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3화 (74/77)

외전 4장 공작 부부의 일상

“며칠 전에 디터 백작부인의 티파티에서 파티 깨기가 있었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캐서린이 꺼낸 새로운 화제였다.

“저런.”

루시아는 짧게 혀를 찼다. 파티 깨기는 그리 흔하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었다. 파티 깨기의 주동자가 파티의 주최자와 완전히 척을 질 것을 각오하고 벌이는 최후의 수단에 가까웠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만큼 파티 깨기는 언제나 사교계의 흥밋거리였다. 루시아는 로암의 티파티에서 벌어졌던 파티 깨기 사건을 떠올렸다. 그 일이 벌써 10년 전이었다.

“디터 백작부인이 큰 망신을 당한 모양이더군.”

“주동자가 누구였나요?”

“오필 백작부인.”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터 백작부인은 귀에 익었지만, 오필 백작부인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즉, 디터 백작부인은 제법 사교계에 명성이 있는 사람인데 파티 깨기의 주동자가 상대적으로 열세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예는 거의 없었다.

“누구도 디터 백작부인의 역성을 들어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백작부인이 무슨 실수를 했기에요?”

“실수?”

캐서린이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오필 백작의 불륜 상대가 디터 백작부인이었거든. 더구나 오필 백작은 디터 백작부인을 자택까지 끌어들여 둘이 침대에서 뒹굴다가 오필 백작부인의 눈에 띄었다지. 디터 백작부인은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본인의 속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모양이야. 오필 백작부인이 티파티 날에 속옷을 테이블에 던졌대.”

“…….”

루시아는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어도 당시의 아수라장이 눈에 보였다. 자기 일이 아닌 귀부인들은 모처럼의 구경거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신나게 여기저기 소문을 퍼 날랐을 것이다.

디터 백작부인은 자초한 일이라고 쳐도, 오필 백작부인은 따지고 들면 피해자인 셈인데 우세스러운 상황이었다. 사교계의 많은 불륜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남편 혹은 아내의 배우자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내 배우자가 바람이 났다고 알려지는 일을 몹시 망신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저간의 사교계 흐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오필 백작부인의 비참한 심정을 생각하면 참 안되었다.

‘끔찍해.’

루시아는 절대 오필 백작부인의 입장이 된 자신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디터 백작부인은 왜 티파티에 오필 백작부인을 초대한 거죠? 오필 백작부인이 초대를 받지 않았는데도 난입한 건가요?”

“디터 백작부인은 오필 백작부인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했을 거야. 사교계에서 자신의 이름이 훨씬 위에 있고, 평소 오필 백작부인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사람이었거든.”

“원래 조용한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서운 법이지요.”

“그건 그래. 동생처럼.”

화제의 중심이 갑자기 자신이 되자 루시아는 당황했다.

“제가 왜요?”

“비비안, 네가 딱 그렇잖아. 화가 나면 무시무시할 거야. 난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타란 공께서는 경험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잡혀 살 리가 없지.”

“…잡혀 살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긴. 타란가의 남자들이 안주인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다들 내게 뭐라 하는 줄 알아? 도대체 공작부인이 무슨 재주로 남편이고 아들이고 다 쥐고 사느냐고 비결이 알고 싶대. 넌지시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

“…그런 비결은 없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루시아는 민망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잡고 잡히고. 자신과 남편은 그런 힘의 우위로 정의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히려 루시아가 형편없이 약했다. 그녀는 근력이 보잘것없는 여자이고 그녀가 가진 권력은 모두 남편 덕에 얻은 공작부인의 위치에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녀를 존중해 주는 남편을 그녀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데 뭇사람들은 자기들 잣대로 해석하고 평가했다.

“동생은 좋겠어.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변함없는 남편이라서.”

“언니.”

혹시……?

루시아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자 캐서린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요즘은 예전 같지가 않더라. 옛날에는 그이 얼굴만 봐도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는데. 요즘은 가끔은 늦게 들어오는 편이 더 좋은 거 있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더 즐거울 때도 있고. 동생은 안 그래? 남편보다 이브가 훨씬 더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아?”

“…….”

물론 에반제린은 사랑스러웠다. 루시아는 딸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을 향한 사랑과는 달랐다.

두 가지의 사랑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브는 루시아가 품어줘야 할 사랑이고, 그는 함께 마주 안고 싶은 사랑이었다. 여전히 그와 함께 있으면 설레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의 너른 가슴에 안기면 행복했다.

‘참,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라니까.’

남편 생각을 하는지 금방 얼굴이 발그레 물든 루시아를 보며 캐서린이 픽 웃었다. 사교계에 유명한 잉꼬부부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타란 공작 부부 정도의 사교계 유명인사가 그랬던 적은 없었다. 캐서린이 알기에는 처음이었다.

