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72화 (73/77)

외전 3장 Happily ever after (2)

공작 전하를 위한 부토니에의 디자인입니다. 첨부한 디자인 도안이 흡족하시다면 부디 저희 보석상에 의뢰해 주시기 바랍니다.

첨부된 도안의 디자인은 사자 머리를 형상화하고 두 개의 붉은 보석으로 눈을 표현했다. 편지 내용대로 타란 가문을 형상화한 타란 공작을 위한 디자인이었다.

루시아의 심장이 쿵쿵 뛰면서 눈에 익은 부토니에 디자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꿈속 기억을 떠올렸다.

정신이 이상한 노파와 반년을 살다가 노파의 장례를 치를 무렵에 루시아의 신분은 노파의 딸 루시가 되어있었다. 노파의 딸은 실종신고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사망 처리로 기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루시아는 노파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딸의 사망 처리 철회 신고를 했다. 동시에 딸의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변경을 요청했다. 루시와 루시아의 이름이 비슷한 덕분에 이름 변경은 쉽게 이루어졌다.

루시아는 병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핑계를 대고 검은색으로 염색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호박색 눈동자에 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루시아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신분 세탁에 성공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루시아는 평생 노파가 살던 그 외진 낡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추적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작은 공방의 직원으로 취직했다. 성실히 일하는 루시아를 눈여겨보았는지 반년 후에 공방의 나이 든 여주인이 말했다.

‘공방을 처분하고 동부로 이사 갈 계획인데. 모아둔 돈 있나? 원하면 공방을 넘길 생각이 있네.’

루시아는 오랜만에 메튼 백작가 비밀 공동의 통로로 이어지는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새벽 일찍 가서 사람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행히 숨겨진 보석함은 그대로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보석함의 내용물을 확인하다가 루시아는 처음 보는 장신구를 발견했다. 사자 머리 형상의 남성용 브로치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물건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다른 것들을 다 팔아서 처분했지만, 부토니에는 팔 수 없었다.

‘그것과 같은 디자인인가?’

도안뿐이라서 확신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도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의뢰 서신을 작성했다.

“마님. 아가씨의 손님들이 그만 귀가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얼마 남지 않은 서신들 정리는 잠시 미루고 루시아는 일어났다. 에반제린이 나이가 들어서 엄마의 품을 찾기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데 흥미를 느끼면서 루시아의 하루가 비교적 여유로웠다.

“제롬. 록시는 좀 어때요?”

루시아는 얼마 전에 한 살 생일이 지난 제롬 딸의 안부를 물었다. 어젯밤부터 갑자기 열이 올라서 밤새 의사가 몇 번을 다녀갔다.

“점심 무렵에 봤을 때는 열이 많이 내렸습니다.”

“점심때 보고 가보지 않았어요?”

대답하지 않는 제롬을 보며 루시아는 혀를 찼다. 결혼한 후에도 제롬의 고지식함은 여전했다. 멀지도 않았다. 바로 옆에 작은 별채가 제롬의 신혼집이었다. 루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롬이 연애해서 결혼한 사실이 신기했다.

제롬과 결혼한 올가는 원래 공작저에 새로 고용된 하녀였다. 그리고 루시아와 꿈속에서 인연이 있는 여자였다. 루시아가 공방을 운영했을 때 무척 싹싹하고 성실하게 일하던 직원이었다.

자꾸 그만두는 하녀 때문에 제롬은 수시로 고용 지원서를 받고 있었고, 잠깐 제롬의 업무실을 들렀다가 루시아는 지원서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루시아는 올가를 추천했다. 그리고 올가가 고용되고 약 1년 후 제롬과 올가가 나란히 와서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둘이 연애하는 줄 까맣게 몰랐던 루시아는 올가가 임신 중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가 고개를 푹 숙인 제롬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비어있는 별채를 싹 수리해서 두 사람의 살림집으로 내어주었다. 요즘 올가는 두 아이의 육아에 정신없이 바빠서 본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제롬. 올가가 아픈 아이까지 둘을 보살피느라 얼마나 힘들겠어요. 오늘은 그만 들어가봐요.”

“예, 마님.”

루시아는 딸의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서 응접실을 나왔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의젓하게 인사하는 에단 왕자와.

“오늘도 재미있게 놀다 갑니다. 내일 봬요.”

제 형 크리스 못지않게 넉살 좋은 개구쟁이 쥬드.

“편안한 배려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도도하고 새침한 어린 공주님 셀리나를 보며 루시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레이디 이브. 우리 내일도 만나서 같이 놀아요.”

“어머나. 레이디 셀리나. 먼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역시 우리는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교양 있는 숙녀들이니까요.”

귀부인 흉내를 내고 있지만, 두 소녀의 어린애 특유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고 나누는 대화도 어디서 주워들은 내용의 뜬금없는 흉내였다.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려서 어린 두 숙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요즘 두 소녀는 귀부인 놀이에 심취해서 기이한 말투를 사용해 이상한 대화를 나누었다.

