인은 빤하지 않나요? 제가 금방 발견했을 거예요.”

“맞는 말이오.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오. 이건 그대 것이 맞소?”

“정말 무례하시네요. 제가 주인이 아닌 물건을 지니고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이런 곳에서 사는 보잘것없는 여자가 지닌 물건이 너무 귀해서? 제 것이 틀림없으니 돌려주세요.”

그는 씩씩대는 루시아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시오? 지난 한 달보다 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그대가 한 말이 더 많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그야말로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루시아는 미심쩍게 그의 태도 변화를 살폈다. 감정 없이 차가운 표정만 짓던 그가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빙글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아.”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것을 보면서 루시아는 내심 아차 싶었다.

“외딴곳에서 홀로 사는 농가의 여인이 나를 안다? 그대의 신분 내역이 의심스러워서 알아보려고 했지. 내가 원래 수상한 점을 그냥 넘기지 못하거든. 이것이 아니었으면 아마 끝내 알아내지 못했을 거요. 그래도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하는데 시간이 걸렸소.”

“무슨…….”

“그대의 이름은 아마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비비안.”

루시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했다. 탁자 위에 올린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서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부토니에를 손가락 끝으로 튕겨서 던졌다가 받으면서 빙긋 웃었다. 그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건 그대의 것이 맞소. 내가 그대에게 주었으니까. 비밀 통로에 잘 감추어둔 보석함에 내가 넣어 두었거든.”

* * *

루시아는 흠칫, 몸을 떨면서 잠에서 깼다. 굳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열심히 눈을 굴렸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일까. 그리고 루시아는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를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현실이었다.

‘아……. 세상에…….’

이 눈부신 기적을,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기억났어…….’

열두 살에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에는 꿈에서 장년 이후의 삶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의 꿈으로 알았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워낙 방대한 꿈 일부를 작은 머리가 모두 담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의 꿈속에서 인생의 격렬한 사건들은 모두 젊은 시절에 발생했다. 상대적으로 중년 이후의 삶은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다. 특히 꿈속의 루시아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메튼 백작과의 결혼과 그 결혼이 끝으로 이르는 과정이었다. 그것이 워낙 압도적으로 충격적이라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건의 기억을 멀리 밀어놓았다. 그렇게 잠자고 있던 그녀의 무의식 속의 기억이 오늘 받은 부토니에를 보면서 자극받아 깨어났다.

꿈속 노년기의 기억도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웃고 있었고 수십 년 후의 남편의 모습을 한 남자가 곁에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가슴 안쪽이 아프도록 죄어들었다. 눈가에 뜨거운 열이 몰리면서 저절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삼켰다.

‘당신이었어요. 당신이었군요.’

그와의 인연이 닿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여겼던 꿈속의 그녀가 그를 만났다. 비록 그를 만나기까지 많은 사건을 겪고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으나 결국은 그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원래 흘러갈 미래를 비틀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그와 부부의 연을 만든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와 만났을 거라는 필연적인 미래를 엿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운명의 실이 이어져 있었다. 감격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비비안?”

잠귀가 밝은 그가 그녀의 작은 흐느낌을 듣고 깨어났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다급히 묻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겼다. 루시아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가눌 수 없어서 그의 목을 팔로 감고 꽉 끌어안았다. 자꾸 울음이 나와서 그를 안고 울기만 했다.

“괜찮아. 비비안.”

그는 루시아가 악몽에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달래주었다. 그의 손이 등 뒤를 받쳐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사랑해요, 휴.”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어쩌면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울음에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낮게 웃으면서 귓가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사랑해.”

루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며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꿈속의 루시아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비록 젊음을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인생을 함께 마무리했다. 현실의 루시아는 그를 만나서 꿈속의 비극적인 미래를 되풀이하지 않고 온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와의 인연은 그녀의 인생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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