캐서린은 루시아를 볼 때마다 그녀의 순수함이 신기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깨끗함이었다. 닳고 닳은 귀부인들과 어울리다가 루시아를 만나면 마치 맑은 물가에 서있는 것처럼 개운했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들어서는 여자가 이렇게 소녀처럼 귀엽기도 어려울 거라고, 캐서린은 생각했다. 동시에 아내의 순진함을 지켜준 타란 공작의 능력이 의심스러웠다. 둘이 제대로 성생활을 하기는 하는 건가?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물어볼 수는 없고.

캐서린은 혼자 망상만 하다가 탄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줄 것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캐서린이 작은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예전에 사들인 건데 한 번도 입지는 않았어.”

루시아는 캐서린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서 열어보았다. 안에는 새하얀 레이스 뭉치가 들어 있었는데 대충 보기에는 속옷 같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내 살짝 들어서 형태를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물들더니 기겁하며 얼른 상자에 담고 덮개마저 덮었다.

“이… 이게 뭐예요?”

“일생일대의 역작이라고 해서 샀는데 막상 사서 집에 와서 보니까 내 취향은 아니더라고.”

“이걸 저보고 입으라고요? 이런 건…….”

“창기들만 입는다는 생각은 편견이야. 귀부인 중에 그런 속옷 서너 개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어.”

“설마…….”

보는 것만으로도 망측한 이런 것을 고상한 척하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다니. 루시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캐서린은 혀를 찼다. 결혼한 지 10년이나 되었으면서 이런 속옷을 본 적조차 없다면 문제가 있었다.

“동생. 결혼한 지 도대체 몇 년이야? 이제는 눈만 마주쳐도 불타오르는 시기는 지났다고. 부부 사이는 서로 노력해야 하는 거야.”

“…노력과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상관이 있지! 부부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뭔 줄 알아? 권태기야. 그건 징조도 없어. 언제 오는지도 몰라.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면 그 상태에 빠져있지. 그럴 때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거야. 아내가 더는 새롭지 않으니까 새로운 여자한테 눈을 돌리는 거지.”

“…….”

“그러니까 자극이 필요해.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라고. 원래 남자는 시각적인 부분에 약하거든.”

여전히 망설이는 루시아를 캐서린은 열심히 설득했다.

“절대 이상한 속옷이 아니야. 나도 몇 개 가지고 있어. 그리고 참고로 그 속옷 디자이너는 앙뜨야.”

“앙…뜨요?”

“난 앙뜨의 드레스는 취향이 아니지만, 앙뜨가 그런 속옷은 남다른 면이 있지. 얼마나 유명한데.”

몰랐다. 앙뜨는 루시아에게 단 한 번도 이런 속옷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앙뜨는 타란 공작의 기준에 부합하는 ‘단정한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괜히 공작부인께 이상한 것을 권했다가 타란 공작에게 미운털이 박힐까 봐 속옷 이야기는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권태기?’

루시아의 마음이 괜히 심란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지 벌써 몇 년째야.’

세상이 한 번 바뀐다는 세월이 흘렀다. 갓 스무 살 무렵의 싱그러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또 한 번의 10년은 훌쩍 지나갈 것이고, 그녀의 눈가에는 주름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10년 후를 상상하면 그는 여전히 근사했다. 오히려 중후한 멋이 더해져서 공식 석상에 나가면 귀부인들이 그를 훔쳐보느라 바쁠 것이다. 어쩐지 약이 올랐다.

‘요즘은 늦게 들어오는 날도 많고.’

루시아는 텅 빈 침대 옆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제도 늦게 들어왔다. 매년 이맘때가 가장 분주한 시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루시아는 늦은 귀가의 원인이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 것처럼 그를 탓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그녀는 혼자 계속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서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화장실을 갔다가 막 월경이 시작된다는 징조로 팬티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우면서 피식 웃었다. 그래서 기분이 예민해졌나 보다. 원인을 알고 나니까 갑자기 지금껏 혼자 끓이던 속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속이 편해지니까 소르르 잠이 오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노곤한 잠기운에 막 잠기다가 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옆에 눕는 그의 움직임에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지금 오셨어요……?”

“…안 잤어?”

“자다가…….”

잠결에 당신이 눕는 기척을 느껴서 깼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켜서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루시아는 그의 입술이 턱밑에 비집고 들어와 키스하면서 그의 두 손이 부지런히 잠옷 안으로 파고들어 단추를 푸는 과정을 멀거니 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여 잠기운을 몰아냈다. 어쩐지 그가 몹시 신이 난 것 같아서 풋, 웃었다.