에단이 누이동생을 향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제법 컸다. 셀리나가 매섭게 에단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훗 웃으면서 에반제린의 귓가에 큰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디 이브. 교양 있는 숙녀가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저런 바보예요.”

“뭐? 야! 셀리나!”

“저것 봐요. 얼마나 교양이 없나요.”

에단은 씩씩대다가 에반제린의 눈동자가 빤히 자신에게 와 닿자 꾹 참았다. 궁이었으면 얄미운 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을 것이다. 셀리나가 말문이 터진 이후에 에단은 누이를 절대 말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기분 상한 표정으로 퉁퉁 부어있는 에단을 보며 에반제린이 생긋 웃었다.

“레이디 셀리나. 에단 경은 바보가 아니에요. 교양 있는 레이디 셀리나의 오라버니잖아요. 레이디 셀리나의 오라버니가 그런 사람일 리가 없죠.”

멋쩍은 표정을 짓는 에단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심술 나게 하면 궁에 돌아가서 괴롭힐 오라버니 성격을 아는 셀리나는 풀어주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새침하게 대답했다.

“흥, 그건 그래요.”

“어. 나는. 나는?”

쥬드가 끼어들었다.

에반제린은 기대 가득한 눈을 하는 쥬드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쥬드는 착해. 좋은 사람이야.”

“헤헤. 그럼 이브. 나중에 나와 결혼해 줄래?”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에반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루시아와 주변의 고용인들까지 숨을 죽이고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련님 두 분께서 귀가하셨습니다.”

하녀가 들어와서 고하자 에반제린은 ‘오라버니다!’ 하고 소리치면서 환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숙녀 흉내를 내고 있던 셀리나도 질세라 뒤를 따라서 전력 질주했다.

“오라버니!”

마차에서 내려선 데미안은 자신을 향해 샛노란 금발을 나풀거리며 달려오는 소녀를 보며 웃었다. 있는 힘껏 부딪칠 것처럼 달려오는 누이를 두 팔로 안아 공중에 들어 올렸다가 한 번 꽉 끌어안고 내려주었다.

까르르 웃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데미안은 누이의 맑은 웃음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예쁜 오라버니!”

에반제린은 브루노 품에도 폭 안겨서 인사했다. 에반제린은 세 오라버니를 구별해서 불렀다. 데미안은 그냥 오라버니, 크리스는 쥬드의 형이라서 쥬드 오라버니, 그리고 브루노를 처음 봤을 때 에반제린은 소리쳤다.

‘예쁜 오라버니다!’

그리고 그 후 브루노의 이름은 예쁜 오라버니가 되었다. 브루노는 귀여운 누이의 머리를 쓸어주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이브. 우리 호칭 좀 바꾸면 안 될까? 그냥 오라버니라고 불러. 아니면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

“응, 예쁜 오라버니.”

“…….”

이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나이가 아닌데 분명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고개를 들고 씨익 웃는 소녀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브루노는 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에반제린처럼 달려와 안길 수 없는 셀리나는 몇 걸음 뒤에서 무척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셀리나에게도 공작가의 두 남매와 비슷한 나이 차이가 나는 오라버니가 있었지만, 별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이브의 오라버니가 누이동생을 애정이 듬뿍 담긴 따뜻한 눈으로 보며 안아주고 응석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면 무척 부러웠다.

무엇보다도 데미안은 셀리나의 오라버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고 근사하고. 부족한 소녀의 표현력으로는 다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인 왕자님이었다.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데미안이 인사를 건네자 셀리나가 쭈뼛쭈뼛 다가와 살짝 치맛자락을 들고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데미안 경. 레이디 이브. 그만 아쉬운 이별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군요.”

“레이디 셀리나. 이별은 정말 슬프군요. 우리 내일 봐요.”

데미안과 브루노가 기이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서 웃음을 참았다.

아이들을 태운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며 서있던 세 남매가 돌아섰다. 정원에서 놀던 여우 아샤가 어느새 주인이 온 것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데미안의 발치로 와서 몸을 비볐다.

데미안은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움직임이 예전만큼 재빠르지 못한 아샤를 안아 들었다. 주인이 목덜미를 만져주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아샤가 데미안의 품에서 눈을 감고 골골거렸다.

“아 참. 오라버니. 결혼이 뭐야?”

“결혼은……. 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만드는 것이란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해서 우리 이브도 태어날 수 있었지.”

“으응, 그렇구나. 그럼 내가 결혼하면 내 동생이 태어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이브.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쥬드가 결혼하자고 해. 해도 돼?”

“안 돼!”

데미안과 브루노가 동시에 소리쳤다.

* * *

생각보다 왕과의 대화가 길어졌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왕의 권유를 겨우 뿌리치고 휴고는 평소의 저녁 식사 시간보다 늦어서 귀가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휴고는 눈에 들어오는 아내에게 곧바로 다가갔다.

“늦으셨네요.”

“이브는?”