안타깝지만, 그를 실망하게 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요. 오늘 시작했어요.”

“뭘…….”

그는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크게 낙담했다.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이번 달은 이틀이나 이르잖아.”

루시아는 월경 주기를 자신보다 더 꿰고 있는 남편을 흘겨보았다.

“며칠 이르기도 하고 늦어지기도 해요.”

“아니야. 당신은 거의 규칙적이라고. 의사한테 진료받아 봐.”

“무슨 그런 일로 의사를 불러요.”

그가 계속 의사를 부르라고 종용하자 루시아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내일 의사에게 진료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강한 팔로 등을 받쳐 품으로 안아주는 남편의 가슴에 기대어 루시아는 행복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권태기? 아직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잠든 아내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휴고는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휴고는 월 한 차례,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임기의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월경이라는 증상이 몹시 성가셨다.

루시아는 출산 후 넉 달이 지날 즈음에 월경을 시작했다. 삼엽쑥의 효능이 모두 사라지고 그녀가 정상적인 평범한 몸으로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휴고는 오히려 전보다 상황이 나빠졌다고 느꼈다. 월경을 시작할 무렵에 아내는 복통을 호소했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무엇보다도 무려 달에 4~5일을 연속으로 그녀에게 손댈 수 없었다. 늦게 들어오는 날과 닷새에 하루를 제하는 기간까지 합쳐서 그는 달에 근 열흘이 넘도록 독수공방해야 했다.

도대체 왜! 여자는 왜 그런 증상을 무려 달마다 며칠씩이나 겪어야 하는가! 그는 잠들 때까지 입안으로 구시렁거렸다.

“…주무십니다.”

오늘도 또? 지금 시각이 몇 시인데. 아직 초저녁이잖아!

휴고는 죄 없는 집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내의 월경이 끝나기를 나흘을 기다렸고, 다음 날은 불가피하게 그의 귀가가 많이 늦어서 건너뛰었다. 그리고 그제와 어제까지 이틀간 그렇게 늦은 귀가가 아니었는데도 아내는 이미 자고 있었다. 집사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참석해야 하는 사교 모임의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그녀는 온종일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자리를 채워주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오늘도 안사람의 일정이 많았나?”

“예. 그리고 지난 며칠간의 바쁜 일정으로 피곤함이 누적되신 것 같습니다.”

젠장! 휴고는 휙 몸을 돌렸다.

도대체 며칠째인가. 그는 한계에 달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숨소리마저 색색거리며 숙면에 빠져든 그녀를 깨워서 욕심을 채울 수 없었다.

제롬이 쟁반에 담아서 가져온 서신 묶음이 평소와 다르게 얄팍했다. 루시아는 의아해서 물었다.

“제롬, 이게 다예요?”

“예, 마님. 오늘 오전부터 도착한 것입니다.”

“어제는요? 어제는 하나도 안 왔어요?”

“어제 온 것은…….”

제롬은 말끝을 흐리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주인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아 집무실에 들어가서 주인이 내린 명을 받았다.

‘안사람에게 온 초대장. 모두 가져와.’

어제 왔던 우편물 중에는 마님의 개인적인 서신이 없어서 고민할 필요 없이 모두 주인의 집무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까 그다지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주인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곁에 서있었다.

이리 가져오라는 듯, 주인이 손짓했다. 제롬은 왠지 우편물들의 운명이 보이는 것 같아서 주춤했다.

주인은 건네받은 우편물을 주저 없이 모두 벽난로에 쏟아부었다.

제롬은 불쏘시개가 된 서신들이 까맣게 재로 변하는 모습을 멍하게 응시했다. 잠시 얼이 나가있다가 흘낏 살핀 주인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한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주인님께서 태워 버리셨습니다.”

“뭐라고요?”

제롬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마님께 조언했다.

“마님. 주인님께서 좀 심기가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요즘 계속 마님께서 먼저 주무시는 바람에…….”

루시아의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민망해서 집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외부 일정이 너무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휴식하시는 편이 어떠신지요?”

“이미 잡은 약속이…….”

“불가피하면 약속은 깨질 수 있는 겁니다.”

집사의 사명으로 제롬은 이 집안의 평화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요. 집사가 알아서 수습해 줘요.”

“예, 마님.”

루시아는 그가 한 짓이 너무 유치해서 기가 막혔다. 혼자서 몇 번이나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나중에는 그가 귀여워서 웃었다.

‘아무래도 좀 풀어주는 것이 좋겠지?’

그를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하다가 문득 캐서린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떠올랐다. 받아서 가져오기는 했으나 민망해서 다시 들여다보지 못하고 화장대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루시아는 상자를 노려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덮개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손바닥만 한 흰 속옷을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이윽고 꺼내서 이리저리 뒤집어봤다.

루시아는 아무도 없는 침실을 괜히 살폈다.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누가 들어올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불안해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고 망측한 속옷만 걸친 채 거울 앞에 섰다.

‘세상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사람의 적응력이란 대단했다. 루시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망측하다고 중얼거리다가 잠시 후에는 속옷을 걸친 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좀 큰 것 같아.’

캐서린의 체형에 맞춘 속옷이라 그런지 루시아의 몸에 맞지 않았다. 이보다 조금 더 작아야 딱 맞게 예쁠 것 같았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벗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속옷을 다시 상자에 담아 화장대 서랍 깊은 곳에 두었다. 그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목적지는 앙뜨의 의상실이었다.

욕실에서 나오면서 휴고는 응접실과 통한 자신의 침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침실 문은 평소에 들어가 보지도 않는 터라 늘 닫혀있었다. 그는 평소에 목욕을 마치면 응접실에서 곧바로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의아해하며 침실로 들어간 휴고는 침대 위에서 꾸물거리는 생명체의 기척을 바로 감지했다. 이불에 몸을 돌돌 감고 고개만 내밀어 그를 보며 배시시 웃는 아내를 보며 그도 미소 지었다. 곧바로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아 어지럽게 시트에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자는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루시아가 투정을 부렸다. 그는 오늘 들어온다고 말한 시간보다 많이 늦었다. 그녀는 자는 척하며 마중 나가지 않고 그가 씻는 동안에 슬쩍 그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갑자기 일이 있었어.”

그의 손가락이 잠깐 멈추었다가 그녀의 이마를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내의 동그란 이마가 귀여워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꽁꽁 이불로 싸매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물었다.

“추워?”

“…여기 좀 썰렁한 거 같아요.”

“사용을 안 하니까.”

그렇지만 당신 침실인데. 하지만 그는 여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잠은 루시아의 침실에서 자니까. 그것을 깨닫자 루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매번 그녀의 침실로 오지만 루시아가 그의 침실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이라도 창피한테 그만둘까.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늦었어. 마음속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히 시선을 맞추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어떨 때는 비바람 몰아치는 폭풍우 같은데 어떨 때는 물결 하나 없는 망망대해 같았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오늘 앙뜨의 의상실을 다녀왔어요.”

“당신이 직접?”

“네, 낮에 잠깐.”

“무슨 바람이 불었지.”

“거기서……. 음. 입는 거 하나를 추천받아서 샀는데…….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당신 마음에 들 거라고 했어요.”

“내가?”

“볼래요?”

“그래. 내일은 일찍 들어올 거니까 그때 보지.”

“아니, 지금요.”

“지금?”

“입고 있거든요.”

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감고 있는 루시아를 짧게 훑었다.

“그러고 있으면 드레스가 다 구겨질 텐데.”

“…드레스 아닌데.”

“…….”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예민한 초식동물 루시아는 미세한 위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뭔가 이게 아닌 거 같다. 루시아는 이불을 꼭 붙들고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그의 팔이 등 뒤를 막는 것처럼 짚으며 차단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고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루시아는 그의 붉은 눈을 보며 어쩐지 긴장했다. 그가 이불자락을 잡자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보여준다며.”

“어……. 음. 나… 나중에 봐도 괜찮아요.”

“지금 보여준다는 거 아니었나? 내 마음에 들 거라고 했다면서.”

“확실하지는 않아요.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해 준다고 워낙 큰소리를 쳐서…….”

그리고 앙뜨는 덧붙여 말했다. 지금껏 환불 요청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럼 확인을 해봐야지.”

이불자락을 잡아당기는 그에게 저항하듯 루시아는 이불을 꼭 쥐었다. 그래 봤자 그가 힘으로 당기면 당해낼 수 없겠지만 그는 그럴 생각은 없는지 딱 루시아가 저항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힘을 주었다. 루시아는 그와 실랑이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의 침실에 숨어들었는데 인제 와서 몸을 빼기는 우스운 모양새였다.

“…잠깐만 비켜주세요. 보여줄게요.”

그가 팔을 치우자 루시아는 그 사이를 쏙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불을 둘둘 만 상태로 침대 아래로 내려와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대로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까 앙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위기입니다. 분위기가 핵심이에요! 유혹하는 것처럼. 아시겠지요?’