“자고 있어요.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고 한참을 뛰놀더니 피곤했나 봐요. 시장하시지요?”

허기가 지긴 하는데 어느 쪽 허기인지 모르겠다. 휴고는 일단 당장 급한 것부터 해결했다. 그녀의 허리를 감아 품으로 당기고 놀라 동그래지는 눈을 보면서 입술을 포갰다. 말랑한 입술을 쪽 빨아들이고 달큼한 숨을 들이마셨다. 훅 풍기는 그녀의 체취가 향긋하게 코를 간질였다. 언제나 그녀를 향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품 안에서 그녀가 강하게 바르작거리자 휴고는 다소 언짢았다. 아직 부족했다. 휴고는 격한 키스를 밀어붙였다. 그녀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두 손으로 아예 힘주어 밀어냈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은 팔이 그 정도 힘을 당해내지 못할 리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느슨하게 풀어주며 입술을 뗐다.

마주치는 호박색 눈동자가 파르르 화를 내는 표정이 귀여웠다. 이대로 들쳐 안고 침실로 들어갈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애들도 있는데 왜 이래요.”

루시아가 이를 악물고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던 휴고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는 두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들을 보자 맡긴 일이 떠올랐다.

“케이크는 받았어?”

루시아는 새치름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늦을 것 같다고 아들에게 케이크를 들려 집에 들여보내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낯부끄러운 광경을 보였다는 민망함 때문에 그에게 화가 났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받았어요.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여보.”

루시아는 그의 볼에 살짝 입맞춤했다. 휴고가 눈을 번뜩이며 다시 그녀의 입술로 달려들기 직전에 루시아의 손이 그의 입술을 덮고 그를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쳇, 그는 입안으로 투덜거리며 눈치 없는 방해꾼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너희는 심부름을 완수했으면 그걸로 되었지, 보고하려고 나와있을 필요 없다.”

“당신 마중하러 나온 거잖아요.”

“음? 뭐 하러. 다음부터는 나오지 마. 인사했으면 올라가봐라.”

보통은 세 사람이 함께 귀가하지만, 데미안과 브루노가 먼저 들어온 경우에는 어머니와 함께 귀가하는 휴고를 마중하는 일은 그동안 계속 해오던 일상이었다. 억지고 트집이었다. 루시아는 그가 키스를 방해받았다고 심술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가긴 어딜 가요. 애들 아직 저녁 안 먹었다고요.”

2층의 응접실로 식사를 올려서 아내와 단둘이 먹으려던 그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휴고가 인상을 썼다.

“아직 안 먹고 뭐 했어?”

“애들 보기 창피하게 정말. 어서 들어오세요.”

루시아는 재빨리 휴고의 팔을 잡아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휴고는 못 이긴 척 따라가면서 툴툴거렸다.

“다음부터는 먼저 먹게 해.”

“알았어요.”

두 분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두 청년의 표정이 아주 기묘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기가 막히기도 하고. 집에 돌아가서 오늘 회의 내용에 관한 보고를 듣겠다고 말한 분이 그런 건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하니?”

식당 안쪽에서 그들을 부르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갑니다.”

데미안과 브루노는 크게 대답하며 식당으로 걸어갔다.

항상 식사 시중을 맡아 하는 제롬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으나 눈으로는 살짝 찾는 남편을 보며 루시아가 말했다.

“집사는 제가 일찍 들어가 보라고 했어요. 아픈 아이가 걱정될 것 같아서요.”

“많이 심각한가? 의사는 불렀어?”

“아까 다녀갔어요. 의사 말로는 열이 많이 내려서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는군요. 아기 때는 참 이유를 알 수 없이 열이 오르는 것 같아요. 이브도 몇 번 그래서 사람 놀라게 했죠.”

“그래. 이브 죽는다고 당신이 울고불고 난리였지.”

루시아는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 생각해도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의사도 아닌 그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울며 소리쳤다. 그나마 그가 침착하게 휩쓸리지 않고 다독여 주어서 가까스로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셀리나 공주는 요즘도 자주 와?”

“거의 매일이죠. 이브와 아주 잘 지내요.”

“어머니. 공주님은 상관없지만, 쥬드와 에단 왕자님 출입은 이제 금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금하다니. 왜?”

“어릴 때처럼 어울려 놀 시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

“지나기는. 아직은 괜찮아.”

데미안은 어머니가 자신의 심각한 제안을 대충 들어 넘길 것 같아서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브에 관한 문제에서 아버지의 경직된 사고는 데미안보다 훨씬 더했다.

“아버지. 이브가 제게 쥬드와 결혼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혼을 받았다는군요.”

“뭐?”

건방진 꼬마 녀석이 어딜 감히!

휴고는 즉시 아내를 보며 음산한 기운을 뿜으면서 말했다.

“출입 금지야. 당장 내일부터.”

이럴 때 뭐라고 해봤자 들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루시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비로소 만족한 표정으로 식사에 집중하는 유별난 두 부자를 흘겨보며 루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폐하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찾으신 거예요?”