평소에 하시던 대로만 하면 될 거라고 앙뜨는 오호호 웃었지만, 루시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미소만 지었다. 어떻게 해야 유혹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등진 상태로 몸을 감싼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스르륵 이불이 발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선뜩한 침실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와 몸을 반쯤 그에게 돌렸다. 그는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깐의 정적을 느낀 루시아는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그가 순식간에 다가와서 그대로 루시아를 침대로 밀어 덮치며 입술이 달려들었다. 단번에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침입한 살덩이가 격하게 입안을 탐했다. 그의 손이 뒷목을 받치며 키스가 더 깊어졌다.

루시아는 눈을 꼭 감고 입안을 샅샅이 애무하는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짜릿하게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덮쳤다. 간신히 그 호흡을 따라가며 루시아는 입술이 아닌 온몸이 그에게 먹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즈음에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몽롱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루시아는 중얼거렸다.

“환불…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가 웃었다. 몸 위로 그의 무게가 더해졌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뭐가요?”

“이런 거 없어도 난 당신에게 미쳐있어.”

그러니까 이 이상 더 미치게 하지 마, 그는 낮고 위험한 음성으로 속삭이면서 루시아의 목에 입술을 붙였다. 그가 입을 맞추고 빨아들이자 따끔했다. 살짝 신음을 흘리자 혀로 살살 핥는다.

덫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짐승에게 목을 물린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바싹 민감하게 곤두서서 그가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져서 끙끙거렸다.

‘이상해…….’

남자를 유혹하고 흥분하게 하는 속옷이라는데 오히려 그녀가 흥분하고 있었다. 보통 때보다 민감해진 몸이 아프고 숨이 차고 눈에서 열이 났다.

루시아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입은 속옷에는 일종의 최음 효과가 있는 향유가 살짝 발려져 있었다. 미약하지만 피부로 약재가 흡수되었다. 앙뜨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은 게 아니라 이런 속옷에는 당연히 포함된 기능이라서 굳이 확인해 주지 않았을 뿐인데 루시아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속이 다 비치는 레이스로 감추어진 그녀의 젖가슴을 깨물어 입을 맞추던 휴고는 미묘한 맛으로 금세 뭔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만, 어지간한 독도 안 듣는 그에게 이런 최음제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서 이걸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웃음을 삼켰다.

쇄골을 따라 목덜미를 핥아 올리자 그녀가 파드득 놀라며 흐느꼈다. 확실히 평소보다 무척 민감했다. 그녀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공평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는 그녀라는 최음제 자체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는 레이스 위로 볼록 솟아난 유두 끝을 물었다. 살짝 힘을 가하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아예 입안에 삼켜 빨아들이자 그녀는 울면서 신음을 흘렸다.

이런이런. 거의 장난 수준으로 약하게 묻어있는 미약에 그녀는 완전히 취한 것 같았다. 이 속옷에 대해 알려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어서 고개도 들지 못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자 즐거워졌다.

모른 척해줄까, 조금 놀려줄까. 그는 속으로 키득거리면서 입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탐하느라 바쁘고, 손으로는 계속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쓸었다. 펄떡이는 잉어처럼 반응하는 그녀를 보며 그도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타액으로 그녀의 가슴 부근의 레이스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역시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레이스 앞섶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겨 부욱 찢어냈다. 출렁 흔들리며 드러나는 유실을 다시 삼켰다.

“흑……. 으읏.”

그가 가슴을 혀로 굴리고 입술로 빨아들일 때마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했다. 입을 열면 마구 비명을 질러댈 것 같아서 루시아는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손을 대는 곳마다 아플 정도로 전기가 올랐다.

그가 입을 막고 있는 루시아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더니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해서 키스했다. 뜨겁게 입안을 헤집는 그의 키스에 루시아는 눈앞이 흐려져서 눈을 감았다. 능란한 그의 혀의 움직임은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휴고는 부풀어 오른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면서 입술을 떼고는 목 뒤에 깊숙이 입을 맞췄다.

뭔가가 부족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 안쪽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욱신거렸다. 루시아는 저절로 몸이 꼬여서 두 다리를 오므려 맞닿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열기를 가라앉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작게 혀를 차고 그녀의 다시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비집어 넣었다.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음부에 밀착해 닿았다.

“알고 있어?”

그가 귀를 깨물며 속삭였다.

“당신이 입은 속옷, 아래가 열려있다는 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루시아의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본래의 기능에 전혀 충실하지 못한 속옷이었다.

그래서 지금 속옷을 벗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은밀한 곳은 그의 허벅지에 바로 닿아있었다. 그의 허벅지가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이며 갈라진 틈새에 마찰하기 시작했다.

“흐윽!”

그 정도 자극으로 루시아의 허리가 튕겨 올라갔다.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허벅지가 다시 움직였다.

“흑……. 아! 아아! 아앙!”

그는 마치 그녀의 속살에 중심을 박아 넣어 허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그곳에 맞닿은 허벅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마찰에서 오는 자극을 느낀 그녀의 샘에서는 물이 흘러 그의 허벅지를 적시고 닿는 부분이 미끈거리게 했다.

“아!!”

눈앞이 번쩍하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허리가 솟아올랐다가 털썩 떨어졌다. 짧고 강렬한 절정에 루시아는 순간적인 탈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뜨거운 뭔가가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의 것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크고 단단한 살기둥이 숨 막히도록 치닫고 들어와서 안을 마구 휘저어주기를 갈망했다. 루시아는 탁한 호흡을 내쉬며 입술을 핥았다.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가 이상해 진 것 같았다.

휴고는 상체를 들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당신이 해봐.”

에……?

루시아는 커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베개에 등을 대고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그의 붉은 눈을 멍하니 보고 있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짓했다.

“이리로 올라와.”

루시아는 시선을 천천히 내리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하게 우뚝 선 그의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짓궂은 그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다시 슬그머니 그의 곤두선 성기로 시선을 돌리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이리 오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움직여야지. 넣고 싶잖아. 그렇지?”

음탕한 말을 하는 그를 흘겨보았다. 무의식중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걸 사나울 정도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느끼며 루시아는 그를 향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당장 달려들 것처럼 들썩이는 그를 향해 루시아는 말했다.

“움직이지 마요.”

그가 움찔 굳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더더욱 요사스럽게 웃었다.

“움직이면 안 돼요.”

루시아는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과시하는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성기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단히 기립한 그의 것은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니 소름이 돋고 다리 안쪽이 따갑게 죄어들었다.

두 손을 뻗어 그의 것을 잡았다. 그가 순간 흠칫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숙여 뭉툭한 끝에 입술을 댔다.

“읏…….”

그의 신음을 듣자 루시아는 희열을 느꼈다. 입에 닿는 그의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수컷냄새에 어지러웠다. 작은 입을 벌리고 뭉툭한 끝을 삼켰다. 약간의 비릿한 맛이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깊게 입안으로 삼켜서 혀를 굴렸다.

“후우…….”

그는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쥐었다. 뜨겁고 촉촉한 그녀의 입안 감촉이 주는 쾌감에 잠겨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자극적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사탕을 삼키는 것처럼 심취해서 그의 성기를 입에 무는 그녀는 아찔하게 야했다.

“…그만.”

그가 루시아의 팔을 잡아 품으로 휙 잡아당겼다. 단번에 끌려간 루시아는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맨가슴에 두 손을 짚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불꽃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하지만 무표정도 아니었다. 루시아는 이런 얼굴을 한 그를 보는 게 좋았다. 욕망 가득한 그의 눈빛은 그녀를 흥분시켰다.

루시아는 허리를 감아오는 그의 팔을 잡아 떼어냈다. 불만스럽게 찌푸리는 그의 미간 주름을 손가락으로 눌러 풀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루시아는 손바닥으로 단단한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는 온몸이 다 잔 근육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나체를 볼 때마다 남자의 몸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그의 목 안쪽에 들이밀어 키스했다. 그가 자신에게 해주던 것처럼 목을 타고 어깨와 가슴까지 천천히 입술을 비비고 혀로 간질였다. 손으로는 탄탄한 그의 피부를 즐기며 쓰다듬었다.

“…아직도 움직이면 안 돼?”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루시아는 안 된다는 뜻으로 으응으응 웅얼거리며 거부했다. 루시아는 그를 애무하는데 심취해 있었다. 그의 가슴에 도드라진 돌기를 삼켜 빨아들이자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재미있으면서 그의 반응에 흥분도 되었다. 평소 그가 왜 그렇게 자신의 온몸을 물고 핥는지 어쩐지 이해가 갔다.

강한 힘이 갑자기 그녀의 턱을 잡더니 그대로 입술이 겹쳐왔다. 그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에 달한 것이다.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가 격하게 루시아의 입안을 더듬었다.

“응……. 흐읏.”

루시아는 눈을 꼭 감고 그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그의 손이 루시아의 엉덩이를 움켜잡아 몸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그녀의 샘에 단단히 일어선 자신을 맞추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내렸다.

“하악!”

“큭…….”

두 사람의 입에서 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그는 뿌리 끝까지 파고들어 두 사람은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완전히 그의 것을 다 삼키고 루시아는 할딱이면서 이어질 그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그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달뜨게 숨을 쉬며 그를 보았다. 이글거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괜히 애를 태우는 그가 얄미웠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호흡이 순간 흐트러졌다. 그게 짜릿해서 루시아는 그를 보면서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였다.