“얘기는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했지. 약혼하자더군. 셀리나 공주와 데미안.”

“네?”

루시아가 놀라 되묻는 소리와 동시에 데미안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접시 위에 떨어뜨려 쨍 소리를 냈다.

허둥대는 데미안을 흘끔 보는 루시아의 눈에 장난 섞인 웃음이 떠올랐다.

“왕비 마마도 일전에 슬쩍 그런 말씀을 하시긴 했어요.”

“그랬어? 충동적인 제안은 아닌 모양이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지참금은 체면만 차릴 정도면 된다고 하고. 데미안. 너만 좋다면 결혼시켜 주마.”

“아버지!”

데미안은 울상을 지었다. 셀리나 공주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이브보다 고작 한 살이 많았다. 10년 후에 꼬마들은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겠지만,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열여덟 살의 눈에 여덟 살이 배우자감으로 보이면 그건 솔직히 미친놈이었다.

브루노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어린 꼬마 공주님이 눈에 선했다.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쓰며 귀부인 놀이를 하는 어린 숙녀가 약혼자가 되어 데미안의 곁에 나란히 선 모습을 상상하자 폭소가 터질 것 같았다. 포크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내려놓고 물 잔을 집었다.

“말이 안 됩니다. 셀리나 공주님의 나이를 생각하세요.”

데미안의 반발을 휴고는 무심한 눈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누가 지금 하라고 했느냐? 약혼만 하고 공주가 나이가 차면 하자는 거지.”

루시아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안 그래도 아까 데미안이 들어오는 길에 환궁하려던 공주님과 마주쳤거든요. 새삼스레 둘이 따로 선보일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겠네요.”

“어머니!”

붉으락푸르락하던 데미안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자식은 부모가 정해주는 혼처를 따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풍조였다. 공작가와 왕실의 결합은 누가 봐도 완벽한 정략혼이었다.

데미안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자 소리 없이 히죽거리고 있던 브루노의 표정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브루노는 데미안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싫다고 하면 될 것을. 바보 녀석.’

브루노가 아는 데미안은 절대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학술원의 시타 자리에서 일을 처리하던 모습을 보면 꽉 막힌 녀석은 절대 아닌데 부모 앞에서는 대단히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제 속이 다 문드러진다고 해도 부모가 원하면 셀리나 공주와의 결혼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일이라도 두말없이 따를 것이다.

‘아들 싫다는 일을 욕심으로 밀어붙일 두 분이 아닌데 말이지.’

친구 녀석의 연애사를 공개라도 해야 하나. 브루노가 친구를 수렁에서 건져줄 생각으로 끼어들려는 참에 루시아가 선수를 쳤다.

“데미안. 네가 너무 심각해서 더는 놀리지 못하겠다.”

루시아가 침울한 아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네가 싫다는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물며 결혼 같은 네 인생이 걸린 일을 어떻게 우리가 결정하겠니.”

데미안이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구원자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데미안의 표정이 귀여워서 루시아는 웃음을 흘렸다. 다 큰 아들의 모습에 아직 어릴 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루시아는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제왕의 자리를 놓지 않고 있는 흑사자와, 이제 새끼는 벗어났으나 아직 더 자라야 하는 어린 흑사자를 번갈아 보며 행복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는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실 거야. 그렇지요? 당신은 원래 왕실과 혼사는 내키지 않아 하셨잖아요.”

휴고는 제 어머니에게 살랑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데미안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아내는 아들에게 지나치게 오냐오냐했다. 부모가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그러나 휴고는 자신의 내심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관대하게 포장했다.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폐하께는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그 자리에서 딱 자를 이야기는 아니라서 유예했어. 공주가 사교계 데뷔하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저 녀석한테 여자가 없으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그런 약속을 하시면 어떡해요.”

“데미안. 7년 안에 여자 만들 자신이 없느냐?”

“…….”

데미안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휴고는 아들이 시치미를 떼고 의뭉스레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다. 학술원에 심어둔 자들에게서 받은 보고로 아들에게 이미 여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문제가 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루시아는 아들의 역성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왜 데미안하고만 약혼 말이 오가는 걸까요? 우리 이브는 어때서요. 짝지어줄 왕자님이 셋이나 있잖아요.”

“어림없어.”

“어머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이른 말씀입니다, 어머니.”

거의 동시에 정색하며 같은 말을 쏟아내는 세 남자를 보면서 루시아는 기가 막혀 웃었다. 공작가에는 에반제린과 관련된 문제에는 바보가 되는 남자가 셋이나 있었다.

식사가 끝날 즈음 파비안이 공작저를 방문했다. 주인 내외분과 도련님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별채의 제롬 부부와 조카들을 만나고 왔다.

파비안은 제롬이 결혼하고 나서 뭔가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롬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결혼 생각은커녕 저택 살림에만 바쁘게 빠져 지내는 모습을 보며 걱정했다.

이제는 번듯하게 가정을 꾸린 가장이 되어 행복해 보이는 제롬을 보면 기쁘면서 동시에 부러웠다.