조금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가 앉으면서 앞으로 몸을 밀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어쩐지 재미있어서 루시아는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를 자극하는 재미였다가 점점 자신이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가 움직일 때만큼 만족스러운 자극이 오지 않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만족점을 찾으려 열심히 움직였다.

휴고는 낑낑대며 열심히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점점 목이 탔다. 입술을 꼭 깨물고 살짝 인상을 쓴 채 꼬물꼬물 움직이는 그녀는 음탕하고 귀여웠다. 나름 적극적으로 한다고 하긴 하는데 겁이 나는지 과감해지지 못하고 입구에서만 갉작거렸다.

그녀 안에 들어가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긴 하지만 더 강한 자극을 몸이 갈구하고 있었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그녀 허리를 잡으며 그대로 허리를 쳐올렸다.

“아!”

단번에 자극이 되었는지 그의 것을 붙든 안쪽 살이 꽉 물었다. 그는 연속해서 허리를 쳐올렸다. 그녀는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허리가 뒤로 꺾였다. 그는 아예 그녀를 뒤로 눕히면서 강하게 박아 넣었다. 허벅지를 잡고 그녀 몸을 거의 반을 접을 것처럼 눌러 강하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윽! 아!”

날카로운 교성이 계속 터졌다. 아플 정도로 그의 것을 죄는 쫀득한 그녀의 내부는 끊임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아아아!!”

“욱…….”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를 물어뜯는 내벽의 자극에 그는 파정해 버렸다.

그는 욕설을 삼켰다. 뒷목이 서늘할 정도로 쾌감을 느끼긴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는데. 그는 늘어진 그녀를 잡아 일으켜 끌어안았다. 서로 마주 보며 안은 자세로 그녀의 눈과 입술과 귀와 목, 모든 곳에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여전히 그녀 안에 묻고 있는 성기가 다시 힘을 받아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중심이 부피를 늘리며 안을 꽉 채우는 압박을 느끼는지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아직 밤은 길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루시아는 눈을 뜨고 나서, 어쩐지 평소보다 침실이 낯설다 생각했고, 그 후에는 여기가 그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벽난로를 태웠는지 어젯밤과 달리 내부가 훈훈했다.

그녀는 이불 속에 푹 파묻혀 눈만 깜빡거리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어젯밤은 정말 기록을 세운 것 같다. 해가 어스름하게 뜰 무렵에 잠든 것 같으니까. 각성제라도 먹은 것처럼 루시아는 평소와 달리 잠이 그렇게 쉽게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녀를 도통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시아는 깨달았다. 그동안은 그녀가 잠들어 버려서 그도 그만두었다는 것을.

이불이 흘러내리자 찬 공기가 몸에 닿았다. 알몸이었다. 속옷은 어디 갔지, 생각하다가 어제의 그 속옷을 떠올리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가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문제의 속옷을 발견했다. 집어 들어 확인하는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완전히 넝마가 되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여며 몸을 가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완벽히 차려입고 있었다.

루시아는 순간 투시 능력이라도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셔츠로 가렸으나 그 안에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넓은 가슴이 보였다. 그녀를 가득 채우며 움직일 때 시선에 잡히던 그의 가슴을 따라 흘러내리던 땀이 갑자기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는 그를 도무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 아직 안 나가셨어요?”

“곧 나가.”

그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스윽 손을 넣어 뭔가 들어 올렸고, 그의 손가락에 매달린 넝마 조각을 보며 루시아는 악!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시선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루시아를 보며 피식 웃은 그는 그걸 다시 내려놓았다.

“…그걸 그렇게 다 찢으면 어떡해요. 그게 얼마짜린데…….”

“흠. 그럼 이걸 또 입을 생각이었어?”

“에? 아… 아니. 그런 건. 아니 그러니까.”

당황해서 횡설수설 어쩔 줄 모르는 그녀가 예뻐서 휴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음……. 어제……. 괜찮았어요?”

“뭐가 알고 싶어.”

“그러니까……. 음……. 평소보다 더 좋았다든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어땠는데? 평소보다 좋았어?”

“아……. 좀… 창피했어요.”

그냥 평소가 좋아요, 루시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얀 볼에 꽃물이 든 것처럼 발그스레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다시 한 번 루시아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조금 전보다 조금 길지만 여전히 가벼운 키스였다.

“말했지만 저런 것 없어도 난 충분히 당신에게 미쳐있고.”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받치고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아랫입술을 길게 빨았다.