‘복 많은 자식.’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어린 여자에게 늦장가를 간 것도 부러운데 제수씨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파비안이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풀어보라고 끈질기게 캐묻자 올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제가 반해서 쫓아다녔어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녀석의 어떤 점을 보고?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애를 둘 낳고도 서로 수줍어하는 제롬 부부를 더 지켜보다가는 온몸이 근질거릴 것 같아서 서둘러 본채로 왔다.

휴고는 데미안과 브루노에게 오늘 참관한 회의 관련한 보고 및 토론은 내일로 미루자고 말하고 파비안과 집무실로 들어갔다. 파비안은 보고서를 올린 후 가장 핵심적인 내용부터 구두 보고했다.

“필립의 사망 소식입니다.”

보고서를 막 펴려던 휴고가 멈칫했다. 보고서 첫 장에 첨부한 검시관의 사망증명서를 한참을 보았다.

‘질긴 늙은이.’

7년 전 휴고는 필립의 혀를 뽑고 발목 힘줄을 끊어 북부로 끌고 가서 지하 감옥에 처넣으라고 명했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흉악한 죄인들의 치료를 담당하게 했다. 가끔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묵묵히 죄수의 치료에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있어서 그 험한 지하 감옥에서 얼마나 버틸까 했는데 무려 7년을 버티고 죽었다.

필립의 기록물을 뒤져서 타란 혈족을 잇기 위한 여자들을 만든 양성소도 찾아냈다. 무려 수도에 있었다. 보육원으로 위장한 곳으로, 삼엽쑥을 먹인 소녀들을 특수한 병에 걸린 것처럼 격리해서 보살폈다.

휴고는 소녀들을 다 죽이려다가 태어날 딸을 생각해서 참았다. 딸의 탄생을 피가 흐르는 원망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몸이 되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그리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치료약을 먹여서 월경이 시작되고 정상의 몸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 풀어주었다. 그 작업은 시간이 꽤 걸려서 몇 년 전에 마무리되었다.

“죄수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지?”

“가족이 수습하지 않으면 부패하기 쉬운 여름에는 매일, 겨울에는 며칠에 한 번. 시체를 한 번에 화장합니다.”

필립의 장례를 치를 가족은 없었다. 이대로는 다른 죄수 시체들과 뒤섞여 한꺼번에 화장되어 온전한 뼛조각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주치의 가문의 가족묘가 있다. 거기 안치하도록 조치해라. 장례식까지 따로 챙길 필요는 없다.”

“예, 전하.”

필립에 대한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죽었다고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놈은 헛된 미명에 사로잡혀서 뒤에서 일을 꾸미고 주인을 겁박했다. 산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다.

필립의 기록물을 통해서 필립이 자신의 침실에 여자를 넣은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 휴고가 필립을 살려둔 이유는 짧은 죽음의 고통보다 살아서 더 긴 고통을 받기를 바라는 비정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형제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죽은 형제를 닮은 데미안을 휴고에게 데려다 주었다. 삿된 음모로 꾸민 일의 결과이기는 해도 덕분에 딸 에반제린을 얻을 수 있었다.

필립이 한 짓의 결과가 모두 나쁘지는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필립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필립 또한 자기 가문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한 희생자였다.

‘변하기는 변했군.’

오래전 필립이 휴고에게 했던 말대로 휴고는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죽어 마땅한 죄수 따위에게 측은한 마음을 품게 되다니. 옛날의 그였으면 시체도 끌어내서 토막 내어 개돼지의 먹이로 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휴고는 이렇게 자신의 변화를 느끼면 기분이 좋았다. 죽은 형제의 흉내를 내는 가짜 휴고가 아니라 진짜 자신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필립의 죽음으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가문의 비밀을 아는 외부인은 남지 않았다. 홀가분하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기분이 오묘했다. 여전히 묵직하게 얹어진 무게는 덜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벗어나고 싶은 끔찍한 무게가 아니라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었다.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떠나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타란 가문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문을 버린다는 선택지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가문이 가족을 지킬 것이고, 그래서 휴고는 가문을 지킬 것이다.

필립의 죽음은 휴고가 죽은 형제의 그림자에 갇혀있던 자신을 해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휴고는 이제 히우와 휴고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용병의 노예로 살았던 어린 히우와 북부의 주인 휴고 타란은 모두 그 자신이었다.

“북부에서 온 다른 소식은 크로틴 경에 관한 일입니다.”

휴고의 눈에 얼핏 짜증이 어렸다. 도대체 어디 숨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지, 그놈을 찾으려고 들인 인력과 시간이 말도 못 한다. 얼마 전에는 아예 기사들에게 놈을 찾으면 죄수처럼 묶어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2년 전 라미스 공작이 타계하고 아들 로빈이 뒤를 이어 작위를 승계했다. 그리고 1년 전에 휴고는 왕, 새로운 라미스 공작과 협상해서 로이의 복권을 추진해서 결실을 보았다.

로이는 더는 극악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이미 사형수로 죽은 몸이라서 수도에서 활약하기는 곤란해도 북부에서는 얼마든지 기사단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로이의 행방이었다. 사형수로 위장해서 북부로 간 얼마 후에 야만족 땅으로 들어가더라는 목격자 증언을 마지막으로 로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곧 돌아오겠지 생각했으나 로이가 거의 1년 가까이 소식이 없자 기사들이 야만족 땅에 들어가서 로이를 찾아 뒤졌다. 그때 수색대에 참여한 딘이 수색 며칠 만에 로이를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아. 여기가 편해. 내가 어디 가서 쉽게 죽을 놈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 걱정하지 말고 찾지 마.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니까.’

휴고도 그 소식을 듣고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고삐를 맬 수 없는 야생마 같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1년 전 로이가 복권되어 그만 불러오라고 명령했으나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야만족의 땅은 매우 넓었다. 그렇다고 로이를 찾기 위해 엄청난 수의 수색대를 꾸릴 수는 없는 일이라서 소수의 수색대만 꾸준히 로이를 찾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었다.

“녀석을 찾았나?”

끌고 오면 놈을 우선 두들겨놓고 대화를 시작하겠다고 휴고는 이를 갈았다.

“찾았다기보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파비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웬 소년이 기사들 앞에 나타나서 크로틴 경의 서신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서신 내용에 따르면 소년은 크로틴 경의 아들입니다. 보고서 뒤에 있습니다.”

휴고는 즉시 보고서 뒤를 폈다.

주군. 내가 진 빚은 아들놈이 갚는대요. 기사가 되고 싶다니까 가르쳐서 쓸모 있으면 자리 하나 주고, 아니면 쫓아내도 되고요. 근데 그 녀석 내가 잘 가르쳐서 어려도 제법 칼질합니다. 요즘 나 찾으려고 들쑤시고 다니더라고요? 나중에 내키면 주군 보러 갈게요. 지금은 이대로 살랍니다.

“아들?”

휴고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옛날부터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정말 제대로 뒤통수였다.

“이름은 칼리. 올해 여덟 살입니다.”

“여덟 살?”

휴고는 없던 두통이 생길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들이라며 보낸 아이가 여덟 살이면 북부로 보낸 지 몇 개월 만에 사고 치고 애를 낳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이 모친이 야만족인 것 같다고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휴고가 알기로 로이는 야만족을 같은 종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냥감이었다.

덧붙여 로이는 여자와 아이는 잘 죽이지 않았지만, 기사도 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강한 사냥감을 노려야 진정한 사냥꾼이라고 생각하는 순수한 미친놈이었다.

여자를 죽일 일이 있어도 그냥 죽이고 말지 욕구 해소 대상으로 푸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로이가 야만족 여자와 애를 만들었다고 한다. 놀랍기 이전에 믿기지가 않았다.

“로이의 자식이 확실한 건가?”

“헤바 경 말로는… 아주 닮았답니다.”

휴고는 로이의 편지 앞쪽으로 보고서를 넘겨보다가 딘이 올린 첨부 문서를 발견했다. 딘의 보고서를 읽는 휴고의 표정이 점차 삐딱해졌다.

딘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이의 어린 아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결론은 기사단의 이름을 드높일 가능성이 충분한 아주 훌륭한 인재이므로 책임지고 훈련시켜서 기사로 육성하겠다는 말이었다.

‘딘이 맡아서 어려서부터 가르치면 제 아비처럼 제멋대로는 되지 않겠군. 로이 아들놈이면 재능은 있겠지.’

딘의 말대로 실력이 좋으면 나중에 수도로 불러올려도 될 것 같다. 에반제린이 자라서 사교계에 데뷔하면 실력 좋은 호위 기사가 필요한데 마침 잘되었다.

“로이 찾는 수색대는 철수하고 로이 아들이라는 꼬마는 딘보고 맡아 가르치라고 해라.”

“예, 전하.”

그 뒤는 소소한 보고였다.

* * *

한숨도 못 자고 며칠에 걸쳐 말을 달려 로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든 상황은 끝이 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암 내성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감싼 음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중을 나온 자들이 지극한 공경의 예를 취했다. 소공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새 주인을 맞는 모습이었다.

그는 말에서 천천히 내렸다. 두 발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뭐라고 하는데 들리지 않았다.

“…어딨어?”

“예? 두 분 시신은 안에…….”

“그거 말고!”

“서… 서쪽 탑에…….”

“다… 물러가. 부를 때까지 오지 마. 눈에 띄면 전부 멱을 따버릴 테니까.”

차분하게 시작한 나지막한 음성은 피 냄새를 물씬 풍기며 마무리되었다. 우물쭈물하며 움직이지 않는 자들을 사납게 노려보며 짙은 살기를 뿌렸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생명의 목을 다 물어뜯어 참살하고 싶은 욕구를 한계까지 참는 중이었다.