“몰랐던 것 같으니 말해 두는데 속옷에 미약이 묻어있어. 아무래도 당신은 약에 민감 체질인 것 같으니까 더는 입지 마.”

“미약이요?”

루시아의 눈이 커지며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유난히 예민했던 감각과 좀처럼 잠들지 못했던 어젯밤 상태를 떠올리자 납득이 되었다. 절대 반품된 적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앙뜨의 얼굴도 떠올랐다.

“…근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맛으로. 어지간한 독을 감별할 수 있도록 훈련해서 이상한 맛이 나면 알거든.”

루시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망측한 속옷을 입고 미약에 취해 남편에게 달려든 꼴이 되었다.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보면서 그는 쿡쿡 웃었다.

“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군.”

“네?”

“당신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그런 거잖아. 내가 말했지. 그런 여자들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루시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여자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데요. 당신 부인도 그렇게 고상한 여자는 아니에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심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심하라니. 뭘.”

“…권태기요.”

“…나 참.”

휴고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권태기?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이 올 수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겠다. 어제보다 오늘, 아마도 오늘보다는 내일, 그녀를 향한 그의 심장은 갈수록 뜨거웠다. 그 열기가 그마저도 다 집어삼킬까 봐 겁날 정도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권태기가 온 것 같아? 나한테 질렸어?”

루시아는 그를 빤히 보았다. 왠지 주로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질문인 것 같은데.

루시아가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하자 그의 표정이 점점 험상궂게 변했다. 루시아는 그의 변하는 안색을 보자 장난기가 치솟아서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는 척했다.

“음……. 그게…….”

“비비안!”

루시아는 웃음을 터트리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그의 표정이 덜 풀린 것 같아서 그녀는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해요.”

그가 대답처럼 그녀의 뒷목을 받치고 작은 입술을 삼켰다. 그가 혀가 깊이 들어와 여린 살을 쓸었다. 길고 끈적이는 키스가 끝나고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질 때 둘 다 낮게 한숨을 흘렸다.

“…한 번만 하자.”

“네?”

휴고는 훌떡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몸을 단번에 뒤집었다.

“나… 나가신다면서요!”

“그러니까 왜 도발을 해.”

“언제……. 꺄악!”

그가 발목을 확 잡아당기자 그대로 죽 아래로 끌려갔다. 침대 바깥으로 다리가 내려오고 상체만 엎드린 채 그에게 허리가 잡혀 엉덩이가 들렸다. 등 뒤에서 단번에 묵직하게 들어오자 루시아는 헉 비명을 질렀다. 숨을 제대로 쉴 틈도 없었다. 빠져나간 그는 다시 끝까지 파고들었다.

“윽……. 흣. 자… 잠깐…….”

그는 그녀의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몇 번이고 질벽을 두드렸다. 밤새 그를 받아들이느라 도톰하게 부풀어있는 꽃잎을 거칠게 헤집고 깊은 곳까지 건드렸다. 민감한 속살이 단단히 성난 그의 기둥에 마구 쓸렸다.

아팠다. 동시에 눈앞이 아찔하게 점멸했다. 그녀의 온몸을 애무하며 달래주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오직 교접만이 목적이라는 것처럼 그는 그것에만 집중했다.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에 부딪힐 때마다 그녀의 온몸이 흔들렸다.

“흑! 좀 천천…….”

그녀는 한 손을 뒤로 뻗어 그의 허벅지를 잡아 밀어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어떤 행동도, 말도, 사정없이 박아 넣는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음란한 몸은 빠르게 물을 흘려 마치 더 깊이 들어오라는 것처럼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타고 뜨거운 불이 들이닥쳤다.

등 뒤에서 그는 숨소리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녀를 정신없이 몰아댔다. 단단한 기둥이 치닫고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깊이 들어온 그의 성기는 예민한 안쪽을 찌르고 경련하는 질벽을 할퀴면서 빠져나갔다.

“아! 아악!”

루시아는 정말 죽을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강한 자극이 그녀의 온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더는 정말 못 견디겠다고 생각할 무렵에, 다행스럽게도 그는 끈질긴 평소와 달리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며 파정했다. 강하게 안을 파고드는 힘과 동시에 느껴지는 뒷목의 아릿한 통증, 그리고 몸 안에 퍼지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루시아는 기절할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몇 번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자신을 빼냈다.

루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간혹 그가 거칠게 굴 때가 있었으나 이렇게 야만스러운 짐승의 교접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녀올게.”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나가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 꽤 오랫동안 루시아는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멍하게 누워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겨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본능에 가까운 정사였다.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녀가 모르는 그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두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슴이 뛰는 이유가, 내 남자의 로맨틱한 매력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색욕에 가까워서 그녀는 몹시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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