주저앉은 몇 명의 심약한 자들을 다른 자들이 부축하며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흩어졌다. 그들을 차가운 붉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서쪽 탑으로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 탑 꼭대기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훅 피비린내가 풍겼다. 역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돌바닥에 스며들어 변색한 시커먼 핏자국이 커다란 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가신들은 공작 부부를 시해한 범인이 도련님을 빼닮은 사실에 경악해서 차마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했다. 고작 나무 관 하나를 가져다가 시체를 넣어두었을 뿐이었다.

그는 터벅터벅 나무 관 곁으로 다가갔다. 뚜껑이 닫힌 관을 보면서 그는 마치 달음박질이라도 친 것처럼 가쁘게 호흡했다. 천천히 몸을 숙여 무릎을 바닥에 대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옆으로 밀어서 열었다.

절대 산 사람으로 볼 수 없는 회색빛 안색의 앳된 청년이 눈을 감고 있었다. 갈라진 목의 상처가 벌어진 채 말라붙은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대조적으로 죽은 자의 표정은 평온했다.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자신을 똑 닮은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극단적인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은 분노와 비통함이 왈칵 쏟아졌다.

“으아아아아아!!”

휴고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그를 재빠르게 현실로 끌어올렸다.

꿈. 휴고는 탄식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며 그는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망할 자식.’

그날 그렇게 가버리고 처음 꿈에 나타난 모습이 제 마지막 모습이라니. 휴고는 입안으로 녀석을 향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 뒤로 둘러서 안고 있던 팔을 뺐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 없이 앉아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휴고가 침실을 나가고 꽤 시간이 흘렀다. 새벽이 오기 직전 가장 깊은 어둠에 세상이 잠겼다.

루시아는 잠결에 그의 체온에 닿고 싶어서 몸을 뒤척였으나 썰렁한 기운만 감도는 빈자리만 느꼈다. 반쯤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까 옆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기상 시간이 아무리 일러도 이런 한밤중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그를 찾아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응접실로 이어지는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서 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었다. 테이블 위에 마개가 열린 와인병 서너 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는 이런 새벽에 혼자 몇 병의 술을 마실 정도로 애주가가 아니었다. 남편을 찾다가 창가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덜컹했다. 창으로 비치는 달빛 아래 서있는 그가 낯설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근원적으로는 별개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자 어쩐지 외로웠다.

무슨 일일까. 어쩌면 그가 종종 이렇게 혼자 삭히는 모습을 루시아가 보지 못해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를 위로해 줘도 되는 걸까.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 망설이며 그녀는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문고리만 붙든 채 서있었다. 못 본 척 몸을 돌려 침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휴.’

속으로 불렀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엷게 웃으며 루시아를 향해 이리 오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그를 향해서 달리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두 팔을 그의 등에 두르고 고개를 가슴에 푹 파묻었다. 그의 팔이 안정적으로 루시아의 허리를 감았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어주면서 고개를 드는 그녀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당신이 없어서 허전해서 깼어요. 당신이야말로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그러게. 이런 적이 없었는데.”

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꿈 같은 것은 꿔본 적이 없었다. 자는 동안 꾸었을지 몰라도 아침에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했다. 꿈자리가 사나워서 자다가 깨어나 심란한 마음에 다시 잠을 청하지 못하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꿈은 꿈일 뿐이에요, 휴. 당신에게는 펜던트가 없잖아요.”

휴고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쿡쿡 웃었다.

“당신 꿈에서 당신 공방을 날리게 한 그놈. 누군지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메튼 백작을 제대로 손봐주지 못하고 쉽게 처리한 일이 두고두고 분했다. 그래서 그 원한을 또 다른 놈에게 분풀이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절대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지금은 착실히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없는 죄를 씌우고 싶지 않아요.”

“착실하지 않을 거야. 장담하건대 사람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래도 당신이 아실 필요는 없어요.”

“메튼 백작에 대해서는 말해 줬잖아.”

“메튼 백작을 밝히지 않고서는 얘기가 제대로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었죠. 이 얘기는 그만해요. 절대 말 안 해요.”

“고집쟁이.”

휴고는 그녀를 휙 안아 들고 소파로 성큼 걸어가서 풀썩 앉았다. 무릎에 그녀를 앉히고 부드러운 몸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향을 맡으면서 휴고는 가라앉았던 기분이 점점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가 말해 주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필립이 죽었어.”

“…마음이 복잡하시겠네요.”

“당신 말대로야. 왜 홀가분하지 않을까.”

“필립이 당신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으니까요.”

루시아는 에반제린을 낳고 꽤 시간이 지나서 필립이 했던 일들의 전모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당시에 얼마나 남편이 힘들었는지 뒤늦게 알고 마음이 아팠다.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필립이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그저 필립이라는 사람 인생이 가여웠다. 꿈속의 인연 때문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필립이 아니었다면 에반제린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스스로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먹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밉든 곱든 필립은 남편의 외로운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남편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 마음이 쓰이시면 북부에 한 번 다녀오세요. 당신에게 휴식이 필요한지도 몰라요.”

“같이 갈까?”

“저와 가서 무슨 휴식이 되겠어요. 오가며 마차 여행만 실컷 하겠죠.”

“하긴. 당신이 고생이지.”

“고생이라서 가기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녀오고 싶으시면 준비할게요.”

“아니야, 됐어.”

“나중에. 아이들이 다 크면 북부로 가요. 1년밖에 지내지 않은 곳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이 그리워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인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서로를 안아주었다.

결혼 10년차. 그들은 함께 있기만 해도 충분한, 아무리 오랜 침묵도 어색하지 않은 평온함을 얻었다. 그건 뜨겁고 격렬한 사랑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소중한 마음의 여유였다.

그녀의 보드라운 가슴에 얼굴을 기대어 꽉 끌어안고 있는 그를 루시아는 위로하듯 머리를 쓸었다.

“…데미안이 제 아버지가 죽은 나이가 된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형제가 죽었을 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당시에는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이 열여덟 살이 되면 자신이 공작 위를 받았던 것처럼 데미안에게 부담 없이 뒤를 맡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데미안을 보니까 참 어린 나이였다. 어른인 척해도 어설픈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드러나는 데미안은 휴고의 눈에 여전히 아이였다.

“당신이 너무 응석을 받아줘서 그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데미안 녀석 말이야. 아직 애라고. 내가 그 나이에는 안 그랬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한마디 해야겠네요. 당신도 이브 응석을 너무 받아줘요. 다섯 살 떼쟁이처럼 군다고요.”

“무슨 소리야. 이브는 어려. 이제 일곱 살이잖아.”

루시아는 그를 흘겨보았다. 남편은 아들과 딸을 대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격차가 났다.

“당신은 여섯 살에 데미안을 기숙학교에 보냈어요. 여섯 살이면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하셨다면서요?”

“그건……! 누구야? 누가 일렀어. 데미안인가? 제롬이야?”

“절대 말 안 해요.”

“말 안 하면 방법이 없나? 둘 다 족치는…….”

“휴!”

루시아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안으로 투덜거리면서 들었던 고개를 다시 그녀의 가슴에 묻었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루시아는 피식 웃었다. 나이가 들수록 귀여운 남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들 앞에서 근엄한 아버지인 척, 사람들 앞에서 차갑고 냉정한 모습만 내보이는 그를 보면서 가끔 속으로 웃었다.

“당신이 아버지의 눈으로 데미안을 봐서 그래요. 부모 눈에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리대요. 이브가 나이가 들어서 스물, 서른이 되면 당신 눈에 어른으로 보일 것 같나요?”

“…….”

“데미안은 다 컸어요. 저와 당신 눈에는 어리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른이죠. 그 애에게 친아버지 이야기를 해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요. 속이 깊은 아이예요. 어디까지 말씀하실 거예요?”

“…로암에 있는 비밀의 방을 다 태워 버리려고 했어.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생각이 바뀌셨어요?”

“데미안도 알아야 할 것 같아. 받아들이는 건 녀석 몫이지.”

휴고는 필립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기록들을 지금도 가끔 들추어보곤 했다. 필립의 가문이 대대로 내려오며 축적한 의학적 지식은 죽어가는 사람 목숨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필립의 기록물 중에는 타란 혈족의 여자가 평범한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실험한 결과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행히 에반제린은 평범하게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에반제린이 몇 번의 잔병치레를 하는 동안 휴고는 기록물의 도움을 받았다. 고열이 빠르게 가라앉는 딸 곁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학 지식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하나의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쌓은 지식은 보물이었다. 비밀의 방에 있는 지식 역시 보물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데미안이 당신 뒤를 이으면 반밖에 물려받지 못하는 셈이죠.”

“로암에 돌아가면 당신도 들어가볼래?”

“아니요. 예외를 만들지 마세요. 그 방은 앞으로도 타란의 주인만 들어갈 수 있도록.”

휴고는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딴 건 몰라도 데미안 녀석. 나보다 좋은 부인은 얻지 못할걸.”

루시아는 웃으면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데미안은 저보다 훨씬 예쁘고 현숙한 아내를 얻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다니까.”

“이상한 데서 데미안과 경쟁하려 들지 마요. 우리 이브도 당신보다 멋진 남자를 남편으로 얻을 거라고요.”

“아무래도 우리 딸은 결혼을 못 하겠어.”

“네?”

“그런 남자가 있을 리 없잖아.”

“아우, 정말.”

웃음을 터뜨리는 아내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휴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 그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말했다.

“휴. 이번 당신 생일에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뭐기에 그렇게 자신만만이야? 기대하지.”

제작 의뢰를 맡긴 부토니에의 완성이 대충 그의 생일 날짜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아는 부토니에를 그에게 선물로 주면서 꿈속의 이야기를 덧붙일 생각이었다.

도대체 꿈속 부토니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둘이 머리를 맞대고 추리하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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